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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60년 전 5월 8일은 히틀러 제 3제국의 몰락과 함께 유럽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날이다. 아시아에서는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9월 2일까지 넉 달여를 더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부터 파리 해방,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베를린의 몰락까지 올 한 해는 인류 역사 최대 비극을 기억하는 행사들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 박영신
바로 이것이 시몬 베이 프랑스 전 보건장관을 만나야 하는 이유였다. 16세 되던 해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됐다가 1945년 연합군에 의해 구출된 아우슈비츠 생존자 시몬 베이.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끝내 살아서 프랑스 땅을 밟지 못했다.

1975년 1월 17일 당시 보건장관이었던 시몬 베이는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베이법으로 불리는 이것은 프랑스에서 살인적인 불법 낙태 시술을 마감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재단 사업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시몬 베이와의 인터뷰는 30여 분간 진행됐다. 시몬 베이는 인터뷰에서 유럽 사회가 2차 대전의 악몽에서 벗어나 화해의 장에서 만나기까지 책임 있는 독일의 역할이 주효했다고 강조했다.

전쟁의 참상과 과오를 숨기지 않고 낱낱이 파헤쳐 기록한 독일 역사학자들의 업적을 수차례 강조한 시몬 베이는 현재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고 있는 반일정서도 가해국인 일본 역사학자들의 노력으로 개선될 수 있으리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밝히기도 했다.

다음은 시몬 베이와 나눈 대화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독일은 책임지려하고 있다"

- 2차 대전 당시 독일은 유대인 말살 정책 등 수많은 비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 프랑스는 지금 독일을 용서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실질적 피해자들만이 '용서한다'는 말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용서'라는 말은 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프랑스 정부를 비롯해 우리가 지금 용서한다고 말할 입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프랑스 국민이나 정부는 독일 국민 특히 전쟁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독일 젊은이들에게 책임을 강요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비난의 화살은 당시 비인도적 범죄를 주도했던 고위 책임자들에게 돌려야 하겠으나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이들 중 많은 수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집으로 돌아가거나 남미로 도망가 버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와 같은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다.

전후 '화해'는 재빠르게 이뤄졌는데 이것은 독일이 (과거를) 망각하지 않고 철저히 책임지려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일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끊임없이 과오를 인정해 왔다. 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요슈카 피셔는 지난달 나치 전력이 있는 전현직 외무부 관리들의 부고(訃告)를 외무부 내부 회람에 싣지 말도록 지시한 바 있다-이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일 것이다. 헬무트 콜,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매번 총리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독일의 과오를 책임질 것을 요구해온 것이 사실이고 또 그들은 꾸준히 인정해 왔다.

몇몇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의 독일 역사학자들도 올바른 역사의식을 기반으로 많은 연구 성과를 이뤄냈다. 이들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나치에 재정적으로 협력하거나 집단 수용소 수용자들의 노동을 착취한 거대 기업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프랑스와 독일 양국이 과거보다 더욱 돈독한 우정을 가꾸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기반으로서 유럽연합 건설의 원동력이 됐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류가 과거의 악몽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화합하는 것이며 이 길에 나는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

유럽의 예가 소중한 것은 독일이 과거를 인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범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많은 다른 나라들에 귀감이 되고 있다."

ⓒ 박영신
-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됐다가 해방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온 경력을 갖고 있는 당신의 경험에 비춰 보면 어떤가. 좀더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해 달라.
"내가 경험한 것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으나 내 부모님의 죽음을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그 어린 아이들이 차례차례 죽어나가는 것을 나는 목격했다. 지금도 유대인 말살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며 자문하곤 한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된 그 아이들을 대신해 누군가를 용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처음 나치 집단수용소로 끌려간 이들은 다름 아닌 나치 반대파들이었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나니 히틀러 독재에 대항할 용기가 독일 국민들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은 가해자들의 후손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

"10살 된 프랑스 아이도 독일의 만행 정확히 배워"

- 현재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에 대한 반일 감정 등에 대해 알고 있나?
"그와 관련해서 많은 기사를 읽었다. 역사는 오래도록 지속된다. 오래 전 한 랍비가 '모세가 사막에서 탈출하기 까기 40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했던 말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진실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2세대는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역사에 대해 어른 세대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얻고 있다. 우리가 청소년이었을 때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또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았으나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못했다는 죄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의 상황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일본 역사가들의 몫이 아니겠나. "

- 일본 정부는 진실을 은폐하고 어린이들이 공부할 역사 교과서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나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재단 회장을 맡고 있어 각종 연설회에 초청된다. 프랑스 대도시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 마을을 방문하기도 하는데 여덟 살에서 열 살 된 아이들이 유대인 말살에 대해 선생님들로부터 정확하게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바닥에 앉아서 나와 대화를 하는데 참으로 기특하고 흥미로운 질문을 많이 했다. 올바른 교육 정책의 결과다. 우리 재단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어린이들에게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자는 것이며 이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작업이다."

- 전쟁 피해국으로서 프랑스의 역할을 되짚어 볼 때 프랑스와 독일이 하나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가 본보기가 된다면 그것은 단지 양국 정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노력도 언급해야 한다. 알자스와 로렌 지방이 독일에 점령됐을 때 독일인을 대하는 일반 프랑스인들의 감정은 끔찍했다. 독일인들의 감정도 이에 못지않았겠으나 프랑스인들의 증오와는 사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시무시한 1차 대전의 야만을 기억하고 있던 당시 국민들에게 닥친 2차 대전의 참상이 끝나기까지 5천만의 생명이 희생돼야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화해를 목적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비극이 다시 한번 일어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하겠나.

내가 유럽의회 의장직을 맡았을 때 독일 의원들과 만나게 되면 그들이 '그 당시'에 무슨 일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곤 했다. 그러나 화해를 목적으로 결정을 내렸으면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이 철저히 인정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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