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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
ⓒ 박선경
어느 누가 제 부모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내 피붙이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어서 당사자들 외에는 감동을 받는 경우가 별로 없다. 모두들 지 새끼, 지 부모만 소중해 아쉬운 세상이다. 나 욕하는 것은 참아도 부모 욕하는 것은 참지 못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보다.

내 부모, 내 새끼, 내 형제 위하는 건 당연한 것인지라 사람들은 그것조차 못하는 인간들을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 하고 천륜을 버렸다하며 몸서리를 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것은 부모의 내리 사랑 외에는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어떤 말로 부모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 가족에게 더 잘하자는 것이 이기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내 가족만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되, 존경에는 이유가 있다.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내가 존경할 건더기가 없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 경우가 없는 이유가 아마도 부모님에게서 처음 사랑을 받았고, 가장 지극한 사랑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부모님은 사람들이 대부분 갖고 있는 편견이 별로 없으시다. 몇몇 경험들로 인해 특정 지역 사람을 싫어하는 점이나 정치적 보수성 등은 고치기 힘들고 좋지 않은 생각이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장애인이나 별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에 대해 편견이 없으시다. 대신, 게으르고 똑똑치 못한 사람을 경멸하신다.

많은 크리스천이 말로만 사랑인 경우가 많아서, 세상의 소외받는 모든 사람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고 떠드는 건 쉽다. 국회의원의 절반 이상이 크리스천이라는데 말해 더 무엇 하겠는가. 막상 닥치면 드러나게 마련인 편견을 부모님은 좀처럼 보이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가난할지언정 금지옥엽 키운 당신들 딸내미 배우자에게도 그런 편견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거다. 얼마 전 아빠에게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면서도 감동받았다. 내 남편감으로 장애인도 힘들기는 하겠지만 반대는 안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우리 집에서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금기시되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는 신앙인 중에도 못된 인간들이 많고, 심중 깊지 못한 것들도 많다며 네 믿음 생활하는데 반대만 안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반대 안하겠다고 말씀하실 때도 놀랐다.

교회의 어른인 장로라는 사람들도 장애인 시설에서 아이들도 제대로 안아주지 않고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서 물품 전달하고 사진만 달랑 찍고 오는 것을 보며 교회를 삼십년 가까이 다녔다. 아빠, 엄마의 그런 말씀은 충격이면서도 감동일 수밖에 없다.

네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가난해서 방 한 칸 얻을 돈 없으면 아파트 방 내줄 테니 들어와 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꼴에 대학원까지 다닌 내가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과 사랑한다 해도 딱히 반대하지 않겠다고 엄마는 예전부터 말씀하셨다. '학삐리 같은 놈'만 좋아하는 내가 문제라고 오히려 꾸짖기도 하셨다.

덕분에 내가 결혼을 한다면 물론, 다른 조건 하나 볼 거 없이 사랑만이면 되는 거다. 적어도 내 부모님은 다른 어른들이 보는 조건들을 달지 않으시니 그만큼 자유롭지 않은가.

물론, 내 배우자에 관한한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있다. 나를 부모님만큼 사랑할 것. 이 조건대로 하자면 나는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 나를 부모님만큼 극진히,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내 부모님은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삶의 기반임을 아신다.

재작년 겨울, 숙모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수억이 드는 치료비 때문에 숙모는 치료를 포기하셨다. 치료받자면 가게도 팔고, 집도 팔고 그동안 모아놓은 작은 통장도 털고 그렇게 해도 낫기 힘든 병인데 괜히, 아이들에게 그저 가난만 물려줄 뿐이라며 그냥 편하게 가겠다고 하셨다. 병 나을 걱정만도 태산인데 치료비 때문에 전전긍긍한 끝내 내린 결정이었다.

치료받지 않으면 몇 주밖에 살지 못한다니 기도원에 들어가시겠다며 입원조차 하지 않으시고 삼촌과 남산을 오르며 '마지막 외출'을 하셨다. 그 소식을 듣고, 아빠는 숙모에게 전화로 그러시면 안 된다고 사셔야 한다고 울먹이셨다. 엄마도 한참을 우셨다. 어떻게 해든 하는 데까지 치료해야 한다고 설득하셨다. 그 전화를 받고 숙모는 치료를 결심했다고 말씀하셨다. 곧바로 입원하셔서 항암치료를 시작하실 때 처음, 아빠는 회사도 차치하고 병원에서 환자 가족 상담을 받으며 여러 가지를 알아보셨다.

그때는 몇 년간 하우스 생활을 하며 모은 돈과 거액의 대출금을 끼고 지금 사는 아파트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으셨는데도 스스로 그 아파트를 은행에 잡히고 돈을 빌려 숙모 치료비에 보태셨다. 쉬운 일, 아니다.

숙모가 얼마 전 아주 예후가 좋다는 담당 의사의 흥분 섞인 격려의 말을 들으며 골수이식수술에 성공하고 퇴원하셨을 때 우리 가족은 가서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부모님은 진심으로 애달파 하면서 기도하고 헌신하셨다. 엄마는 사촌 동생들을 위해 직장을 마치시고 정기적으로 그 집에 들러 음식이며 빨래며 챙겨주셨고 아빠는 좋은 음식이 생기면 아이들에게 꼭 가져다 주셨다.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삶의 근간이다.

내 부모님은 당신들과 가족만을 돌보며 살지는 않으신다.

이런 세상에서 그저 연민과 동정어린 마음으로 자기 것을 조금 떼어주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이 되겠느냐마는 진심어린 나눔은 당장 받는 사람에게는 도움도 위로도 된다.

예전 다니던 교회에 대책 없는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교회에 오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외출과 식사. 누구나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 고요한 예배시간에 "오늘 음식 뭐여~"하며 목사님보다 더 크게 떠들어대는가 하면, 예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 사람 저 사람 헤치고 식당으로 향하시는 막무가내 노인네였다. 누구나 다 조용하게 그 할머니를 싫어하고 무시하고 피해 다녔다.

그 교회에서 오직 아빠와 엄마만 그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짐 들어 드리고, 가끔 가서 그 난장판 쓰레기장 같은 집도 치워주시고(나, 엄마 따라 한번 갔다가 곧바로 뛰어나왔다. 토하러…) 김치를 담그면 덜어다 드렸다. 태도도 어찌나 공손하셨는지 모른다.

그 할머니는 나한테 어떤 때는 색시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어느 국민학교 다니냐고 하는 정신도 오락가락 하고 괴팍하기 그지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그 할머니 말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막 대하기 일쑤였다.

아빠는 한 번도 그 할머니께 허투루 대한 적이 없으셨고, 때문에 억지로라도 우리도 할머니께 공손할 수밖에 없었다. 못 배우고 한이 많아서 그러시는 거라며, 이런 할머니한테 함부로 대하면 ‘후레아들 노무새끼’(못된 놈)라 하셨다.

게다가 몇 년 전 부터는 그 빡빡한 살림 중에도 월드비전에서 외국 어디의 한 아이를 매달 후원하고, 국내 아이도 후원하고 계시다. 아빠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좀 부끄럽기까지 하다. 나는 아빠의 1/10도 나누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진 것의 1/10이나 1/20을 떼어서 나누는 데 부자 놈들에게 조금 걷어서 아이들 밥은 안 굶게 했으면 좋겠다 말했다가 못됐다고, 빨갱이라는 소리는 듣긴 했지만 말이다.

아빠는 나중에 은퇴하시면 돈 좀 모아 양로원 비슷한 거 하나 지어서 갈 곳 없는 노인네들 모셔다가 함께 살다 죽고자 하는 게 소원이시란다.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게 소원이시라는데 할 말이 없다.

내 부모님은 언제나 치열하시다.

언제나 새벽녘에 일어나서 일터로 나가시거나 살림을 챙기시기 바쁘시다. 나는 아직도 아빠의 열독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한 달에 고작 열권 남짓한 책을 읽는 나에 비해 아빠는 스무 권 정도를 정독하신다. 새벽에 일어나 늦게까지 몸과 마음을 치열하게 가다듬으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나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하신다.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내게는 그래서 명백하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가난하기 때문에 늘 찌들어 살아야 한다면 이 사회에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말이다.

내 부모님은 소년, 소녀 적 취향이 아직 남아 계시다. 강릉은 눈이 한번 내리면 사람 무릎 높이로 쌓이고, 바람이 한번 불면 사람 넘어가게 분다. 강릉에 있을 때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운신을 못하고 있다 전화하면 아빠는 쌀이 똑 떨어져 라면으로 며칠간 끼니를 때우시면서도 거기는 눈이 오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셨다.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것만큼 불행한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이때부터 알았다.

예전부터 꽃화분을 극진히 아끼셨던 엄마는 지금도 천원, 이천원짜리 화분이나마 사서 예쁘게 가꾸고 심으신다. 꽃이 뭐 말라비틀어진 밥벌이냐는 내 타박에도 한번 당신 손에 들어온 화분은 절대 죽이지 않는다.

엄마는 생일 때나 크리스마스 때 손으로 만든 헝겊 가방이며, 손뜨개 조끼를 선물로 만들어 주시며 즐거워 하신다. 밤을 새서 한 땀 한 땀 만들어 주시는 손길 속에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진귀한 사랑을 느낀다.

내 부모님은 자식 같은 사람들 때문에, 부모 같은 사람들 때문에 누구에게나 함부로 대하지 않으신다. 아빠는 밖에 나가서 식당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 뭔가 마구 요구하지 않으신다.

내가 대학시절 방학 때마다 양양이나 강릉에 있는 식당에서 먹고 자며 서빙하며 당한 서러움 섞인 푸념을 늘어놓고 나서부터 부쩍 더 그러신다. 엄마는 나이 드신 분들이 무거운 걸 홀로 들고 다니는 것을 한 번도 그냥 넘기신 적이 없다. 나이 들어 리어카를 끌고다니며 넝마주이 하시는 분들 때문에 일부러 집에서 못 쓰는 재활용품을 모아다 가져다주기도 하신다.

내 자식만 바라보고 그 너머 사람은 못보고, 내 부모만 바라보고 그 너머 사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이런 부모님의 삶은 내게 감동이고, 귀감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런 부모님 밑에서 나같이 못된 아이가 나온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물론 우리 부모님에게 좋지 않은 점도 꽤나 많다. 그 때문에 수없이 싸우고, 마음 상하고, 상처를 받는다.

요즘에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서른 되기 전에 시집보내는 것이 지상목표이자 모든 삶의 근간인양 하시는 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그래도 나에게 이런 부모님을 주시고 사랑받게 하시고, 덕분에 사랑을 알게 하신 것은 그분이 내게 주신 축복임을 안다.

이러니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분들에게 우리 삼남매는 전부요, 나에게 부모님은 버팀목이다.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 응모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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