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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없고 혼자 살기에는 건강도 체력도 따르지 않지만 양로원 같은 시설에 들어가기를 한사코 꺼리는 어르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인의 집'이라는 제도가 도입돼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도부터였다.

'노인의 집'은 일반 주택이나 아파트, 연립주택을 얻어 몇 분의 어르신들이 공동생활을 하시도록 하는 것으로, 양로원과 가정의 중간 형태여서 좋은 점도 많지만 가족 아닌 분들이 모여 생활하려니 이런 저런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밤에 일찍 주무시는 분들은 '빨리 불 끄라'고 성화를 부리고, 밤잠이 없으신 어르신은 '아직 안 자는데 왜 불 끄라고 하느냐'며 화를 내신다. 또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어르신을 왕따시켜서 돌려 앉히는가 하면, 하도 싸우다 지쳐서 다들 '노인의 집'을 떠나고 결국 한 분만 남아 홀로 살고 계시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서너 분이 모여 사는 일도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데, 할머니 할아버지 육칠십 명이 한 집에서 사신다면 어떨까? 그 구구한 사연들이야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마침 양로원에 모여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꾸밈없는 이야기들을 모은 책을 만났다.

책 <천혜원에서 생긴 일-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꾸밈없는 이야기>는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에 있는 무료 양로시설인 '천혜 경로원'에서, 1991년부터 2004년까지 14년 동안 후원회원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에, 한 달에 한 편씩 같이 써서 보낸 어르신들의 알콩달콩 사는 이야기이다.

매일 밤 잘 넘기면서도 마주치는 직원들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나 오늘 저녁 냉길랑가 모르겄소"하시는 할머니. 이가 거의 없어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몇 번에 걸쳐 불어야 모두 끌 수 있는 어르신들. 담요가 바뀌지 않게 직원들이 '복님'이라 이름을 써넣었는데 글자는 모르고 몇 글자인지만 아는 할머니는 자기의 이름 '정복님'에서 한 글자가 모자란다며 밤잠을 설치신다.

할아버지 한 분은 주먹을 날리고, 한 분은 목침을 던져 말 그대로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기도 하시고, 하도 까다로워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다 드디어 한 방에서 만난 두 할머니가 역시 또 싸우시니 직원들은 할 수 없이 방 안에 칸막이를 해드린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할아버지들도 할머니들도 각기 '모두 다 내 죄'라며 화해를 하신다.

언젠가 양로원 부속 건물 공사를 할 때 레미콘 차량이 와서 콘크리트를 붓는 날, 직원들은 친절하게도 새로운 구경거리가 있다고 원내 방송을 하고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우르르 나와 구경을 하신다. 장난삼아 구경 값을 내시라고 하니 할머니 한 분이 천 원을 내밀며 사실은 어제도 봤다고 고백을 하신다.

89세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영정이 양로원 영안실에 모셔지니 양로원 동료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연고자도 주민등록도 없는 할머니는 화장을 해 뒷산 솔밭에 뿌려진다.

이 책은 이렇듯 어느 페이지를 펼쳐 들어도 웃음과 눈물과 가슴 아릿함과 뭉클함과 작고 소박한 행복을 만날 수 있다. 노년 이야기가 차고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 어찌 보면 화려하지도 않고, 오히려 촌스럽게 보이는 책이지만 가족과 함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어르신들의 진한 속내와 더하고 뺌 없이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운명이었든,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나태함 탓이었든, 구조적인 빈곤의 악순환 때문이었든 책 속의 어르신들 중에는 자신이 노년에 이르러 가정과 가족을 떠나 아는 이 한 사람 없는 무료 요양원에서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나아가 생의 마지막 순간을 양로원에서 맞겠다고 계획했던 분은 한 분도 안 계실 것이다. 아니,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 앞에서 어르신들은 때로 절망하며 반발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받아들이고 포기하고 적응하며 새로운 관계에 몸을 얹고 살아가신다. 여기서 눈에 뜨이는 것은 어르신들을 집단생활의 틀에 맞춰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어르신들 중심으로 모든 일상생활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려는 직원들의 자세이다.

두 할머니가 악을 쓰며 싸움을 그치지 않자 사무실에서 방송을 한다.

'더운데 수고가 많으시다. 안 싸우고 살면 더욱 좋겠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싸울 때도 있다. 그러나 다른 분들 생각도 해 주셔서 앞으로 5분만 더 싸우고 그쳐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싸움은 계속되었지만 조금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진다. 이따금씩 양로원으로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는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부러워하는 할머니를 위해 양로원 원장이 양로원 앞 공중전화에서 할머니께 전화를 건다. 원장과 전화 통화를 마친 할머니는 잊지 않고 인사를 하신다.

"전화 해 줘서 고맙소!"

'사회복지시설이 아무리 발전된다 하더라도 가정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의 분위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입니다.'

천혜 경로원이 홈페이지에 밝혀둔 운영방침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대목들이다. 밖에 나갔다가 혹시 길을 잃었을 때 누군가 도와주겠다고 하면 어디에 살고 있다고 대답하시겠느냐는 질문에, 할머니 할아버지들 말씀은 '천혜 경로원' '학동에 있는 양로원'에서부터 '나는 그런 것 몰라' '나는 우리 집 눈감고라도 찾아' '나는 노인 공장에서 살아라우'로 이어진다.

'노인 공장'에서 산다고 말씀하신 할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사실 양로원은 노년에 이르러 새로 몸담게 된 제 2의 가정일 수도 있고,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정거장일 수도 있다. 양로원에, 그리고 그곳 직원들에게 남은 생을 온전히 맡긴 채 하루하루 삶을 채워 가시는 분들이 사시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도 아닌 덜도 아닌 우리들 살아가는 일 그대로이다.

책 읽는 내내 나를 울리고 웃기던 양로원 어르신들은 양로원에서 단체로 해드린 한복을 모두 곱게 차려입고 책 앞날개 사진 속에 모여 앉아 우리들의 나이 듦을, 그리고 사람 한 평생의 곡절 많은 이야기들을 책을 덮은 지금까지도 계속 들려주신다.

덧붙이는 글 | 천혜원에서 생긴 일-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꾸밈없는 이야기 / 천혜 경로원 가족들 지음 / 성문당,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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