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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릉 주차장 왕벚꽃.
ⓒ 한성희
토요일(23일) 오전, 공릉 주차장에 도착하자 웨딩드레스를 입은 화사한 신부의 베일 같은 새하얀 왕벚꽃이 탐스럽게 피어 눈을 호사스럽게 한다.

이곳은 봄이 늦어 이제서야 벚꽃들이 하얗게 피기 시작한다. 봄과 여름이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더위까지 느껴지는 주말이다. 화창한 봄 날씨를 못 이겨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이 도시락과 돗자리를 들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릉 입구 늪지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봄나물을 캐는 사람들도 더러 보인다. 숲에 들어가서 식물 채취하는 행위는 금하지만, 늪지는 잡초가 자라면 어차피 정기적으로 제초해줘야 하기 때문에 나물 캐는 것을 특별히 금하지 않는다.

이 늪지는 달래도 있어 한두 뿌리 뽑아서 씹어 자연산 봄 달래의 향긋한 향취를 맛본 적은 있으나 나물 캐는 취미가 없어 구경만 할 뿐 공릉을 다녀도 나물을 캐 본 적은 없다.

뜨거운 햇볕에 쭈그리고 앉아 오리걸음으로 어기적거리고 다니면서 나물을 캐고 나서 온몸이 쑤셔 고생하느니, 차라리 시장에서 할머니들이 파는 나물 2000∼3000원 어치 사다 먹는 편이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난주에 왔을 때보다 한층 연두색으로 변한 순릉 숲에 잠시 들어갔다. 새 잎이 부산스레 돋아 나오는 나무들과 초록으로 고개를 내민 풀들이 숲을 화사한 수채화로 바꿔놓았다. 진달래와 남빛 현호색 꽃도 가득 피었다.

▲ 순릉 숲 둥글레 밭.
ⓒ 한성희
지난주만 해도 보이지 않던 둥글레가 무수히 돋았다. 자연의 힘에 경탄만 나온다. 싹도 안 보였는데 일주일 새에 이렇게 푸른 잎이 가득 돋다니. 잎을 말아 올리며 돋아난 초록빛 둥글레밭에 정신 팔려 들여다보다가 다시 걷는데 길 위에 뭔가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 순릉 숲 길을 가로지르는 뱀. 뱀은 정말 싫어!
ⓒ 한성희
으악! 뱀이다. 봄이 오면 다른 건 다 좋은데 이 뱀만은 질색이다.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뱀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느긋하게 길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뱀은 급할 거 없다는 동작이다. 하긴 뱀이 뭐가 급하겠나. 그리고 이 숲에서 뱀에게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저 가고 싶으면 아무 데나 지나가는 건 뱀의 마음이지.

이 뱀, 길을 가로지르다가 아예 멈춰버린다. 그동안 숲에서 여러 번 뱀을 만났던지라 이 정도로 크지 않은 뱀은 이제 겁도 나지 않는 걸 보며, 나도 어지간히 익숙해진 모양이다. 뱀이 지나가길 기다려 길을 걸어 들어가니 여기저기 산벚꽃이 활짝 피어 맞아준다.

▲ 분홍 레이스 같은 산벚꽃
ⓒ 한성희
잎과 꽃이 동시에 나오는 분홍빛 산벚꽃은 화사한 신부의 하얀 베일 같은 왕벚꽃과 달라서 수줍은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소녀 같은 청초함이 있다. 분홍 산벚꽃은 마치 핑크색 섬세한 레이스 망이 펼쳐진 것 같기도 하다. 화사한 숲은 계속 유혹하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에 만난 뱀 때문에 더 이상 올라가기가 꺼려져 길을 돌아 나왔다.

거시기 망주석

겨우 내내 조용했던 공릉은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에 활기가 넘친다. 공능과 영릉, 순릉 사초지마다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파주시 교하읍에 있는 지선 중학교 3학년 학생 200여명이 봉사활동을 나온 것이다. 겨우내 두더지가 사초지 잔디 속을 얼마나 쑤시고 다녔는지 잔디마다 들떠서 밟아주지 않으면 잔디가 다 죽어버린다.

▲ 지산 중학교 3학년생들이 왕릉 잔디밟기 봉사활동 중이다.
ⓒ 한성희
넓은 사초지의 잔디를 밟고 뛰어 다니는 아이들의 웃음과 소란이 조용했던 왕릉에 울려 퍼진다. 잔디를 밟으며 언덕을 오르내리는 것은 봉사활동치곤 아이들에게도 신이 나는 일일 터.

언덕을 오르내리다가 지쳐 영릉 석물 앞에 앉아 쉬고 있는 아이들에게 해설을 해주겠다고 했다. 인솔한 선생님이야 쾌히 승낙했지만 모처럼 수업을 벗어나서 능에 나온 아이들은 수업을 안 해도 된다는 관념 속에 들어간지라 쉽사리 모여들지 않는다.

"이리 모여라. 거기 니네들 뒤로 좀더 와. 어이구, 오는 데 10분은 걸리겠다."

선생님 성화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앉은 채로 엉덩이 뒷걸음으로 뭉기적거리며 겨우 모여든 아이들을 보자 이 녀석들에게 정통 왕릉 역사해설을 해봐야 씨도 안 먹혀 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해설 안 듣기 0순위인 중학생들이다. 기운이 펄펄 끓어 넘치는 이 아이들에게 우중충한 왕릉 석물이 무슨 흥미가 있겠는가.

▲ 잔디를 밟다가 영릉 앞에서 휴식 중인 학생들 뒤에 '거시기 망주석'이 보인다.
ⓒ 한성희
"여러분 안녕. 선생님은 여러분처럼 파주에서 자랐고 학교를 다녔어요. 이곳에 자원봉사로 나와 문화재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저기 기다랗게 솟아난 게 뭐죠? 이름 아는 사람!"

무덤을 등지고 앉아 나를 보던 아이들이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일제히 뒤를 돌아본다. 왕릉 석물 중에서 불쑥 솟은 건 망주석이다. 한 남학생이 용감하게 대답한다.

"거시기요!"
"맞다, 거시기. 잘 맞췄네."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잘 맞췄다는 소리에 비로소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거시기가 맞긴 한데 정식 이름은 거시기가 아니고 망주석이지요. 그럼 왜 망주석 거시기를 여기에 세웠을까요?"
"거시기하려고요."
"거시기하는 건 인류역사상 지금까지 내려오는 종족보존 본능 거시기구요. 이곳은 조선시대 사도세자 알죠? 그분의 형님 되시는 효장세자께서 잠들어 계시는 곳이죠."

▲ 중학생들이 거시기한 해설을 들은 뒤, 다시 영릉 사초지 언덕 잔디밟기를 하고 있다.
ⓒ 한성희
슬슬 이놈들의 표정에 지겨워지려고 한다는 위험성이 포착된다. 사도세자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다듯 시치미 떼는 녀석들에게 역사 얘기 해줘봐야 도움이 안 된다. 그럼 다시 흥미를 모아야지.

"남학생들은 학교에서 국사 시간 싫죠? 연대 외우고 왕 이름, 나라이름 외우는 거 지겹죠?"
"네!"
"여자도 싫어요!"

맞아요, 우리도 싫어요, 맞장구치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왕릉 사초지 잔디 위에 발랄하게 울려퍼진다.

"그럼 망주석 거시기가 그 거시기가 맞는데 왜 그 거시기를 여기에 세웠을까요? 조선시대는 무슨 산업으로 먹고 살았죠?"
"농사요."
"맞아요. 조선시대는 농경사회지요. 농사를 짓자면 뭐가 필요하죠?"
"땅이요."

아이쿠, 내가 원한 대답은 노동력이었는데 땅이 먼저였던 건 맞지.

"땅이 물론 필요하지요.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짓자면 뭐가 있어야 하죠?"
"소요!"
"소와 사람이 필요하겠지요? 농사를 짓자면 노동력이 필요하고 농경사회는 힘을 쓸 수 있는 아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소득을 많이 올릴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저 거시기는 농경사회의 특징인 남아선호 사상을 나타내지요. 즉 다산과 풍요가 망주석 거시기의 의미 중 하나예요. 자, 그럼 거시기는 이 정도로 하고 저 앞에 보이는 저 문은 무엇일까요?"

"빨간 문이요!"
"레드 문이요!"

홍살문이 붉은 색이고 홍문이라고도 하니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10대들답게 재치 있는 대답들이 날 즐겁게 한다. 이런 식으로 홍살문과 혼유석, 정자각의 설명을 대충 마치고 나니 옆 반에서 기웃거리며 듣고 있던 아이들도 흥미를 보인다.

다시 옆 반 아이들에게 가서 한바탕 '거시기'로 시작해서 거시기한 역사해설을 했지만 마무리는 그래도 문화유산해설사답게 깔끔하게 마쳤다.

"이곳에 오면 여기 계신 분이 누군지 또 이 유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지요. 여러분이나 선생님이나 이곳이 고향이니 내 고장에 있는 역사유적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고 다른 관람객이 와서 행여라도 유적지를 훼손시키는 행위를 하면 앞장서서 막아야겠지요? 이곳은 자랑스런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입니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일어서서 잔디 위를 걷는 아이들의 기운찬 발자국이 왕릉 사초지에 들뜬 두더지 흔적을 꽉꽉 다졌다. 이 봄날,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과 아이들의 발랄한 목소리에 근엄하게 잠든 왕과 왕비도 빙그레 웃음을 흘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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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출생, 현 파주저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