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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들이 자유로운 세상 '나무나라 어린이 마을'

▲ 겉그림입니다.
ⓒ 민들레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에도 집에 일찍 보내지 않고 도시락을 싸오게 해서 다섯 시까지 '말뿐인 자율학습'을 시켰습니다. '자율'이라면 자기 집에서도 '자율'로 공부하면 될 일인데 딱딱하고 비좁은 교실에 가두어 놓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헌책방에 책 보러 가겠다"면서 13시에 토요일 수업을 마친 뒤에 집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때는 헌책방 나들이하는 즐거움을 갓 느꼈던 때로, 1분이라도 더 반가운 헌책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교무실에 있던 교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새책방도 아닌 헌책방에', 더구나 '참고서가 아닌 일반 책'을 보겠다며 자율학습을 받아들이지 않는 저를 마음 속으로 헤아려 주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히죽히죽 웃으면서 농담이나 지껄이고 교실로 돌아가라고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지 않고 버텨서 끝내 토요일 자율학습을 몇 번이나 안 하고 헌책방으로 갈 수 있었어요.

.. 우리들이 하는 방식이 완전무결하다거나 "교육을 모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의도도 없다. 말하자면 키노쿠니는 백화점이 아니라 작은 전문점이다.. <32쪽>

두어 달에 걸쳐서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민들레, 2001)이란 책을 다 읽었습니다. 이 책은 일본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히코다니라는 산골마을에 조그맣게 문을 연 자유학교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 이야기를 다룹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숫자도 많지 않고, 일본에서도 구석진 시골에 있는 학교인데, 영국에서 니일이 문을 연 '서머힐' 같은 자유학교를 꿈꾸며 "아이들 하나하나가 둘도 없는 존재(20쪽)"라고 생각하면서 문을 연 곳입니다. "교사가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맞추어 그 아이가 갖추었으면 하는 태도와 능력의 목표를 세(184쪽)"울 수 있는 학교가 바로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입니다.

참 놀랍고 반가우면서 부럽습니다. 밤 열한 시까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에 찌들고 집에서 자는 시간도 하루 다섯 시간도 채 되지 못한 채 학교를 다녀야 한 일을 떠올리니 그래요. 참다운 앎이 아닌 시험공부 지식만 머리에 넣으면서 몸도 마음도 시들고 병들어야 한 일을 떠올리니 슬프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끔찍한 '입시중심 제도권 교육'이 사라지고 아이들 하나하나를 가만히 살피며 자기 자유를 마음껏 키워서 참 사람으로 이끌어주는 학교가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학교가 잘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반갑고 고맙습니다.

... 먼저 학교의 주인은 아이들이 아니라 교사이다. 아이들은 단지 나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좁은 교실에 한 데 처박혀 앉혀진다. 아이가 재미있어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교재를 모든 학생들이 일제히 배우도록 강요받는다. 본래 활동적인 아이들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약을 받으며 하루종일 앉아서 보낸다..<169쪽>

'학교'란 이름을 붙이지 않고 '마을'이라 했고, 그냥 마을도 아닌 '어린이 마을'이라고 이름을 붙인 '키노쿠니'입니다. '키노쿠니(木の國)'란 말도 '나무나라'이니, "나무나라 어린이 마을"이 이 학교 이름인 셈입니다.

학교는 교사가 아닌 아이들이 주인이고, 교사들이 아이들한테 '어떤 것은 반드시 외워서 알아야 해'하면서 시험공부와 점수따기를 억지로 시키지 않는 곳. 자기가 할 일은 스스로 찾게 하고, 자기가 공부할 것도 스스로 찾게 하는 곳. 모든 일은 아이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어서 풀게 하고, 무엇을 만들고 짓고 일과 놀이를 꾀할 때도 스스로 찾도록 하는 곳. 국어나 산수를 지식이 아닌 실천으로, 실제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서 쓸모가 있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현실에서 받아들이며 배우고 쓸 수 있도록 하는 곳.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은 일본 시골 한켠에서 조그맣게 문을 열었지만, 바로 이런 마음과 생각으로 온 나라 학교 아이들이 배우고 어울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뜻은 아이들이 어떤 지식을 많이 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람이 되어 자기 일을 즐겁게 스스로 찾아서 다 함께 어울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이끄는 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데 있을 테니까요.

<2> '대안'이 아닌 대안학교

'키노쿠니'는 대안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도권에 반발하고 제도권을 거스르는 대안학교가 아닙니다. 제도권이든 제도권이 아니든,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작 아이들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이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부모들이 소중하고, 이 아이들과 어울리는 교사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마을 사람도 아이들에게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선생님'이다..<94쪽>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배우겠지만,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이끌고 여러 가지를 가르치겠지만, 교사 또한 그저 '주입식'으로 가르치기만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함께 움직이고 어울립니다. 교사는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마을 사람도 교사가 되고 부모도 교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어울리고 즐겁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곳이 대안학교이며, 이런 대안학교 중심 뜻은 보통 제도권 학교로도 이어져야 좋습니다. 학교 졸업장이 아니라 참 사람됨, 참 마음가짐, 참 슬기를 얻고 배우고 나눌 수 있는 곳이 누구나 즐겁게 다니면서 어울릴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여기에서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아이들은 별장을 만들기 위해 계산을 하는 것이지 계산 그 자체를 위해서 머리를 짜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곧 목적은 별장을 만드는 데 있다. 계산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다. 계산은 분명히 유용한 수단 또는 도구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에 내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학교나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그것 자체에는 실제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날마다 계산이나 수식의 조작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70쪽>

아이들과 부대끼는 교사 자신도 발돋움하면서 즐거울 수 있고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도 아이지만 어른도 어른입니다.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니, 모두가 한 동아리가 되어 움직여야 합니다. 가르치거나 배우는 줄거리도 어떤 값어치와 뜻이 있는지를 또렷하게 알아야 합니다. 교과서에 나왔으니 그냥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왔으니 그냥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배워야 하는 까닭, 배워서 어떻게 하느냐를 하나 하나 살피고 따지면서 '아하, 그렇구나'하고 느끼면서 아주 신나게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는 가르치는 사람도 신이 나서 훨씬 즐겁고 알차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여느 제도권 교육에서는 어떤가요?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을 읽으면서 '왜 이런 학교가 우리 나라에는 자리를 못 잡을까?', '학교는 재미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나?', '배움이란 모자라는 자기를 채우고 잘 모르는 것을 깨우치며 훨씬 나은 자기 자신을 갈고닦고 이끌어내는 일일 텐데, 어이하여 이런 배움을 펼치고 나눌 만한 자리가 없을까?'하는 물음이 잇따릅니다.

<3> 참되게 배워야 참되게 산다

요즘은 곳곳에서 대안학교가 생겨나고 '학교를 떠난 아이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고 사회를 속깊이 헤아리도록 이끌어주는 곳도 늘어납니다. 그동안 제도권 교육이 얼마나 몹쓸 것이었는가를 느낀 사람이 많은 한편, '이대로는 안 된다'하고 느끼면서 몸소 나선 사람이 많거든요.

..국어도 마찬가지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한자나 숙어를 그것도 이상하리만큼 정확하게 종이 위에다 재현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또는 다른 사람이 쓴 문장을 그 저자의 의도대로 읽고 파악하도록 강요받는다. 한자나 숙어의 암기나 어떤 명작의 감상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말과 글을 사용해서 자기를 표현하거나 마음을 주고받는 즐거움이 아닐까..<162쪽>

영어를 배우든 일본말을 배우든 중국말을 배우든 '어느 한 나라 말을 배우면서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익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과 고마움이 있어야'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좀더 이른 나이에 영어를 배워야 영어를 잘할 수 있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들볶습니다.

아직 우리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한테 영어를 가르치고, 너무 이른 나이에 글자를 깨치게 해서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학교 공부를 재미없어 하게 만듭니다. 배우는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고, 학교 졸업장 말고는 학교가 어떤 값어치와 뜻이 있는지 차츰차츰 잊혀지고 있어요.

.. 어느 것이나 지금까지 다녔던 학교에서 형식적인 민주주의밖에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들 생활의 중요한 일들을 알차게 토론하고 결정하는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 <41쪽>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자유와 평등이 무엇인지 전쟁과 평화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아이들이 없는 요즘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폭력을 휘두르고, 자유를 말하면서 남이 누릴 자유를 억누르는 한편, 평등을 외치면서 차별을 일삼습니다. 평화를 지키려고 전쟁을 해야 한다는 앞뒤가 어긋난 논리까지 판을 쳐요.

그러니까 지금 제도권 학교 틀에서는 껍데기만 배우는 셈입니다. 지식은 배우지만, 이렇게 배운 지식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값과 뜻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민주주의가 언제 싹이 텄는지는 알아도 자기가 발딛고 사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펼치거나 느끼지 못해요. 영어를 아주 잘한다고 해도 영어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입 다물고 있는 반벙어리와 마찬가지입니다.

.. 교재나 설비도 부족하다. 보수도 적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웃는 즐거움, 이것이야말로 키노쿠니 어른들에게 무엇보다도 큰 보수이다 .. <19쪽>

개처럼 돈을 벌어 정승처럼 쓸 수 없습니다. 정승처럼 벌어야 정승처럼 씁니다. 개처럼 돈을 번 사람은 개처럼 돈을 쓰기 일쑤입니다('개'를 욕보이려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교재나 설비가 모자라고 일하는 사람도 품삯을 많이 못 받지만 '훌륭한 교재와 설비를 갖추고 넉넉한 품삯을 받는 곳'보다 훌륭하게, 아름답게, 즐겁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면, 참다운 배움이자 가르침이 된다고 봅니다.

참된 마음을 품어야 참 되게 살 수 있습니다. 말뿐인 '어린이 사랑'이 아니라 몸으로 함께 하는 '어린이 사랑'이어야 하며, 내가 가진 지식을 무턱대고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즐거울 지식이 무엇인지 어깨를 겯고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은 참된 자유학교를 꿈꾼 '호리 신이치로'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여 작은 시골 대안학교를 열었으며, 이 작은 학교로 아이들과 무엇을 함께 하고 싶었는가, 또 아이들하고 함께 한 일과 놀이는 무엇인가, 학교란 어떤 곳이고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는 어떤 사이로 이어져야 좋은가, 아이들이 학교란 곳을 다니면서 무엇을 배우고, 이렇게 배운 것을 어떻게 속으로 받아들여서 아이들 나름대로 자기 꿈을 키워가도록 이끌어주면 좋은가 같은 이야기를 조곤조곤 펼칩니다.

책 정보

- 책이름 :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
- 지은이 : 호리 신이치로
- 옮긴이 : 김은산
- 펴낸곳 : 민들레(2001.11.15)
- 책값 : 8000원
아주 남다른 뜻, 큰돈, 높은 이름을 가져야만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고 믿고 함께하려는 마음' 하나로 부지런히 일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서 어느 누구라도 조금씩 참된 꿈을 이루어가는 즐거움도 이야기해요.

대안교육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우리네 교육 문제를 두루 살필 수 있습니다. 일본에 있는 시골학교 이야기를 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우리 나라 안에서도 얼마든지 실천을 해볼 수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믿고 아이들을 믿는다면 누구라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작은 꿈 이야기를 펼치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아직은 더딘 소걸음이지만, 탄탄히 차근차근 밟아 나간다면 굳세고 튼튼하고 잰 걸음도 될 수 있습니다.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은 다음 이야기로 책을 끝맺습니다. "산다는 일이 아주 멋지고 즐겁다"는 생각을 아이들한테 품어 주려는 마음, 바로 이 마음이 아이들을 믿고 사랑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깊은 뿌리구나 싶습니다.

... 시작한 지 이태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성과를 보고할 수 있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자기 평가를 해 보면 40점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의 깃발은 계속 높이 들고 싶다. 여러 가지 요구나 압력이나 경제적 어려움에 굴복하거나, 작은 타협을 되풀이하거나 해서, 그 결과 어느새 '조금은 괜찮은 학교' 정도로 떨어져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다. 아무튼 아이들이 "산다는 일은 아주 멋지다. 인생은 이렇게 즐겁다"고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가장 큰 것이다 .. <189쪽>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책과 우리 말과 헌책방을 사랑하는 모임인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 게시판에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키노쿠니 어린이 마을 - 세계의 대안학교 1

호리 신이치로 지음, 김은산 옮김, 민들레(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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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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