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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꽃
ⓒ 이정남 화백 제공
소강당 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던 학생들이 인파 때문에 여의치 않자 2층 통로나 계단에서 1층까지 무작정 뛰어내렸던 모양이다. 그것을 본 초희도 그들을 따라 난간 위로 올라가 1층으로 뛰어내린다는 것이 그만 발을 헛디뎠는지 잘못 뛰어내려 머리와 목뼈를 크게 다친 것이다.

노진은 나중에야 초희가 1층으로 떨어진 것을 알고 경찰에게 알려 병원으로 급하게 옮겼단다. 경찰차를 타고 병원까지 호송되는 중간에도,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중환자실로 옮겨질 때까지도, 그리고 중환자실에 올라가서 이튿날 날이 밝아오는 아침까지도 초희는 계속해서 오로지

"철민씨! 철민씨!"

하면서 나의 이름만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진은 급하게 나에게 연락을 하려고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연락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가 없더란다.

아마 지난밤 그 난리 통에 잃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연락을 할래야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나중에 기도원 주소를 알아낸 초희 아버지가 그나마 전보로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게 아니었는데! 정말 이게 아니었는데!"

후회막급이었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하면서까지 그녀를 떠나보낸 것인데, 그녀가 식물인간처럼 되나니, 어떻게 이런 결과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온몸이 떨렸다. 나는 맥이 팍 풀려 일어나 걸을 기운조차 없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른 나는 초희가 누워있는 병실로 올라갔다. 그녀는 여전히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예전처럼 여전히 따뜻했다.

"야 백설공주, 그 동안 잘 있었어?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했네. 우리 참 오랜만인데 인사라도 나누어야지. 어, 왕자님께서 오셨는데 그렇게 누워 있기만 할 거야. 빨리 일어나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구‥‥‥ ."

나는 슬픔을 감춘 채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큰 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여전히 깊은 잠의 호수에서 헤어 나올 줄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고 있었다.

"초희야, 내가 왔어. 네가 그렇게도 찾던 못난 이 철민이가 왔다구, 언제까지 이렇게 잠만 자고 있을 거야 언제까지‥ 일어나 봐. 빨리 눈을 좀 뜨고 나를 보라 구‥ 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다시는 너를 쫓아 보내지 않을 게. 정말이야 정말이라구.

이번엔 정말 약속할 게. 그러니까 일어나 봐 어서‥ 네가 이러면 난 어떻게 하라구. 나 마음 아파하는 거 너 못 참잖아. 나 지금 너무 너무 아파. 네가 이러면 정말 나 죽어버릴 것 같애. 그러니 빨리 일어나."

나의 눈물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꼼짝도 안하고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자니 정말 속이 터지고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에게 다시 한번 하소연했다.

"너, 나 왜 이렇게 아프게 하니? 내 마음 다 알면서 왜 그런 못난 짓을 했어. 철야농성장엔 왜 간 거야‥ 좀 조심하지 않구‥ 그냥 기다리면 되지 뛰어내리긴 왜 뛰어내렸니?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너에게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초희야,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툭툭 털고 우리 천수만에 가자. 너 가고 싶다고 했잖아. 우리 거기 가서 바다도 구경하 고 해지는 저녁놀도 감상하고 그리고 철새들과도 얘기도 하자 응? 내가 데리고 갈게.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란 말야."

그러나 내가 아무리 피를 토하듯 그렇게 애원해도 그녀는 마치 말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닫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4일째 의식이 없었다. 병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순백색의 피부였던 그녀의 몸이 점점 파래지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어렵다고 했다. 초희 어머니는 서울 큰 병원으로 한번 옮겨보자고 했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는 서울로 가도 별 수 없다고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당신은 그래 의사란 양반이 어떻게 자기 딸아이 하나 못 고쳐요? 도대체 애가 저 지경이 되도록 당신은 뭐하고 있느냔 말이에요. 어떻게 빨리 손을 좀 써 봐요. 우리 초희 저대로 그냥 죽게 내버려 둘 거예요 내버려 둘 거냐고요? 흑흑흑."

초희의 어머니도 속이 터지는 지 괜히 남편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초희 아버지는 그 푸념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

TV와 신문들은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6.29선언으로 파국으로 치닫던 정국을 건졌다며 대대적으로 떠들고 야단이었다. 역사적인 결단이냐? 아니면 대 국민 항복선언이냐? 여기저기서 말들이 분분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역사적 결단이든, 대 국민 항복이든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7월 2일. 병실 밖 보호자 대기실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간호사가 갑자기 뛰어나와

"빨리 들어와 봐요 빨리요! 초희씨가 눈을 떴어요 눈을 떴다고요!"

이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섬광 같은 그 목소리에 병실 안으로 달려가 보니 정말 그녀가 눈을 뜨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가까이 갔다.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초희, 나야 나! 철민이라고 날 알아보겠어?"

그녀는 말 대신에 눈빛으로 날 알아본다고 분명 선명하게 말했다.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두 눈에 빗물이 스며드는지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니, 어느새 둑을 넘어 얼굴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여전히, 지금도."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자기도 알고 있다는 듯 두 눈을 한번 깜박였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였다. 그녀는 그렇게 영원한 잠의 세계로 떠나버리고 만 것이다.


때늦은 후회

널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었음을
널 보낸 지금에서야 깨닫는 나
아, 네가 다시 나에게로 와주기만 한다면
정말 다시는 너를 잃지 않을 텐데





C대학에서는 초희의 죽음은 박종철군이나 이한열군처럼 경찰의 지나친 강제 집압 과정에서 발생한 불상사이기 때문에 초희를 민주열사의 반열에 올리고, 24일 농성장에 기습적으로 진입한 경찰 책임자를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고 들끓었다.

그러나 나중에 초희의 유서가 발견되면서 경찰은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지었다. 그녀는 22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엄마 아빠,
미안해요. 언니에 이어 나까지 이렇게 부모님 가슴에 못으로 남게 되어서…

다솜아,
미안하다. 언니가 정말 잘해주고 싶었는데…
너는 이담에 크면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절대 부모님 마음 아프게 하지 말아라

철민씨,
나도 당신의 마음을 다 알아요.
하지만 내가 견딜 수 없는 걸 어떻게 해요. 나를 용서해요.
천국에는 남자 여자가 없다는데, 그럼 우리 다시 만나 사랑을 할 수도 없겠네요. 혹시 내가 잘못되면 천수만에 나를 뿌려줘요.
그 곳에서 늘 해지는 서녘 노을과 철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그리고 철민씨와의 일을 반추하며 그렇게 살래요.

못난 초희가‥‥‥




아버지께서도 그 해 8월 포천 H기도원에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적이 나를 피해간 것일까? 남들처럼 악하게 살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나한테만 유독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아픔과 슬픔이 거듭거듭 생기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땅을 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욥의 심정으로 나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차라리 나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87년 여름에 나는 참으로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잃었다. 내 인생의 양대 기둥이었던 초희와 아버지를 잃었고, 그 다음에 주춧돌이었던 신앙마저 잃어버렸다.


나는 사진첩과 녹음 테이프, 편지, 일기‥‥‥ 등 그녀의 물건들을 다시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그리고는 내가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녀의 사진과 그녀로부터 받았던 편지들과 선물, 그리고 나의 일기장을 넣은 다음 그녀의 유품 상자를 조심스럽게 닫았다.

덧붙이는 글 |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53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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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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