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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령원
ⓒ 한성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10만여평의 숲이 우거진 소령원으로 들어서면 수백 년 된 침엽수의 청신한 향기가 느껴진다. 작은 수목원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풍광답게 짙은 녹색 공기가 코끝에 감돈다.

소령원에 가는 길은 찾기 어렵다. 국도 1호선 통일로에서 장흥 쪽으로 들어와 장흥유원지를 지나 말머리고개를 넘으면 양주시 기산리 저수지가 나타난다. 기산리 저수지에서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방향으로 길을 따라 오다보면 우측에 차량 하나가 겨우 들어갈 다리 앞에 '소령원'이라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어 자칫 지나치기 일쑤다.

▲ 소령원 정자각과 오른 쪽 수복방. 수복방 뒤로 영조의 친필로 쓴 비석이 있는 비각이 보인다.
ⓒ 한성희

13개 원 중에서 가장 경관이 수려한 소령원은 1991년 사적 제358호로 지정됐다. 소령원(昭寧園)은 영조의 친모인 숙빈 최씨(1670~1718)가 잠든 곳이다.

가장 지체 낮은 궁녀인 무수리에서 숙종의 승은을 입어 연잉군을 낳아 빈까지 올라간 여인. 그리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52년간이나 재위한 기록을 남겼으니 어찌 보면 조선 여인 중 가장 드라마틱한 수직 신분상승을 이룬 여인이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왕의 후궁이 될 수 있는 여인들은 거의 대부분 세도가의 양반 출신들이었다. 하찮은 무수리가 왕의 승은을 입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여인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숙빈 최씨와 같은 경우는 조선조 500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최초의 방계 승통인 선조 이후 조선의 왕 중에는 어머니가 후궁인 방계 승통은 종종 있었지만 숙빈 최씨처럼 미천한 신분은 없었다. 영조는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 때문에 어머니에게 더 극진하게 효도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 영조의 친필 비석 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
ⓒ 한성희
소령원은 영조의 효심이 깃든 곳이다. 13개 원(園) 중에서 유일하게 수복방이 남아 있는 곳으로 영조가 친필로 쓴 비석이 두 개 있어 어필을 감상할 수 있다. 영조는 어머니 최씨의 묘에 4개의 비를 세웠다. 정자각 동쪽에 있는 비각과 무덤 동편의 비각엔 1744년 영조가 친필로 쓴 비석이 있다.

관리사무소가 있는 뒤편 숲 속으로 들어가면 영조가 시묘살이 하던 99간 기와집의 주춧돌이 여기 저기 널려 있다. 주춧돌 옆으로 담장 일부가 남아 있어 지난 세월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조가 실제 시묘살이를 한 날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 사람을 시켜 대신 하도록 했을 것이다.

소령원의 황룡길

숙빈 최씨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정자각 뒤편 길은 까마득해 보이는 언덕길이다. 200여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구불구불한 잔디언덕 사초지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누런 잔디는 마치 황룡이 꿈틀대는 듯하다. 언뜻 저 긴 황룡이 영조를 상징해 영조가 장수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 숙빈 최씨 무덤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멀리 묘가 보인다. 오른쪽에 있는 비각에도 영조의 친필로 '淑嬪海州崔氏昭寧園(숙빈해주최씨소령원)이라 쓰인 비석이 있다.
ⓒ 한성희

관리인 아저씨는 "예전에 모 대학 사학답사반이 와서 이곳은 명당 중 명당이며 무덤자리가 황룡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알려줬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의 보는 눈은 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령원은 중국의 풍수지리지에 수록될 정도로 길지라고 한다.

명당자리니 만큼 이 묘를 두고 영조와 지관에 대한 갖가지 전설이 내려오기도 하지만 근거 없는 야사에 불과하다. 숙빈 최씨가 죽은 것은 숙종이 살아 있을 때였는데도 영조대왕이 지관을 불러 시험했다는 둥, 재야에 묻힌 지관이 왕을 만나게 됐다는 둥의 허무맹랑한 전설이 꼬리를 물고 있다.

▲ 잡상. 앞에서부터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정자각 지붕에 올라앉아 악귀를 막는다.
ⓒ 한성희

왕릉 정자각보다 키가 낮은 소령원 정자각 위에 얹힌 잡상이 눈길을 끈다. 원숭이 모습이 뚜렷한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이 올라가 있다. 맨 위의 것은 물고기 모양으로 봐서 사오정이 분명하다.

숙빈 최씨의 무덤 뒤에는 잉이 솟아 있고 수백 년 묵은 적송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석물들도 숙종 이후 나타난 사각 장명등과 작은 석물들로 능이 아닌 원이라는 계급을 나타낸다. 석호는 얼마나 작은지 마치 호랑이가 아니라 강아지처럼 보일 정도다. 수호 동물이 여덟 마리가 있는 왕릉과는 달리 양쪽에 두 마리씩 모두 네 마리가 있다.

▲ 묘비의 옥개석이 대궐의 지붕모양을 본뜬 것이라 한다. 곡장 뒤에 불쑥 솟은 잉이 무덤보다 더 크다.
ⓒ 한성희

무덤의 묘비 옥개석은 대궐의 지붕문양을 본떠 만들었다. 이는 영조가 어머니 신분에서 비롯된 열등감을 만회하려는 몸짓으로 보여 딱하기조차 했다. 이런 영조의 열등감 만회 몸부림은 신도비를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왕도 바꾸지 못하는 신분의 벽

소령원 초입에 영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1725년 박필성이 비문을 짓고 신방이 글씨를 쓴 '숙빈 최씨 신도비'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 거대한 신도비.
ⓒ 한성희

숙빈 최씨와 숙종 사이엔 딸 둘과 아들인 영조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신도비를 보면 숙빈 최씨는 아들만 셋을 낳았고 연잉군(영조)은 둘째 아들이라 기록 돼 있다. 첫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낳자마자 죽어서 연잉군만 남은 것이다. 숙종의 계보에서도 잘못 알려진 사례가 많으나 선원계도에 정확하게 나와 있고 이곳 숙빈 최씨 신도비문에도 세 아들이라 적혀 있다.

▲ 문화유산해설사인 홍승희 시인이 용의 발톱을 가진 거북이 발에 손을 대보고 있다.
ⓒ 한성희

신도비각을 꽉 채운 거대한 비석과 비석을 받친 거북의 정교함은 영조의 사모곡을 대신 하듯 정성들인 흔적이 보여 감탄을 자아낸다.

▲ 거북 목덜미의 임금 '王'자가 새겨져 있다.
ⓒ 한성희

받침돌은 거북이지만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고 용의 발톱과 꼬리를 새겼다. 거대한 거북 머리 뒤엔 '왕(王)'자가 새겨져 있어 숙빈 최씨를 격상시키려는 영조의 의도가 엿보인다.

워낙 거대한 비석이 비각을 꽉 채우고 있어 사진 촬영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렇게 훌륭한 조각을 한 신도비는 드물 텐데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왕비의 무덤이 아닌 숙빈 최씨의 무덤이기 때문이리라.

화강암을 단정하게 다듬어 만든 비각 8개의 거대한 주춧돌만 봐도 영조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소령묘에서 소령원으로 올리는 데만 10년이 넘게 걸렸던 영조에게 어머니를 왕비로 추존해서 능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묘로 묻혔던 숙빈 최씨의 무덤이 원으로 승격한 것은 1735년이다.

▲ 거북의 등에 연화문을, 몸에는 용의 비늘과 발톱을 정성껏 새겨 영조의 정성이 엿보이는 훌륭한 조각이 완벽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 한성희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 신위에 올라가지 못하자 1725년 생모를 기리기 위한 숙빈묘란 사당을 지었다. 1744년 육상묘로 개칭하였으며, 1753년에는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했다. 이 육상궁에 1908년 7월 23일 왕과 추존왕의 생모 5명의 신위들을 모아 봉안하면서 육궁(六宮)이 됐으나 1929년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빈 엄씨의 신위를 봉안해 현재 칠궁으로 불려지고 있다.

일부 대신들이 영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능으로 승격하자 건의하지만 영조는 이를 물리친다. 제 아무리 왕일지라도 서열을 파괴하면서 숙빈 최씨를 왕비로 추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조가 왕이 됐을 때 최씨가 살아 있었어도 왕비로 추존하긴 어렵다. 후궁인 빈의 신분으로는 아들이 제 아무리 왕이라도 추존왕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신분제도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버지인 숙종이 장희빈 사건 이후 후궁을 왕비로 올리는 일을 국법으로 금지해 버렸으니 영조로서도 육상궁이라는 사당을 짓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정조가 그렇게 사랑했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천장하고 현융원으로 그쳤던 것을 봐도 추존왕과 추존왕비는 함부로 올릴 수 없는 신분제도의 벽이었다. 사도세자는 왕세자의 신분이었지만 뒤주에서 죽을 때 영조가 서인으로 폐해 버려 묘에 불과했다.

왕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땐 별다른 이의 없이 추존왕이 되지만 사도세자는 서인의 몸이었기에 정조가 비록 왕일지라도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원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훗날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면서 장헌세자를 장종에서 장조로 추존하는 절차를 밟아 황제까지 오르지만 그것은 고종이 사도세자의 승통을 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소령원에서 앞을 보면 안산인 고령산이 눈에 보인다. 고령산 아래 있는 보광사는 영조가 숙빈 최씨의 제사를 봉향하는 원찰로 지정하고 어필을 내린 사찰이다.

보광사와 소령원 곳곳에 남아 있는 영조의 흔적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이다.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하녀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의 숨어 있는 눈물을 아들은 알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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