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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추가파병을 위해서 훈련 중인 호주병사들.
ⓒ 윤여문
4월 17일 오전, 호주군 450명은 이라크 전쟁 복구사업을 펼치고 있는 일본자위대 소속 공병대와 민간기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호주북부에 위치한 다윈 항을 떠나 이라크 남부지역 알 무산나(Al Muthanna)로 향했다.

2004년 총선 당시 이라크에 추가병력을 보내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4기 집권에 성공한 바 있는 존 하워드 호주총리가 불과 6개월 만에 자신의 공약을 뒤집은 것. 이 일을 전후로 하워드 총리에 대한 호주 국민들의 반발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

고이즈미의 부탁과 블레어의 압박

4월 15일자 <시드니모닝헤럴드>에 따르면, 하워드 총리는 지난 2월초 "도로건설 및 도시재건을 위한 토목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850명의 일본군인들과 민간 기술자를 보호해 달라"는 고이즈미 총리의 전화를 받고 호주군 추가파병을 결정했다.

그동안 일본인 보호임무를 맡았던 1400명의 네덜란드 병력은 기간이 만료되자 미국과 영국의 주둔연장 요청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철군을 결정했다. 이후 고이즈미 총리는 하워드 총리뿐만 아니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도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AAP 통신의 보도에 의하면 고이즈미 총리는 "호주군이 대신 임무를 맡을 수 있도록 존 하워드 총리를 설득해 달라"고 블레어 총리에 부탁했고, 블레어 총리는 하워드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압박했다.

하워드 총리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공동의 책임이 있기도 하거니와 일본이라는 제 1의 경제파트너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할 수도 없었던 것.

▲ 주 이라크 호주대사관 폭발 현장을 경비 중인 호주 병사.
ⓒ 데일리테리그라프
4월 17일 오전, 호주 북단에 위치한 도시 다윈의 해군기지에서 열린 환송식에 참석한 존 하워드 총리는 <스카이 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전쟁복구와 이라크 치안유지병력을 훈련시키는 임무는 동맹국을 지원하고 지역 친구나라인 일본(friend in the region, Japan)을 돕는 아주 중요한 임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호주가 지속적으로 이라크 복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이라크 국민이 기운을 차리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다"라고 덧붙였다. 하워드 총리는 추가파병 결정 직후 "이라크의 민주화는 중동지역의 평화를 이끄는 견인차가 될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한편 로버트 힐 국방장관은 환송사를 통해 "2006년에 실시될 이라크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알 무산나 지역의 치안유지병력을 훈련시키는 것은 이라크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더없이 중요한 임무"라며 "호주는 이라크에 평화가 정착될 때가지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현재 920명의 병력을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는 호주는 이번에 추가파병 되는 숫자를 포함해 총 1370명의 군인들이 활동하게 됐다. 그동안 호주군인들은 이라크군 3개 대대 및 1개 여단본부 간부들에게 무기사용법 및 지휘관교육, 군사훈련 등을 담당했다.

국민 75%의 반대 속에 추가병력 보내

그러나 하워드 총리는 이 일로 야당의 거센 공격과 함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곤경에 처했다. 4월 19일에 발표된 뉴스폴(news poll)에 의하면, 하워드 총리는 지지율에서 거의 더블스코어로 이겨오던 킴 비즐리 노동당 당수에게 52% 대 48%로 역전당하고 말았다.

이라크 추가파병이 발표된 2월 25일, 채널 9TV가 실시한 여론조사의 결과도 호주국민 75%가 반대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 하워드 총리의 추가파병 결정에 경례하는 부시.
ⓒ TWT 제공
'묻지 마! 친미외교'를 고집하는 하워드 총리의 지나친 친미외교정책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호주의 권위 있는 국제문제연구소인 로위 연구소(Lowy Institute)가 '2005년 호주인의 주장(Australians Speak 2005)'이라는 타이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68%가 "하워드 총리가 지나친 친미외교에 함몰되어 있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인들이 선정한 우호적인 나라의 순위에서도 미국(58%)은 영국(86%), 일본(84%)에 뒤지는 것은 물론 중국(69%)에도 11%나 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서 참혹할 정도의 가혹행위를 당한 참전용사들의 반감도 '반 하워드 정서'의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또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호주군의 명예를 잃은 예비역 장성들도 이라크 전쟁을 제2의 베트남전쟁으로 인식하면서 하워드 총리의 선택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이라크는 제2의 베트남이다

▲ 독일군포로수용소의 호주군포로와 일본군포로수용소의 호주군포로
ⓒ 호주고등학교 참고서
지난 1969-70년 베트남 파병 호주군사령관이었던 앨런 스트레턴 예비역 소장은 채널7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금의 이라크 상황은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재난으로 치닫고 있다"면서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망각하고 추가파병 결정으로 재난을 키우고 있는 하워드 총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호주 고등학교과정 역사참고도서에 나란히 실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 호주병사와 일본군의 포로가 된 호주병사들의 사진 두 장도 호주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하고 있다. 대접받고 있는 듯한 독일군 포로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일본군 포로들의 사진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차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던 W. 서몬스씨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참전한 아홉 개의 전쟁>이라는 책에서 "일본 포로 경비대의 구타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차마 그 당시의 잔혹상을 입에 담을 수 없다. 일본군들은 아주 사소한 분쟁이나 저항도 용납하지 않았다. 전우들 앞에서 돌멩이에 맞아 죽은 포로의 숫자가 부지기수다"라고 증언했다.

그는 또한 "일본군들에겐 제네바포로협정은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환자를 돌보는 것은 고사하고 도무지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의 음식만 주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포로들이 철도부설 공사현장에서 중노동과 매질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재향군인클럽(RSL)의 입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금지'라는 글귀를 써 붙였던 참전용사들 중의 일부는 지금도 "호주인은 일본군을 용서하거나 당시의 죄과를 잊기가 힘들다(difficult for Australians to forgive and forget)"고 말하고 있다.

▲ 호주 참전용사들의 모임
ⓒ 윤여문
파병지역의 이라크 시아파도 호주군 반대

킴 비즐리 노동당 당수와 봅 브라운 녹색당 당수는 이라크 추가파병이 결정된 지난 2월 "하워드 총리가 2004년 선거 당시에 지키지도 못할 공약으로 유권자를 오도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공박하면서 "영국과 일본의 요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당연히 국민적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고 하워드 총리의 성급한 결정을 비판했다.

마크 레이섬 노동당 전 당수는 "2004년 11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할 경우, 이라크에 있는 호주군인 전원을 2004년 크리스마스 전까지 철수시킬 것"이라는 총선공약을 한 바 있다. 그는 다른 선거이슈 때문에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이라크 파병군인 철수공약은 유권자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었다.

이라크 추가파병에 소요되는 국가예산 또한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2004년 중반 이후 경기후퇴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상황에서 연간 3억 호주달러라는 막대한 예산을 이라크에 쏟아붓는 데 대한 반발이다.

한편 시아파가 95% 이상 거주하고 있는 알 무산나 지역의 회교지도자는 19일 호주국영 ABC-TV를 통해 "우리는 자체적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전쟁복구에 나설 능력이 있다"며 "호주군의 주둔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18일부터 중국과 일본을 잇달아 방문하고 있는 존 하워드 총리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중요한 경제파트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치고 있다. 그는 4월 19일 북경에서 일본역사교과서 왜곡으로 불거진 양국의 갈등과 관련, "호주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양국이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라고 조심스레 언급했다.

하지만 하워드 총리는 일본에서 뜨거운 환영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우방도 적국도 없다는 사실을 냉엄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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