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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현지시간) 치러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에 그와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불참한 것과 관련 미국 정가와 언론에서 뒷말이 무성하다.

미국은 교황 장례식에 전례 없이 부시 대통령을 비롯 5명의 공식 조문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전직 미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먼저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약속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에 불참 결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미 카터는 미국 대통령 재임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받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 미국 언론과 정치권 일각에서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진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놓고 워싱턴 정가에서 종종 일어나는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간의 고전적인 암투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보고 있다.

미 언론, 전-현직간 고전적인 정치적 암투

▲ 1979년 10월 6일.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부인 로잘린 여사 그리고 딸 에이미가 요한 바오로 2세를 환영하고 있다.
ⓒ 연합=AP
지미 카터가 백악관에서 작성한 조문 사절단 명단에서 빠진 사실이 알려지자 민주당 측은 카터가 은연중 백악관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것으로 해석했다.

백악관 측은 이 같은 해석에 펄쩍 뛰면서 민주당 측의 음모라고 발끈했다. 맥클랠런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7일 <볼티모어 선>지에서 "우리는 그를 조문단에 합류하도록 요청했고, 그가 조문단의 일원이 되었다면 더 없이 즐거웠을 것이다"며 카터의 의도적 배제 해석을 경계했다.

양측은 일단 백악관이 지미 카터를 공식 조문단의 일원으로 초청했고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장례식에 불참하겠다고 통보한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이 같은 카터의 불참 통보가 진정으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은연중 따돌림을 당한 것인지에 쏠려 있다.

일단 양측 지도부는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논평을 삼가라고 지시를 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의 입씨름이 자칫 엄숙해야 할 교황의 장례식장 앞에서 세속 정치인들이 벌이는 추악한 '조문 논쟁'으로 비쳐질 것을 염려해서 취한 조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 같은 '조문 논쟁'이 벌어진 것일까.

부시 진영과 카터 진영 사이의 이 같은 잡음은 교황이 사망하기 직전에 시작됐다.

앤드류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은 처음 카터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과 함께 장례식에 갈 것인지에 대해 물었고 카터는 곧바로 이를 승낙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다른 전직 대통령 누구도 이를 수락하지 않은 상태였다. 제럴드 포드는 건강이 안 좋아 장기 여행을 할 수 없는 처지였고, 클린턴은 최근 받은 수술에서 회복 중이었으며, 조지 H. 부시는 아예 갈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클린턴이 주치의로부터 가도 좋다는 진단을 받았고, 조지 H. 부시도 뒤늦게야 가겠다고 나섰다.

이때부터 카터의 조문단 불참 이유에 대한 두 가지 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미 언론의 지적이다.

카터 진영 '백악관이 은연중 불참 압력'

첫 번째 설은 앤드류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이 전화를 걸어 "전직 대통령 중 아무도 가겠다는 사람이 없는데 당신은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카터가 "나도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 다시 카드 비서실장이 전화를 걸어 "부시 전 대통령이 가겠다고 하는데 함께 갈 것인지 재고해 보라"고 요청했으나 카터는 이도 거절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짝을 맞춰 가는 조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터 진영에게 이 같은 두 번의 요청 모두는 은연중 '당신이 가는 것이 어색하니 가급적 빠져 달라'는 암시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카드 비서실장이 카터에게 전화를 걸어 "클린턴과 부시 아버지가 갈 예정이고, 당신이 가면 다섯 번째 멤버가 될 것"이라며 "만약 당신이 가지 않는다면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갈 의향을 보였다"고 말했다는 것. 카터의 측근들은 이 또한 공식 조문단이 5명으로 제한되어 있고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으니 좀 빠져달라는 무언의 암시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카터의 대변인 존 무어가 9일 AFP 통신에 "카터는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공식 조문단이 5명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전갈을 받고 이를 철회했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해석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 교황 장례식에 참석한 미 조문단.
ⓒ 백악관 홈페이지
<워싱턴 포스트> 8일자에 따르면, 교황 장례식 조문과 관련하여 카터 진영이 특히 불쾌해 했던 것은 지난 6일 부시와 그의 부인, 부시 전 대통령, 클린턴, 라이스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국의 공식 조문단이 장례식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때였다고 한다. 거기에는 본래 공식 조문단 멤버가 아닌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까지 끼어 있었다. '5명 제한'을 말해 놓고 6명이나 참석한 것이다.

어느 설이 맞든 카터 측에게는 두 가지 설 모두 '왕따 계략'으로 여겨질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맨 처음 카터에게 갈 것인지에 대해 물어 답변을 들었으면 그만인 것을, 재차 전화를 걸어 이리 저리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그래도 갈 것이냐'는 다그침성 질문을 계속한 의도가 무엇이었겠냐는 것.

그러나 카터의 의도적인 조문단 배제설에 대해서 조심스런 반응들도 있다.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카터의 한 측근은 <워싱턴 포스트>에 "카터는 사절단이 강력한 멤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가 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면서 "그는 이번 일이 자신에 대한 냉대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리도 "비서실장은 커터를 조문단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는 없었고, 만약 카터가 가기를 원했다면 가게 되었을 것이다"면서 "백악관 측은 그 같은 억측에 대해 불쾌해 하고 있다"고 전했다.

브레진스키 "백악관, 카터에 원한 갖고 있는 듯"

그러나 정가 관측통들은 그동안 워싱턴 정가에서 양측간에 흘러온 긴장 기류로 보아 이 같은 외피적 해석에 수긍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양측간의 관계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데다가, 그 '뒤끝'에 이어 터져 나온 것이 이번 '조문 논쟁'이라는 것이다.

지미 카터의 자서전을 쓴 더글러스 브링클리는 지난 7일 <볼터모어 선>지에 "백악관은 지미 카터를 조문단에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서 흠집을 내고 있다"면서 "카터는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반전, 반이라크전 지도자이기 때문에, 부시와 라이스는 그와 함께 조문단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을 게 뻔하다"고 말했다.

지미 카터 재임시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도 8일 < UPI 통신>에 "이는 모욕적이고 유치한 짓"이라면서 "그(카터)는 공식 멤버에 당연히 포함되었어야 한다, 카터가 지난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시를 비판한 일 때문에 백악관이 원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누구보다도 백악관 주변의 생리와 의사결정 과정을 잘 알고 있을 그의 말은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지미 카터는 지난해 대선 당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거짓 정보를 바탕으로 일으킨 '엉뚱한 전쟁'이라며 부시에게 맹공격을 퍼부었다.

카터는 지난해 봄 이라크 침공 한 돌을 맞이한 이틀 후인 3월 21일 영국의 <인디펜던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도대체 우리가 이라크에 개입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찾아보자"면서 "그것(이라크전)은 런던과 워싱턴이 거짓 정보와 오판에 기초해 일으킨 전쟁이었다"고 블레어 수상과 부시 대통령을 싸잡아 비난했다.

이후로도 카터는 기회 있을 때 마다 민주당 후보인 존 케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부시의 이라크 전에 대해 비판의 화살을 돌렸는데, 특히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던 7월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카터는 부시의 이라크전의 오류를 상기시키며 "진실은 미국의 우주적 리더십의 기초가 되어왔으나, 이제 우리의 (맹방들과의) 우호 선린관계는 끊임 없는 실수와 오판에 의해 박살났다"면서 "우리는 (미국에) 적대감정을 갖고 있는 세계 속에서 점차 고립되고 있으며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주장, 부시의 아킬레스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미국 언론은 전직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을, 그것도 전시에 이처럼 공격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평했다. 정치 분석가들도 퇴임 후 인기를 누리며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전직 대통령 카터의 부시에 대한 칼날 같은 공격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라크전의 정당성 문제와 취약한 동맹관계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에 직면해 있던 부시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미 언론 판단 보류 속, 카터 측 주장에 무게

부시 진영에서는 이번 일이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원할하지 못해 비롯된 '실수'라고 말하고 있으며, 특히 '카터가 교황의 장례식 참석에 갈 뜻이 없어 거절했을 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카터의 한 측근은 <워싱턴 포스트>에 "일견 이번 일이 (있을 수 있는) 실수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지 실수가 아니다"면서 "백악관이 마치 카터가 교황의 장례식에 관심이 없었다는 듯 표현하고 있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고 털어 놓았다.

특히 정가 관측통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백악관을 방문했을 당시 두 사람의 돈독한 친분 관계가 만인 앞에서 확인된 점을 고려하면 부시 측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으로 보고 있다. 카터는 종종 "그를 만난 것은 정말 가슴에 전율을 느낄만한 것이었다"고 자랑스레 말했을 정도로 교황에 대한 흠모의 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미국의 언론은 현재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지 분별해내기 어려운 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현직을 불문하고 카터만큼 교황과 신념이나 신앙적 유대관계에서 남달랐던 인물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조문단 불참을 자의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데는 주저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koreaweeklyfl.com(코리아 위클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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