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공릉 산수유꽃.
ⓒ 한성희
화사한 봄날 일요일(10일) 공릉에 들어서자마자 노오란 꽃들이 방실거리며 맞는다. 지난 주일만 해도 봉오리가 탱글탱글했던 산수유가 활짝 피어 화사한 봄을 자랑한다.

오전 해설을 끝내고 따스한 봄의 숲 풍경도 볼 겸 카메라를 들고 공릉 숲 탐험에 나섰다. 40만 평이 넘는 공릉 숲을 그 동안 헤매고 다녀도 아직 안 가본 곳이 많고 모르는 길도 있다. 그 동안 순릉 숲을 주로 다녔기에 공릉 뒤에 있는 길도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을 정도로 이 미지의 숲은 넓기만 하다.

▲ 공릉 숲 흰제비꽃.
ⓒ 한성희
다른 문화유산 해설사들이 능 내의 길만 다니는데 혼자 카메라를 들고 이 숲 저 숲 들쑤시고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관리 사무소 사람들은 농담 섞인 걱정을 몇 번했다.

"아무도 없는 숲을 돌아다니다가 누가 채 가면 어쩌려고?"
"오긴 누가 와요? 무서운 건 뱀밖에 없더라."
"뱀이 문제가 아니라 늑대가 문제죠."

▲ 공릉 숲 보라색 제비꽃.
ⓒ 한성희
늑대? 알쏭달쏭한 말로 걱정을 듣기도 했지만 얼굴이 무기인데 뭐가 무섭담. 처음엔 가볍게 흘려들었지만 계속 그런 소리를 듣고도 숲을 헤매는 내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공릉을 오는 재미 중 하나가 숲에 다니는 건데 그 재미를 어찌 포기하나.

요조숙녀인 다른 해설사들은 혼자서는 무서워서 절대 숲을 못 들어간다지만 홀로 숲을 걷는 것이 좋아 계속 걱정을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한다.

공릉 뒤에 있는 이 길을 처음 들어선 것은 지난 3월이었다. 공릉 숲 어딘가에 서낭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서낭당을 한 번 찾아보리라 작정하고 들어간 숲길이었다. 막아놓은 줄을 넘어 숲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마자 뜻밖에 큰 길이 나타났다. 승용차 두 대는 지나갈 수 있는 널찍한 흙 길이 아무도 없는 숲 속에 숨어있었다.

▲ 공릉 숲에 숨어있는 길.
ⓒ 한성희
앞을 봐도 뒤를 돌아봐도 나무 사이로 아무도 없이 홀로 있는 길.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그 길을 걸었다. 이런 보물이 이곳에 숨어 있을 줄이야. 금지구역이라 일반인이 들어오지 못해 한적한 숲길은 마치 영화 속 풍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지난 가을에 이곳에 왔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지금까지 이곳을 몰랐던 것이 갑자기 억울했다.

이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공릉 관리사무소에서 측량을 하고 담장을 둘러치기 전까지는 공릉 인근 마을 주민들이 다니던 길이었다. 지금은 공릉 숲 관리를 하기 위한 차량이 어쩌다가 들어갈 뿐이다.

두어 번 길을 따라 산등성이까지 올라가서 살폈어도 서낭당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었다. 숨어 있다가 발견된 이 길이 너무 좋아 그 뒤에도 공릉에 오면 꼭 이곳을 들어오곤 했다.

이 길에 있는 돌들을 걸어가면서 살핀다. 보라색과 붉은 빛 바탕에 반짝거리는 돌멩이들이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인다. 빨리 걸으면 눈에 띄지 않을 보잘것없는 돌이지만 내 눈에는 마치 보석의 원석처럼 예쁘게 보인다.

죽은 나무에 돋은 운지 버섯이 다시 살아날까 궁금하기도 하고 겨울이 지나자 무너져 내린 흙이 드러난 냇물에 넋을 팔기도 한다. 홀로 걷는 숲길은 눈을 돌릴 때마다 나타나는 것들이 시선을 붙잡아 전혀 심심하지 않다.

▲ 바위를 씻어내리며 졸졸 흐르는 냇물
ⓒ 한성희
길 위에 야생화와 잡초들이 초록빛으로 소복소복 돋아났다. 행여 어린 풀들이 내 발에 짓밟히면 아플까봐 조심조심 풀을 피해서 걷는데 어디선가 시냇물이 맑게 졸졸대며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봄이다! 지난 일요일만 해도 얼음이 남아있었는데 시냇물 소리가 저리 경쾌하게 들리다니.

토요일 내린 비로 길 옆 시내에 제법 물이 흘러간다. 흙이 패이고 나무가 쓰러지고 뿌리가 다 드러난 길을 따라 흐르는 시내는 아무 손길이 거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물길을 구불거리며 따라간다.

바위 위를 경쾌하게 소리치며 흐르는 물소리에 홀려서 들여다보다가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것이 보인다. 30대 초반 정도의 남녀 한 쌍이 길을 걸어 들어오고 있다. 공릉 관람객으로 왔다가 한적한 이 숲길로 들어온 것이리라. 이곳은 금지구역인데 막아놓은 줄을 넘어 들어온 모양이다.

▲ 공릉 숲 진달래.
ⓒ 한성희
순간 잠시 망설였다. 정다운 연인의 숲 속 데이트를 즐기게 그냥 둘까, 말까. 그러나 산불 위험이 많아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고 분명히 줄로 막아놓았음에도 몰래 들어온 관람객을 방치한다면 후에 또다시 들어올 우려가 있다. 요즘 산불 위험이 높은 시기이고 숲이 망가지고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려 출입금지를 하고 있는데 특별히 눈을 감아줄 수는 없는 일.

"이곳은 출입금지 지역인데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두 남녀는 인사를 하더니 되돌아간다. 계속 걸어 들어가면 공릉 경계 지점에서 철망 담장으로 막혀 끝나고 양쪽 산길로 이어진다. 도대체 몇 번을 살펴도 서낭당이 보이지 않으니 어디에 있는 것일까?

▲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서낭당.
ⓒ 한성희
잠시 망설이다가 가보지 않았던 왼쪽 산길을 택해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가파르기도 해서 그 동안 올라가기 부담스러웠던 산길을 오를 때만해도 서낭당이 그리 쉽게 눈에 들어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올라서자마자 돌무더기와 커다란 나무가 보인다. 서낭당이다. 그토록 찾아 헤매다가 이렇게 쉽게 나타난 서낭당을 보자 믿어지지 않았다. 돌무더기 위에 서 있는 저 오랜 연륜이 드러나는 나무는 느티나무일까? 쌓인 돌들이 그리 오래된 돌이 아닌 듯한 걸로 보아 요즘도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모양이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돌을 던졌을까.
ⓒ 한성희
고개를 내려다보니 작은 산길로 이어진 아래 멀리 동네가 보인다. 저 동네 사람들이 한때 이곳을 넘어 다녔을 것이다. 서낭당에서 고개 길을 내려다보자 갑자기 6~70년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흑백사진에서 봤던 서낭당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모습이다. 숲에 숨어 있는 이 서낭당도 그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서낭당은 흑백사진이라야 제격이다.

눈앞에서 흑백사진과 서낭당이 오버랩 하면서 겹친다. 바랜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서낭당이 서 있고 옛날 이곳을 넘어 다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 서낭당이 서 있는 이 산길은 누가 넘어가던 고개길일까.
ⓒ 한성희
고개를 넘어오는 사람들도 눈에 보인다.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오르는 아저씨, 허리에 책보를 두르고 학교 가는 아이들, 함지박을 이고 숨을 고르며 올라오는 여인네. 저 아랫마을 사는 농부는 아침에 지게에 낫을 챙겨 일 하러 가면서 이 고개를 넘어갔을 것이고 어스름한 저녁에 집에 있는 식구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던 것일까. 고개에 올라서서 숨을 돌리며 주워왔던 돌을 서낭당에 던지고 합장 한 번하고 지나갔으리라. 미처 돌을 주워오지 못한 사람은 고개 위에 올라와서 주위를 돌아보며 던질 돌멩이를 찾았을 것이다.

혹은 시집간 딸이 친정에 다니러 오면서 고개에서 쉬어가기도 했으리라. 돌멩이 하나 던지면서 처녀시절 이 고개를 넘던 추억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친정 나들이에 준비한 닭을 싼 보따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보인다.

유리꽈리를 입에 물고 부는 듯한 맑고 고운 새소리에 흑백영화에서 깨어나 다시 서낭당을 올려다본다. 서낭나무는 옆으로 굵은 가지를 뻗은 채 침묵하고 있지만 싹이 돋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나 또한 작은 돌을 주워 흙을 털어 내고 돌무더기 위에 던졌다. 떨어진 돌멩이는 안전하게 돌무더기 속에 자리잡았다.

▲ 길은 말없이 서서 기다린다.
ⓒ 한성희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길에게 저 돌만큼 많은 이야기를 물어보지만 그는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있다. 시간을 타고 흐르는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려도 숨어있는 길은 그곳에서 시간을 붙잡고 침묵하며 기다리고 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