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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일’이란 ‘가정(假定)’은 없다. 그러나 역사의 아쉬움은 종종 ‘만일’이라는 가정을 이야기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충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목숨을 잃어 민주화의 봄을 예고하던 1979년.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자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12·12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과연 어떻게 전개됐을까. 80년 ‘서울의 봄’을 뒤집고 5·18 학살이란 현대사의 비극을 낳았기에 정치연구가들은 ‘12·12 쿠데타’에 만일이란 가정법을 대입하곤 한다.

그러나 이 보다 비극적인 ‘가정’을 들라면 그것은 4·3이 ‘평화로 가느냐, 학살로 가느냐’를 가름짓는 분수령이 됐던 ‘4·28 평화협상’이었을 것이다. 4·28 평화협상은 4·3 발발 직후 군과 무장대 간에 극비리에 진행됐던 평화협상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4·3의 역사적 운명을 가르는 김익렬(1966년 육군중장 예편·88년 작고)과 박진경(대령·1948년 작고)이 등장한다.

김익렬 연대장이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벌이며 미군정의 강경진압에 반대하다 직위 해제된 반면, 그 뒤를 이은 박진경 연대장은 ‘초토화작전’의 불을 당긴 장본인이다. 일본군 출신의 박진경 연대장은 얼마 되지 않아 강경진압에 반대하는 부하에게 암살당한다.

그러나 역사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았다. 강경작전을 펴다 암살당한 박진경에겐 제주충혼묘지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인 경남 남해에도 동상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제주도민을 살리기 위해 초토화작전을 거부하다 직위해제된 김익렬 연대장에 대해서는 제주 그 어디에도 공덕비는 없다.

미군정의 초토화 명령 거부한 ‘평화주의자’ 김익렬 연대장

▲ 김익렬 9연대장
ⓒ 제주의 소리
1921년 경남 하동 출신으로 해방직후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김익렬은 4·3 발발 직전인 1947년 9월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 부연대장(소령)으로 제주에 부임하고 다음해 2월 연대장(중령)으로 승진한다. 4·3은 그가 제주에 온지 7개월 후에 시작된다.

무장대에 의해 도내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면서 경찰지서가 습격당하는 4·3이 발발하자 미군정은 김익렬 연대장에게 즉각적인 토벌작전을 명령한다. 그러나 김익렬은 “극렬분자는 200~300명에 불과한 만큼 화평 귀순 작전을 시도하고,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토벌해도 늦지 않다”며 제주도 군정장관을 설득해 이른 바 ‘先선무 後토벌’이라는 단계적 해법을 채택한다.

그는 제주도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귀순활동을 펼치고 무장대와 비밀협상을 추진해 이른바 ‘4·28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김익렬은 무장대의 은신처인 대정읍 구억초등학교에 운전병만 데리고 들어가 무장대 책임자인 김달삼과 4시간에 걸친 진땀나는 담판을 벌인 끝에 평화협상을 체결하는데 성공한다.

4·3이 발발한 이후 25일만에 군과 무장대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 않기로 극적으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평화협상은 회담 사흘 후인 5월 1일 제주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일단의 청년들이 들어와 12채의 민가를 불태우는 ‘오라리사건’이 발생하면서 깨지고 만다. 오라리 사건은 평화협상을 파기하기 위해 경찰의 후원 아래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자행한 방화였다.

▲ 4·28 평화협상을 깨트린 오라리 방화사건. 미군 정찰기가 공중에서 오라리 마을을 촬영한 모습.
ⓒ 기록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
그러나 미군정은 이같은 김익렬 연대장의 보고를 묵살하고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경찰측의 주장을 수용, 9연대에 초토화 토벌명령을 내린다. 놀라운 사실은 무장대의 소행이었다면 그 누구도 사전에 알 수 없었던 오라리 방화 현장이 미군에 의해 지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입체적으로 촬영이 됐다.

그리고 이 필름은 ‘제주도의 메이데이’로 명명돼 4·3을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폭동으로 조작하는데 이용됐다. 또 김익렬 연대장이 김달삼과 ‘4·28 평화협상’에 합의한 다음날 미 군정장관인 딘 소장이 제주에 극비리에 방문했음이 훗날 밝혀진다.

평화협상 시도하다 미군정과 조병옥에 '공산주의자' 낙인찍혀 해임

▲ 4·28 평화협상 다음 날 제주에 극비방문한 미군정장관 딘 소장
방화사건이 일어난 나흘 후인 5월 5일 제주에서는 ‘화평이냐, 유혈이냐’의 갈림길이 된 ‘5·5 최고수뇌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에는 딘 군정장관을 비롯한 미군수뇌부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 등도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경찰과 조병옥 경무부장은 “4·3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인 만큼 철저하게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김익렬 연대장은 “실제 무장한 인원은 200~300명에 불과하며 폭도가 증가하는 이유는 경찰 때문”이라면서 관련 증거들을 제시한다.

이에 당황한 조병옥은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내몰아 이날 회의는 주먹이 오가는 난장판이 돼 버리고 만다. 그리고 다음날 김익렬은 9연대장에서 전격적으로 해임된다.

김익렬-김달삼 평화협상(4월 28일) → 딘 장군 제주 극비방문(4월 29일) →오라리 방화사건(5월 1일) → 최고수뇌회의(5월 5일) →김익렬 연대장 해임(5월 6일)이 순차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4·3을 평화적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김익렬을 밀어내고 초토화 작전을 강행하려는 미군정의 의지가 담겨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연대장 인사권이 미군정에 있음은 물론이다.

김익렬 연대장은 196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4·3의 진실’이란 회고록을 집필했다. “4·3의 기록들이 너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 데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집필 사유를 밝힌 김익렬 장군은 1988년 가족들에게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알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유고록은 1992년이 돼서야 세상에 공개된다.

김익렬 장군은 유고록에서 딘 장군이 내린 초토화 작전을 거부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익렬 “선량한 양민 살해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어”

“초토작전은 인도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고 전시에도 명령하거나 묵인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처형을 면키 어렵다. 하물며 전후(前後) 평화시에 자기가 군정하는 영토 내의 국민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세상에 알려지면 그 결과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전범재판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는 인도적으로 처형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 5·5 최고수뇌회의 참석차 제주에 온 수뇌부들. 좌측에서 두번째 군정장관 딘 소장,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병옥 경무부장, 맨 오른쪽이 김익렬 연대장.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그는 또 4·3에 대한 소견을 이렇게 정리했다.

“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경찰감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을 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김익렬 연대장이 전격 교체되면서 제주에는 마침내 유혈광풍이 몰아친다. 3만명에 가까운 대량 학살인 ‘초토화 작전’의 막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다.

초토화 작전의 불을 당긴 일본군 출신 박진경 연대장

▲ 제주충혼묘지 입구에 서 있는 박진경 추모비
ⓒ 제주의 소리
제주도 충혼묘지 입구에는 박진경 대령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50대에 세워졌다가 마모 등으로 인해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일동’ 명의로 1985년 다시 세워진 추모비문에는 ‘제주도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라고 적혀 있다.

그의 고향인 경남 남해군 군민공원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비문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다.

▲ 경남 남해군민 공원에 세워진 박진경 동상. 그 앞으로 돌하르방이 보인다.
ⓒ 제주의 소리
‘북괴는 제주도를 공산기지화 설정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을 봉기 양민학살폭동을 감행하자 딘 소장은 공(公, 박진경)을 11연대장으로 보임하였다. 제주도민의 생명보호와 사태수습명을 받은 공(公)은 불과 2개월내 소위 공산반란 해방군 주력을 섬멸한 전공에 감탄한 딘 소장은 대령으로 승진시켰다. 그 후 산발적 폭동공비잔당 소탕 작전 중 불행히도 적의 흉탄에 장렬히 산화하셨다’

그리고 이 동상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현무암의 돌하르방 2기가 세워져 있다.

김익렬 연대장 후임으로 1948년 5월 6일 9연대장(나중에 11연대로 재편성됨)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44일(6월 18일) 만에 그의 부하의 손에 암살당한다.

“폭동사건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민 30만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박진경 연대장은 일제 때 오사카 외국어학교를 나와 영어에 능통해 미군과 잘 통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일제 말기 일본군(소위)으로 제주도에 주둔한 바 있다.

일본군 출신인 그의 취임사는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였다. 그리고 그는 딘 장군의 명을 받아 강경토벌작전을 감행했다.

특히 그는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했으며, 딘 장군은 이를 ‘성공한 작전’으로 평가해 그를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이 당시 무장대의 숫자는 5백여 명에 불과했다. 6월 16일 쓰여진 미군의 비밀보고서는 박진경 대령의 진압작전 결과에 대해 “이 작전에서 약 3000여명이 체포되고 심사를 받았다”라고 적고 있다. 또 6월 12일자 조선일보는 ‘이 기간 동안 경비대와 경찰에 체포된 자가 약 6천여명에 이른다’고 보도할 정도로 그는 무고한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체포하는 등 강경일변도 작전을 펼치다 결국 그의 부하의 손에 암살당한다.

희생자 대부분 일본군 출신 연대장 4명 재임시절 발생

그리고 박진경 대령의 암살은 제주도를 죽음의 공포로 내몰았다. 미군정은 후임 연대장으로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을 임명한다.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은 모두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다. 만주 지역에서 중국군이나 항일 빨치산과 싸웠던 전투 경력을 미군정이 인정해 제주 진압전을 맡긴 것이다.

이에 따라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된 이후 박진경 대령을 시작으로 4·3 진압을 책임진 4명의 연대장은 놀랍게도 일본군 출신으로 채워졌다.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중 대다수가 일본군 출신인 이들이 연대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절에 발생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난 2000년 박진경의 고향인 경남 남해와 제주에서는 ‘양민학살 박진경 동상 철거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의 추모비는 제주와 경남에서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다.

▲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박진경 연대장 고별식. 딘 군정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 제주 주둔 미군고문관 출신 웨홀로스키
정부가 2003년 제주4·3을 공권력에 의해 민간인학살 사건으로 규정하고, 또 이에 근거해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과 제주도민, 4·3유족에게 사과한 지금, 평화협상을 벌이며 자국민을 초토화하라는 미군정의 명령을 거부한 ‘평화주의자’ 김익렬 연대장의 추모비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강경토벌전을 전개했던 박진경은 여전히 창군 영웅으로 추앙받는 게 4·3 발발 57주년의 현실이다. 그리고 제주도민들은 여전히 이 뒤바뀐 역사적 평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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