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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자에 실린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 돼야'(최재원 기자) 기사에 대해 도서출판 '중심'의 윤덕한 대표가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윤 대표는 이 글에서 이용익 선생에 대한 재평가는 다각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윤 대표의 글을 소개하면서 이 글에 대한 새로운 반론도 적극 환영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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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돼야"

▲ 군부대신 시절의 이용익
21일자 <오마이뉴스>에 실린 '고려대 설립자 이용익 선생 재평가 돼야' 내용 가운데 역사 인식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중대한 오류가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이용익의 후손이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중인 고려대가 정작 학교 설립자인 자신의 외고조부를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털어놓는 것은 충분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해가 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용익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이 기사는 이용익을 항일 독립운동가로 치켜세우고 한걸음 더 나아가 "친일파로부터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용익 선생은 친일과 반공으로 이어진 우리 근현대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며 "이용익 선생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될 경우 그를 탄압했던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만행이 부각되는 것을 우려, 선생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1903년은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전이 절정에 달해 양국 사이에 전운이 짙게 감돌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 러시아의 앞잡이로서 러시아의 세력 확장과 이권 획득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 바로 친러파 이용익이었다. 당시 이용익은 황실의 재신을 관리하는 내장원경으로 고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조정의 최고 실세였다.

1903년 4월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와 결탁해 압록강 상류의 삼림 벌채권을 러시아에 넘겨준 인물도 다름 아닌 이용익이었다. 이것은 조선 말기 전설적인 이권이었던 운산금광 채굴권에 못지않은 이권이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벌채한 목재의 저장소로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 일대 토지도 일부 러시아에 매각하기로 약속했다.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벌채업과 그 종업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군대를 동원해 용암포를 불법 점령하고 용암포에 포대를 설치하는가 하면, 심지어 그 명칭마저 니콜라스로 고쳐 부르기까지 했다.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과 군 요새화는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 구실 가운데 하나였다.

1895년 3월 이른바 '3국간섭'을 주도해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저지시킨 이후 러시아가 청국과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며 장기적으로 조선을 병합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바보가 아니면 누구나 눈치 채고 있었다. 이용익은 그때 이래 철저한 친러배일파로서 바로 러시아의 이와 같은 대조선 정책의 현지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함경북도 명천의 무식하고 미천한 보부상 출신 이용익이 이처럼 격에 맞지 않은 출세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순전히 그의 빠른 발걸음 덕분이었다.

임오군란 때 대궐을 빠져나와 충주의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비(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됨)는 자신의 친정 조카이자 척족정권의 수령격이던 민영익과 은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청국 군대를 불러들여 대원군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과 장호원 사이의 왕복 4백리 길을 이용익이 빠른 발걸음으로 하루 만에 오가며 그 편지 심부름을 도맡아 한 것이다.

그는 민비가 환궁한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해 민비가 죽은 후에도 고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대신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7년 동안 서울주재 미국공사를 지낸 알렌은 1884년 그가 처음 이용익을 만났을 때 이용익은 주인인 민영익의 집 마루를 청소하는 비천한 인물이었다고 자신의 일기에 적고 있다.

천민 출신 이용익에게 민비는 출세의 은인이자 구세주였다. 그의 친러배일적인 성향은 그를 출세시켜준 민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날 <오마이뉴스> 기사는 이용익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후손이라고 했으나, 이용익 생전에는 전혀 듣지 못한 얘기로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하다.

물론 이용익이 러일전쟁 개전 직후 일종의 공수동맹인 한일의정서 조인에 적극 반대하다 일본에 끌려가 일본의 선진 문물을 강제로 두루 돌아보고, 귀국해서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것이나, 을사조약 직전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리에 출국해 프랑스와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다 끝내 타국에서 숨을 거둔 것은 모두 애국적인 행동으로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세에 대해 자주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느 친일파 못지 않게 러시아에 굴종하며 러시아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더욱이 그는 무식해서 세계정세에 무지했고, 극단적으로 수구적이었으며, 부패분자로 지탄받기까지 한 인물이다.

그가 친러배일에 앞장선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도 아니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은인인 민비와 왕실에 대한 맹목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제에 반대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애국지사 대접을 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만고의 매국노로 지탄받는 이완용의 역할은 누가 했을까?

덧붙이는 글 | * 윤덕한 기자는 80년 경향신문 해직기자 출신으로 88년 경향신문에 복직, 정치2부장, 북한부장, 기획취재부장 등을 지냈다. 95년 경향신문을 퇴사,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도서출판 '중심'을 설립해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 이완용 평전>, <소설 재벌신문>, 논문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에 대한 국내 언론 보도태도와 그것이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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