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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원이강릉은 언덕 양쪽에 왕과 왕비가 있어 두 곳을 오르내려야 한다. 동원이강릉인 예종의 창릉에도 두 능상이 두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 한성희
서오릉은 재실 옆에 있는 숙종의 명릉을 비롯해 입구를 들어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숙종 비 인경왕후 익릉, 의경세자와 인수대비의 경릉, 영조 비 정성황후 홍릉, 맨 마지막으로 예종의 창릉을 차례로 답사할 수 있다. 또 수경원(영조후궁 선희궁 영빈 이씨)과 순창원(명종의 순회세자) 대빈묘(장희빈 묘)도 가는 길목에 있어서 들러 볼 수 있다.

55만평에 이르는 경기 고양시 서오릉의 가장 먼 곳에 있는 창릉까지 답사하려면 오전부터 꼬박 저녁까지 부지런히 돌지 않으면 하루를 가지고는 힘들다. 제대로 답사하려면 보통 이틀 정도는 잡아야 한다. 특히 겨울철 답사는 해가 짧아서 여름보다 2시간 정도 손해를 본다.

▲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가 13세에 죽어 묻힌 순창원.
ⓒ 한성희
서오릉은 다섯 능과 2원 1묘가 있어, 동구릉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왕릉군이 한 곳에 몰려 있기 때문에 왕릉 답사지로는 안성맞춤이다. 대신 이렇게 왕릉이 많은 곳은 능상이 있는 강을 계속 오르내려야 하고 석물과 정자각과 위치, 역사 등을 살피며 다녀야 하기 때문에 우선 든든히 먹고 시간을 넉넉하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다.

왕릉 숯불갈비는 산릉제례에서 나온 요리

오전 11시쯤 친구와 서오릉에 도착해 시간을 절약할 겸 일찌감치 점심을 먹고 부지런히 답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갔다. 왕릉 근처가 다 그렇듯이 이곳도 숯불갈비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도대체 유적지인 능 근처마다 왜 갈비집이 저렇게 많은 거지?”

설렁탕을 시키고 나자 친구가 못 마땅하다는 듯 내뱉었다.

“그건 말이지. 왕릉의 역사와 관계있는 거야.”
“왕릉과 갈비가 무슨 관계?”

“유명한 갈비집을 보면 상호들이 비슷하잖아. 태릉갈비, 홍릉갈비 등이 다 왕릉 이름이 붙었잖아.”
“그렇지.”

“조선시대는 농경사회라서 소를 중요시 여겼고 국가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함부로 소를 잡을 수도 없었고 백성들이 평소에 고기 맛을 보기가 어려웠지. 그렇지만 왕릉은 제례를 위해 소를 자유롭게 잡을 수 있었고 고기 맛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었어. 고기는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고 왕릉 제사 덕분에 능 근처에서 소갈비 요리가 발달됐고 지금까지 이어진 거라구.”

그래도 친구는 못마땅한 듯했다. 죽은 사람을 위한 제사냐 산 사람을 위한 제사냐를 왕릉 갈비 유래에서 생각해보니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요리 중 하나인 왕릉 숯불갈비가 산릉제례에서 나왔으니 이것도 왕릉 덕분이긴 하다.

“홍릉 근처에서 홍릉갈비가 나온 거구 태릉 근처에서 태릉갈비, 수원 화성 융건릉에서 그 유명한 수원갈비가 탄생된 거야. 산릉제례를 준비하는 요리사들이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 왕실 요리법이 흘러나오게 된 게 쇠고기 숯불갈비 요리로 왕릉근처에서 자리 잡게 된 거지.”

“그렇다고 해도 유적지에 갈비집이 너무 많아. 하긴 이 근처 갈비들이 맛이 좋긴 하지만.”

“왕릉 근처 갈비집들이 맛이 좋으니까 지금부터는 부지런히 답사하고 나면 배고플 테니 이따가 갈비 먹어볼까? 능에 들어가면 먹을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일부러 이른 점심을 먹은 판인데, 숯불갈비를 구워먹는 것은 시간도 많이 걸려 처음부터 먹을 계획이 없었다. 더구나 이처럼 이른 시간에는 갈비 뜯을 식욕도 나지 않고 위가 부담스러워 제 아무리 맛있는 갈비가 앞에 있다 해도 먹을 생각이 없긴 하다. 비워진 설렁탕 그릇을 보면서 친구를 재촉해 일어섰다.

식당을 나와 앞에 있는 재실 뒤의 관리사무소로 비공개 능 출입과 서오릉 취재 안내를 받기 위해 걸어가면서 주위를 돌아보려니까 왕릉갈비 간판이 또 보여 웃음이 나왔다. 왕릉과 왕릉숯불갈비는 필연적인 인연으로 공존하는 역사가 있는 것이니 앞으로도 왕릉 근처에서 갈비집들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창릉과 홍릉, 명릉은 비공개 왕릉이었지만 창릉과 홍릉은 작년부터 산책로를 개방하면서 5월에서 10월까지는 공개한다. 동절기부터는 산불 예방을 위해 다시 문을 닫아 비공개 능이 된다. 그동안 비공개였던 숙종의 명릉도 이번 5월부터 일반에게 공개를 하기 위해 진입로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올 5월부터는 서오릉은 전부 공개능이 되니 비공개 능 답사를 위해 관리 사무소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어 왕릉답사가 수월해진다. 공개 능일지라도 사초지에 올라가는 일을 금지해 석물답사를 하려면 허락을 받아야하지만 앞으로 개방할 것을 고려 중이라 하니 왕릉답사가 한층 편해질 것을 기대해볼 만하다.

정치의 희생양 희빈 장씨가 묻힌 대빈묘

동절기라 비공개 중인 창릉과 홍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아래 장희빈의 묘인 대빈묘가 있다. 사극이나 영화의 단골 소재인 장희빈의 묘는 작고 초라하다. 장희빈 묘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도했다는 것이 발각돼 41세에 숙종에 의해 사사돼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묻혔던 희빈 장씨(1662-1701)의 일생은 하도 유명해서 오히려 식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희빈과 인현왕후에 대해서는 장희빈이 악독한 여자고 인현왕후 민씨가 어진 여자라는 일방적인 잣대로 평가할 일은 아니다.

▲ 장희빈의 대빈묘. 묘 뒤로 나무가 솟아난 바위가 보인다.
ⓒ 한성희
서인과 남인의 치열했던 당시의 당파싸움과 그들을 이용해 왕권을 다진 숙종의 노련한 정책을 잠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조선 초기 막강했던 왕권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자 1/10 이하로 추락하고 상대적으로 신권이 높아진 시기다. 오죽하면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우암 송시열의 권력이 왕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할까. 이런 시기에 왕위에 오른 숙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신권을 누르고 제거하는 데 자신의 여인들을 이용했고 그 결과 막강한 왕권을 누릴 수 있었다.

권력을 잡고 전횡하는 서인을 제거하려 벼르던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원자 책봉을 왕비가 젊다며 서인이 반대하자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1689년 정월에 일어난 이 환국에서 서인들은 참혹한 형벌과 함께 파직되고 유배당한다.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유배지에서 사사당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인현왕후 민비는 서인계열이었고 장희빈은 남인계열이었다.

숙종은 그해 5월 서인 계열이었던 민비마저 폐위시켜버리고 1690년 10월 장희빈이 왕비자리에 오른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은 몰락한다. 무수리 최씨가 숙종의 승은을 입자 정권을 다시 잡을 기회를 엿보던 서인과 폐위되어 사가에 있던 민비는 막대한 정치자금을 모아들여 숙빈 최씨를 포섭하고 서서히 일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1694년 연잉군(영조)이 탄생하자 서인은 민비 복위운동을 본격적으로 꾀하다가 남인에게 발각돼 3월 말에 남인과 서인이 맞고변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숙종은 4월 1일 민비 복위운동을 하던 서인들을 옥에 가두고 옥사를 벌인 남인의 영수 우의정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며 남인을 제거해버린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으로 민비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고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기사환국과 갑술환국, 이 두 차례의 정권교체 명분에 조선왕실 여인들이 등장했고 숙종의 노련한 정치책략에 이용된 것이다.

1701년 인현왕후 민비가 죽자, 장희빈이 다시 복위될 것을 걱정하며 이 참에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서인은 숙빈 최씨로 하여금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게 저주했다는 밀고를 하게 한다.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 민비를 저주했고 민비가 병중일 때 문병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남인은 몰락하고 만다.

서인들이 편찬한 숙종실록에서조차 민비가 질투로 장희빈의 종아리를 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인현왕후는 착하고 현숙한 여자만은 아니었다. 서인이 편찬한 실록이 과연 장희빈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록을 했을까, 하는 부분은 후세의 사학자들도 의문을 갖고 있다.

숙종이 실제로 민비를 그리워해서 폐위 시킨 것을 후회했는지 장희빈을 내쳐 강해지는 신권을 교묘히 제거한 고도의 정치 계략인지는 모를 일이다. 알다시피 실록이란 왕의 사후에 편집되고 생전에 사관이 기록하는 동안이나 편찬 후에나 왕은 절대 볼 수 없으니 말이다.

▲ 장희빈 묘 뒤의 바위 틈에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기묘하게 자라고 있다.
ⓒ 한성희
왕의 주변 여인들은 정치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어쨌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장희빈 역시 조선 역사에서 손꼽는 여인이었음은 사실이다.

대빈묘 위에 있는 바위틈에 참나무와 소나무가 묘하게 자라고 있어 눈길을 끈다. 기묘한 나무와 바위의 생김새로 인해 매스컴에도 오르내린 이 바위를 두고 장희빈의 악한 기운을 누르려고 일부러 옮겼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떠돌고 있어 쓴 웃음을 짓게 한다.

▲ 대빈 묘 뒤의 바위와 나무 전경.
ⓒ 한성희
300여년 전에 죽은 장희빈의 대빈묘가 경기 광주시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1969년인데도 이런 헛소문이 돌고 있다. 장희빈을 독살맞고 악랄한 여인으로, 인현왕후를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청순가련형의 피해자로 설정해 시청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드라마를 만들어 주야장창 우려먹던 사극의 영향이 아닐까 한다.

희빈 장씨의 묘는 경종2년(1722) 아들 경종에 의해 옥산부대빈(玉山府大賓)으로 추존돼 대빈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대빈묘는 사후 269년 후인 1969년 6월 서오릉 경내로 옮겨왔다.

무슨 연유로 이곳으로 옮겨왔을까 의문이 생겼다. 신촌에 있던 수경원은 1920년대에 연희전문학교가 들어서면서 학교를 확장해 서오릉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대빈묘는 60년대 말에 옮겨왔으니 원래 장희빈 묘가 있던 곳에 무슨 시설이나 건물이 들어서는 바람에 천묘한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었다.

광주시문화원에 전화를 걸어 문의해봤다. 별다른 이유가 없이 당시 왕실묘나 후궁묘들을 옮길 때 천묘한 것이라는 문화원의 답변이다. 대빈묘가 있던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는 사유지라 하지만 대빈묘 터는 서오릉으로 옮긴 후 현재 텅 빈 채로 남아있고 주변에 아름드리 전나무 등이 울창하게 그대로 있다 한다.

숙종과 왕비 3명, 한때 왕비였던 장희빈은 모두 이곳 서오릉에서 잠들어 있다. 서오릉 지도를 보면 동쪽 끝에 숙종의 명릉이 있고 서쪽 끝에 대빈묘가 있다. 사약을 내려 한때 사랑했던 여인을 죽였던 숙종과 죽는 순간 악에 바쳐 아들 경종을 무정자증으로 만든 장희빈이 수백 년이 지난 후에 이렇게 서오릉에서 만나 동쪽과 서쪽에 묻혀 있는 것은 어떤 숙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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