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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니스 칵테일밖에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 너머까지 봐야 해요. 그 과일이 열린 나무, 그 나무가 맞서야 했던 폭풍우, 그 열매를 딴 손,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는 선박, 그 열매가 알코올과 접촉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색깔을 보죠. 언젠가 내가 그럴 수 있다면, 나는 그 모든 걸 화폭에 담을 거예요. 하지만 그 그림을 보는 당신은 그저 흔하디흔한 아니스 칵테일 잔을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겠죠…."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 장평소설 <11분>에 나오는 이 구절을 언젠가 다른 책을 읽는 가운데 거기서 발견했을 때, 꼭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널리 알려진 <연금술사>를 얼마 전에 비로소 만났고, 작가에게 반해버린 나는 이 저자를 더 깊이 알고 싶어서 그의 소설 목록을 살펴보다가 <11분>을 먼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짧은 제목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인지 궁금했고 작가와 작가가 낳은 소설을 탐험하고 싶었다.

먼저 작가 파울로 코엘료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자. 그는 1947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출생했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25세 때 연극 연출가 겸 TV극작가로 활동을 시작, 대중음악의 작곡, 작사가로도 명성을 떨쳤다한다.

1987년 자아의 연금술을 신비롭게 그려낸 <연금술사>의 대성공으로 단숨에 세계적 작가의 자리에 올랐다. 클린턴 대통령이 휴가 중에 가장 하고 싶은 일로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쌓아놓고 원없이 읽는 것'을 꼽았을 만큼 광범위한 독자층을 이루고 있다. 17세 때부터 세 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는 산티아고 순례여행을 계기로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 <연금술사>가 한 남자가 자아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한다면, <11분>은 한 여자의 성장, 그리고 자기발견과 삶을 다루고 있다.

'11분'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11분'이란 '성행위의 평균 지속시간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소설을 빌어 말하고 있다.

"11분. 겨우 11분을 축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 24시간 중 그 11분 때문에 결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의 울음을 참아내고, 늦게 귀가하게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작가 노트'에서 그는 말하기를 '1970년대에, 작가 어빙 윌리스'가 미국의 검열제도에 관한 글에서 자신이 섹스에 관한 소설을 출판하려다가 정부로부터 당한 법적 기만을 폭로한 바 있는데, 그 소설이 바로 <7분>이라고 했다.

성교의 평균 지속시간을 의미하는 윌리스의 기준이 지나치게 인색하다고 생각되어 시간을 조금 연장해서 성을 진지하게 다루는 글을 언젠가 써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한 브라질 출신 창녀를 만나게 된 계기로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 한다.

소설은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로 시작된다. 브라질의 한 시골 도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소설의 길을 안내한다. 열 한 살 때 이웃 소년을 여느 사춘기를 맞은 소녀와 다름없이 짝사랑하며 가슴을 태우는데 소년이 건넨 말을 마음에도 없이 외면해 버린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한마디 얘기도 나눠 보지도 못한 소년은 먼 곳으로 전학을 가버린다.

그 때 마리아는 '멀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사는 도시가 깨알만큼 작다는 것, 어떤 것을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후, 한 남자를 만나지만 자기의 친한 친구에게 그 남자를 빼앗긴 후 사랑은 고통만 줄 뿐이라고 여기게 된다.

어느날, 리우데자네이루로 짧은 여행을 가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또 다른 운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외국 남자로부터 연예인으로 성공하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고 스위스로 떠난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려한 연예인이 아니라 몸파는 일, 그 이름은 바로 '창녀'였다.

잃을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새로운 세계에서 휘청거리면서도 자기의 삶과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가운데서 '랄프 하르트'라는 화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통해 성과 사랑의 진정성에 눈을 떠간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혐오스러움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내 영혼을 파괴하고, 나 자신과의 접촉을 방해하고, 아픔이 하나의 보상이라고, 돈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고 정당화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정상적인 일로 내 인생의 한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여길 수가 없다.… 난 사랑을 할 필요가 있다. 오로지 사랑만이 필요하다. 잘못 살 사치를 부리기에는 삶은 너무 짧거나 너무 길다."

마리아는 고향 브라질로 돌아가 농장경영을 해볼 꿈을 안고, 1년 동안 몸을 팔며 살았던 제네바를 떠나기로 한다. 농장을 살 돈이 있고 창창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결국, 사랑하는 랄프 하르트와 결혼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산티아고가 불굴의 의지로 모든 역경을 극복하며 사람들이 바보짓이라 생각하고 꿈을 꿈으로만 묻어두었던 보물을 찾았던 것처럼, 소설 <11분>을 통해 역시 현실에만 안주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또 한번 종이 울리게 한다.

"난 좀더 기다릴 수 있어. 오늘은 돈을 벌어야 하니까. 당장 내 꿈을 실현할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인 채 직장으로, 학교로, 직업 소개소로, 베른 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 역시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시간을 파는 것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을 견뎌내는 것,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결코 도래하지 않는 미래의 이름으로 자신의 귀중한 육체와 영혼을 내놓는 것,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아직 충분히 모으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조금만 더 기다리는 것, 기다리고, 조금 더 벌고, 욕망의 실현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 당장은 몹시 바쁘니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실이다. 현실에 발목 잡힌 채 기다리고 기다리며 시간을 팔며 살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그리고 보이는 것만큼만 본다. 똑같은 책, 똑같은 영화, 똑 같은 사물을 보아도 거기서 똑같은 의미를 보지 않는다. 각기 다른 것을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다. 자신이 바라보고자 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 <11분>은 성행위의 평균적 지속시간을 의미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성의 성스러움에 대해, 그것을 끌어내기 위해 썼는지는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저자는 젊은 시절, 그가 많은 혼돈과 아픔을 느꼈고 길 찾기를 했을 그의 소설 속에는 그 흔적과 고뇌들이 묻어난다. 작가의 정신이 묻어난다. 나는 그의 소설에서 한 인간의 고통과 시련을 통한 자기발견, 자기 연금술을 발견한다.

무엇보다도 '연금술사'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11분>에서도 한 인간의 성숙, 자기발견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결국은 역경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배우고 깨달아가는 과정들을 그리고 있다.

"...나는 두 여자다. 한 여자는 기쁨, 정열, 삶이 그녀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모험들을 맛보길 갈망하고, 다른 한 여자는 진부한 일상, 가족적인 삶, 계획하고 완수 할 수 있는 자잘한 행위들의 노예가 되기를 갈망한다. 나는 한 몸 속에 살면서 서로 싸우는 주부이자 창녀이다…."

이것은 마리아이면서도 바로 나다. 이율배반적인 나, 그리고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얼마나 혼돈을 경험하며 사는가. 꿈, 미래로 나아가길 원하면서도 언제나 현실에 덜미를 잡히는 나… 그리고 모두들….

그런데, 저자는 마리아의 입술을 빌어 또 이렇게 말한다.

"...인간 존재는 앎만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땅을 경작하고, 비를 기다리고, 밀을 심고, 곡식을 거둬들이고, 밀가루를 반죽해 빵을 만들기 위해서도 태어난다…."

저자는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의 입을 빌어 했던 한 마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 것…."

삶의 조화와 절제,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두개의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하면서 하나에 대한 경의가 부족할 때 한 우주는 다른 우주를 파괴한다고 쓰고 있다. 결국, 파울로 코엘료는 희망, 사랑을 끌어내는 작가이다. 그의 소설에는 지문이 묻어난다. 사랑의 작가 영감 있는 작가이다.

그는 또한 그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가 보물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사람을 통해 배우며 깨달으며 도달했듯이, 우리는 사람을 통해, 그리고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도달함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본문 가운데 있는 글을 인용하며 끝을 맺을까 한다.

"인간 존재의 목표는 절대적인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고, 사랑은 타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있다. 그것을 일깨우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우리 옆에 우리의 감정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덧붙이는 글 | 제목:<11분>
저자: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이상해 옮김/2004.5.11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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