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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보진영과 학계에서는 한국자본주의의 개혁모델을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7년이 지나면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로 상징되는 한국경제구조에 대한 비판도 높아지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꾸준히 제기되는 것이 이른바 '스웨덴 모델'이다.

<오마이뉴스>는 국제사무직노조연맹 한국협의회(UNI KLC)와 스웨덴 올로프팔메센터의 도움으로 지난 10월말부터 일주일여동안 국내 진보진영 학자 등과 함께 스웨덴을 직접 다녀왔다. 국내 전문가들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 대안적 모델로서의 스웨덴과 한국현실을 집중 조명하는 기획을 선보인다... 편집자 주


▲ 스톡홀름 중심가에 있는 스웨덴 노총(L0) 중앙본부 건물. 스웨덴 시내 곳곳에는 금속, 공공부문 노총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 오마이뉴스 김종철

"글쎄요… 발렌베리 그룹이 삼성의 미래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지난 10월 27일 오전 스웨덴 스톡홀름 북단 어퍼랜드 IT 빌리지 3층 회의실. 삼성전자의 북유럽 영업 등을 총괄하는 김의탁 법인장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는 <오마이뉴스> 취재진의 갑작스런 방문 요청에 고민했다면서,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의 지배구조가 삼성의 모델이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말끝을 흐렸다.

대신 그는 "그룹 지배구조에 대해 뭐라 말할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회사에) 입사한 이후 돌이켜보면 그 어느때보다 기업 경영이 매우 투명해졌고 경쟁력도 크게 높아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이건희 회장 등 그룹 고위 임원들이 발렌베리 그룹 등을 방문한 것에 대해서도 "회장 등이 스웨덴에 머물면서 발렌베리 그룹의 지주회사를 방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지 못한다"면서 "발렌베리 이외 스웨덴의 의료, 복지시설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시설들을 둘러본 것으로 알고 있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꺼렸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큰아들인 재용(삼성전자 상무)씨,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등은 지난해 7월 일주일여동안 스웨덴을 직접 방문했다. 체코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총회 참석을 마치고 동유럽 국가 등의 생산기지를 방문하기 전에 스웨덴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6대째 경영의 발렌베리를 연구중인 삼성

▲ 김의탁 스웨덴 삼성전자 법인장. 그는 사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외국기업에 대한 차별 등은 경험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 오마이뉴스 김종철
이 회장 일행은 김 법인장의 말대로 발렌베리 가문과 그룹 지주회사 등을 방문했다. 사회복지 시설 등도 둘러봤다. 삼성에서는 오래전부터 북유럽 강소국 모델에 관심을 보여온 이 회장이 직접 현지를 둘러보는 차원이라고 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발렌베리 가(家)는 스웨덴 최대의 재벌가문이다. 6대째 경영권을 이어오면서 150년동안 그룹을 지켜온 곳으로 국내에도 익히 알려진 곳이다. 그동안 '3세 경영 체제로의 연착륙'을 고민해온 삼성 이씨 일가 입장에선 발렌베리의 모델이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이 회장 일행이 스웨덴을 떠난 후, 삼성그룹의 싱크탱크격인 경제연구소 연구원이 스웨덴에 파견됐다. 그는 1년여에 걸쳐 스웨덴 문화와 기업 지배구조 등 전반을 연구하고 올해 돌아왔다. 삼성 내부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들 지배구조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됐고, 또 진행되고 있다.

지금부터 150년 전에 회사를 만들어 5세대 후계자가 그룹을 이어오고 있는 스웨덴 발렌베리(Wallenberg)가문. 좌파정당인 사회민주당이 60년 넘게 정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이들 재벌가문은 자신의 경영권을 충실히 세습해왔다.

그렇다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반 재벌' 또는 '반 발렌베리' 정서도 눈에 거의 띄지 않았다. 실제로 지난 10월 26일 저녁 스톡홀름 구시가지 광장서 만난 대부분의 시민들은 재벌가의 경영권보다는 일자리 등 고용과 복지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얀서프(44. 철강노동자)씨는 "경영권 세습보다는 회사를 어떻게 잘 운영해서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가가 중요하다"면서 "최근 기업들의 수익도 전보다 못해, 고용문제와 이에 따른 복지 등의 문제에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발렌베리는 우리에게도 핸드폰 등으로 낯익은 에릭슨(정보통신)을 비롯, 사브(자동차·비행기 엔진), 스카니아(트럭), 일렉트룩스(가전), ABB(전기·기계), SEB(금융) 등 스웨덴 최대기업 12개를 가지고 있다.

스웨덴 전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무려 50%를 이들 발렌베리 그룹 계열사들이 차지할 정도로 경제적 비중도 크다. 삼성그룹의 1년 매출 규모가 우리나라 1년 예산에 맞먹고, 한때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40% 이상을 차지했던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스웨덴 사민당의 역할이다. 1920년 사민당이 집권한 이후에도 30년대 중반까지 스웨덴의 노사관계는 격렬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이를 종식시킨 것이 1938년 이른바 '잘쯔요바덴 협약'이라고 불리는 스웨덴 노사대타협이다.

노동과 자본의 대타협, 그리고 재벌의 사회적 책임

▲ 스웨덴에는 삼성 등 국내기업이외 일본, 독일 등 유수의 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사진은 스톡홀름 북쪽의 외국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IT빌딩.
ⓒ 오마이뉴스 김종철
'연대임금'과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란?

연대임금정책(the solidaristic wage policy)은 스웨덴의 생산직 노동자 중앙 노동조합인 LO가 추진해온 정책이다. 산업이나 기업의 수익성 수준에 관계없이 동일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 임금이 지급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정책이다.

또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사민당 정부가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실시한 노동시장 정책이다. 직업훈련과 공공근로와 같은 한시적 일자리를 만드는 것과 노동시장의 정보 개선, 산업간ㆍ지역간 노동자 이동 지원 등을 주 내용으로 한다.
당시 대타협의 주역은 스웨덴 생산직 노동자 중앙 노동조합인 LO(한국의 노총)와 전국적 수준의 고용주 단체인 SAF(한국의 '경총')였다. 협약은 LO와 SAF가 노조의 노동권과 기업의 경영권을 서로 인정하고, 국가 개입없이 노동과 자본쪽이 협상을 통해 자율적으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노동과 자본의 '계급 대타협'인 셈이다.

이같은 대타협에 의한 노사안정을 기반으로 사민당과 LO는 거대 기업 위주의 성장주의적 경제정책을 펴나갔다. 사민당은 기업들에게 법인세를 깎아주었고, 노동자 교육 확대 등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펼쳤다.

LO는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격차를 줄이는 연대임금정책을 추진했다. 게다가 스웨덴 재벌들은 자신들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 피라미드식 그룹 지배구조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이미 스웨덴 산업화가 대기업 중심으로 이뤄졌고, 사민당을 지탱해온 노동조합 역시 대기업 노조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따라서 대기업 중심의 성장은 LO나 사민당쪽 입장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대신 사민당 정부는 이들 기업들에게 소득 대비 최고 85%에 달하는 세계최고 수준의 누진소득세를 납부하도록 하면서, 노동자와 빈곤층의 사회보장비용을 내도록 했다. 결국 자본가 계급에게는 경제성장과 부의 창출을 계속하도록 허용해주고, 다시 그들로부터 적극적인 부의 재분배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같은 재벌과 좌파정권의 공생으로, '사회복지와 경제성장',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승일 전 국민대 교수는 "부유층과 자본가 계급에 대한 높은 개인소득세를 부과하고, 그 대가로 대기업 그룹의 유지와 성장을 격려한 예는 핀란드에도 있다"면서 "이것이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복지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스웨덴과 핀란드의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발렌베리는 삼성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실제 발렌베리는 삼성의 모델로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발렌베리가 6대째 경영권을 지킬수 있었던 것은 차등의결권 제도 때문이다. 이 제도는 최근 외국자본에 대한 국내 기업에 대한 무차별적인 기업사냥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차등의결권제도는 기업이 A주식과 B주식으로 나눠 발행하면서, A주식에는 1주에 10표에서 많게는 1000표까지 의결권을 가지는데 반해, B주식은 1주에 1표밖에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발렌베리 그룹의 지주회사인 인베스트는 핵심자회사인 에릭슨의 지분 5%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38%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일반주(B주식)보다 의결권이 1000배나 많은 차등의결권 주식(A주식)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스톡홀름 북부에 위치한 삼성전자 북유럽 현지영업 법인의 전시장 내부. 스웨덴 법인에서는 북유럽 4개국의 영업을 총괄하며 85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종철
발렌베리 가족들은 에릭슨 뿐 아니라 일렉트룩스 등 주요계열사의 A주식을 거의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다. 발렌베리 이외 스웨덴 대부분 재벌들이 이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우리나라에도 차등의결권제도 있었다면 재벌들이 계열사를 움직여 출자 등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편법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같은 차등의결권 제도가 당장 국내 재벌에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미 주식시장에 상장된 회사가 차등의결권 주식을 발행한다면 기존 주주들의 반발이 뻔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주식의 60% 가까이를 외국인이 가지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이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1주1표'를 바탕으로 하는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따르고 있다.

또 발렌베리그룹은 인베스트AB라는 지주회사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LG그룹이 지주회사체제다. 하지만 삼성이 그룹 지배구조를 지주회사 형태로 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현행법상 지주회사로 가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삼성은 발렌베리 등 스웨덴식 지배구조에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일부에선 '발렌베리는 삼성의 미래'라는 이야기가 여전히 나돈다. 하지만 스웨덴의 역사적, 자연적, 사회적 환경을 볼때 발렌베리 그룹을 삼성과 일치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높다. 현실적으로 지주회사 형식의 발렌베리 모델을 삼성이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렵다는 의견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발렌베리 가문과 스웨덴식 대기업 정책은 국내 재벌 지배구조 논란의 핵심인 삼성 이씨일가와 재벌정책의 논쟁거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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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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