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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살다보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내면 깊은 곳에 꼭꼭 숨어 똬리를 틀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그런 종류의 '아픈 기억'들이다.

70년대, 80년대 군부권위주의 정권 치하의 암울한 시대에 민주주의라든가 통일이라든가 혹은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었던 사람들, 치열한 역사의 부딪힘을 피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치기 어린 자부심과 더불어 어두운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 기억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질 것이다.

하나는 군부권위주의 정권의 폭압기구에 의해 당한 육체적 정신적 폭력에 대한 기억이다. 당시 학내시위를 주동하거나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체포된 사람들은 갖가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했다.

특별히 성고문이나 전기고문 물고문 등 추악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고통의 흔적은 잔혹했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이 자행한 육체적 정신적 폭력은 때로 한 사람의 민주투사를 키워내는 과정이 되기도 했다. 파도가 높으면 그 파도를 넘어서려는 욕망 또한 강해지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가 아니던가.

깊은 상처를 준 것은 두 번째 갈래의 고통이었는데 그것은 함께 일하던 동료에 대한 아픈 기억들이다. 동료에 대한 아픈 기억도 여러 가지다.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부상당하거나 희생당한 동료 및 선배들에 대한 기억은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고 갈 얼굴들과 함께 가슴 깊숙한 곳에 묻혀 있다. 너무 아프지만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고통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기억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 부끄러움과 추악함 같은 단어로 묶여 있는 기억들이 있다. 동료의 배신이라는 문구로는 설명하기 힘든 여러 상황들이 녹아 있는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은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80년 전두환 군부정권 집권에 반대해 일어섰던 우리들에게 다음 장면에 대한 기록은 아픈 기억의 절정으로 남아 있다.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공판이 진행되던 육군본부 법정에서 피고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자백을 부인했다. "안기부 지하실에서 70여일 수사를 받았다. 김대중씨로부터 지시를 받아 내란을 기도했다고 인정하라는 것이다. 내가 혐의 사실을 인정하면 김대중씨의 목숨이 날아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며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을 뒤집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우두머리로 문익환, 송건호, 한완상, 이문영, 고은 등등 재야 민주인사 다수와 조성우, 송기원, 이해찬, 심재철 등등이 연루된 이 사건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내란음모사건'이었다.

김대중 이하 피고인들이 차례로 취조과정의 폭행과 고문 사실을 폭로하며 '내란음모' 사실을 부인하자 신군부의 법정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신군부 법정을 곤혹스러움에서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김대중씨로부터 이해찬을 거쳐 돈을 받았던 혐의를 비롯, '내란음모'에 관한 대부분의 공소사실을 인정했다. 그의 진술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사실'이 되었고 관련자 대부분이 사형 이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진술하는 도중 법정은 시끄러웠다. 그의 공소사실 인정이 가져올 엄청난 결과에 생각이 미치자 방청하고 있던 가족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한다.

"너 미쳤어? 너 왜 그래?"라며 울부짖던 이는 이해찬 총리였다고 한다. 조성우씨도 그의 허위진술에 대해 포효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만은 "심 동지, 고생 많았지?"하며 그를 위로했다는 전언이다.

당시 내란음모사건 공판에는 피고인 1명당 가족 2명과 풀제 취재진으로 내외신기자 2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다. 피고인 가족들의 '쪽지 통신'으로 위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분노 이전에 서글픔을 느꼈다.

이 일로 피고인의 가족에게 당시 상황을 물어 보았는데, 아래와 같이 짤막한 말만 하고 더 이상 얘기를 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오전 공판이 있고 나서 12시부터 점심시간이었는데, 심재철 학생 가족은 우리랑 같이 식사를 하지 않았어요. 그의 진술을 듣고 가족이 어떻게 우리랑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었겠어요? 우리도 굳이 권하지 않았지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출소한 뒤 출소한 뒤 그가 잠시 식당일에 관여했을 때 '감옥 동기'들이 매상을 올려주러 간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다. 배기선 의원도 그 중 한 명이었다고 들었다.

학내시위 주동만 해도 '신세'를 망치던 시절에 그는 영어교사로 취직했다가 문화방송 기자로 취업하는 불가해한 '수완'을 발휘해 주변을 놀래켰다. 그가 민주당에 입당하고 싶어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소식이 풍문으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신한국당 대변인이 되었다.

▲ 13일 오전 한나라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심재철 의원이 이철우 의원 사건과 관련 열린우리당을 비판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철우 의원이 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다"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한 '주성영 의원 파동' 정국에서 그가 "이념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이 민주투사로 위장하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해 물의를 빚고 있다. 열린우리당 김현미 의원은 그에게 "가련한 가롯 유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25년 친구 유기홍 의원도 가세했다. 아마도 심재철 의원은 그 자신이(피고였지만) 검찰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듣고 심 의원을 검찰측 증인으로 나섰다고 말한 김현미 의원, 그리고 유기홍 의원에 대해 법정소송을 벌이겠다고 공언한 모양이다.

망각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람들은 지나간 일들을 곧잘 잊어버린다. 어쩌면 심채철 의원은 '망각'에 기대어 '정치적 성과'를 얻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망각의 마술'로도 잊혀지게 할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 최민희 총장
80년 5월투쟁 과정에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투쟁의 중심에 섰던 그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공판에서 심 의원이 했던 일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구 여권 국회의원이 된 후 심 의원이 했던 '과잉충성행위와 발언'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주성영 의원의 '간첩 암약 발언 논란'을 앞에 두고 그가 하고 있는 행위와 말들 또한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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