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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춥고 배고플 권리가 없다!"

프랑스 코미디계의 대부 미셸 꼴루쉬의 외침 그 후 20년, ‘사랑의 식당(Restos du cœur)’의 겨울나기가 다시 시작됐다. ‘사랑의 식당’ 식료품 배급본부와 1900여 지부가 문을 연 것이다.

‘사랑의 식당’은 지난 6일부터 내년 3월 26일까지 겨울이 지나는 동안 4만3000여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극빈자들에게 6600만 끼의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게 된다.

여기에서 제공하는 식료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집에서 요리가 가능한 극빈자’를 위한 식료품 꾸러미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한 ‘준비된 식사’가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 직접 '사랑의 식당'을 찾아와 따뜻한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혹한에 언 몸을 녹일 수 있다. 이밖에 '사랑의 트럭'을 통해 식당을 찾아올 기력이나 의욕이 없는 거리의 노숙자들을 돌보기도 한다.

▲ 사랑의 식당에서 식료품을 무료로 배급하고 있다
ⓒ 사랑의 식당
사랑의 식당 측은 올해 ‘사랑의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 지난해 수준인 1일 6만5000여명 가량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파리에서만 1일 2만여 극빈자들이 6군데 지부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던 2001~2002 기간에는 총 56만 명에게 6천만 끼의 식사를 배급했으며 이들 중 20만 명이 노숙자와 빈민촌 인구였다. ‘사랑의 식당’이 처음 시작된 1985년에 8백만 끼의 식사가 배급된 것을 보면 급격하게 증가한 수치다.

겨울나기 축제가 된 ‘사랑의 식당’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다지만 적어도 배를 곯지는 말아야 한다. ‘사랑의 식당’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5년 9월 26일, 코미디언 꼴루쉬는 극심한 추위와 허기로 고통 받는 극빈자들을 위해 파리로부터 점차 다른 대도시로 번져나갈 간이식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배고픈 이들에게 매일 2000~3000끼의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의도였고 이어진 10월 14일, 파리 경찰국에 어렵사리 협회 신고를 마쳤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농림부 장관 앙리 날레를 만난 꼴루쉬는 초과 생산된 농산물로 빽빽하게 들어찬 유럽의 ‘냉장고’를 열어줄 것을 부탁한다. 메아리는 있었다. 정부는 보조금을 풀어 협회가 자리할 사무실을 마련했고 회계분야의 전문가들이 합류하도록 배려했다.

▲ '얼간이들' 공연.
ⓒ 사랑의 식당
꼴루쉬의 친구와 동료로 구성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동참이 ‘사랑의 식당’ 운동을 여론화하는 데 크게 한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꼴루쉬는 라디오 <유럽-1>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리는데 주력하면서 아나운서 필립 질다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유료 TV 채널 <까날 플뤼스(Canal+)>를 이용한 홍보활동도 병행했다.

동시에 인기 가수 장자끄 골드만으로 하여금 ‘사랑의 식당’을 위한 노래를 만들도록 했는데 첫 음반에는 꼴루쉬를 비롯해 인기 TV 사회자 중 한 사람인 미셸 드뤼케르, 가수 이브 몽땅, 배우 까뜨린 드뇌브 그리고 축구 스타 미셸 플라티니의 목소리를 담았다. 그로부터 2개월 후 파리 변두리 뽀르뜨 드 방브에 위치한 창고에서 첫 식료품 배급센터가 문을 연다. 각종 TV 프로그램과 스타들의 공연이 거둬들인 열매였다.

1986년 겨울, 850만 빈곤층이 무료 식료품으로 허기를 면할 수 있었고 당시 자원봉사자 수는 5000명이었다. 같은 해 꼴루쉬는 오토바이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의 뜻은 살아남았다. ‘사랑의 식당’ 제 4차 운동 착수 두 달 전인 1988년 10월 20일,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모든 이들이 세금 감면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꼴루쉬 법’이 의회를 통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 ‘사랑의 식당’ 운동이 마무리될 무렵, 협회는 노숙자를 위한 임시숙소 제공을 비롯해 행정적 원조, 일자리 찾기 등으로 그 역할을 다양화해 빈곤층의 사회 편입을 지원하는 한편 빈곤층 아동 보호 제도실시와 함께 문맹퇴치 운동도 벌여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린 극빈자들이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다시 설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세상에 굶주린 자들이 있는 게 내 탓은 아니지. 그러나 우리가 바꾸려 하지 않을 때 그것은 내 탓이 되지." (‘사랑의 식당’ 노래말 중)

"사랑의 식당을 위한 노래가 필요해. 일 저지를 만한 노래 말야. 너 할 줄 알지?"
"언제까지?"
"다음 주!"


꼴루쉬가 가수 장자끄 골드만의 집에 들어서며 뜬금없는 제안을 한다. ‘얼간이들(Enfoirés)’ 밴드가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위대한 광대 꼴루쉬의 죽음도 이들을 멈추지는 못했다. 꼴루쉬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이 지난 1986년 12월, 문화 예술계 인사들은 꼴루쉬의 아내 베로니크의 제안으로 ‘사랑의 식당’을 위한 한 TV 프로그램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해 또 그 다음해로 이어졌다.

▲ 꼴루쉬 자화상
ⓒ 사랑의 식당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골드만, 저니 할리데이, 에디 미첼 등 당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5명의 ‘얼간이들’은 7개 대도시를 누비며 공연을 펼쳤고 그 수익을 ‘사랑의 식당’에 쏟아 부었다. 1989년과 1990년 겨울 동안 연출된 일이다.

이때부터 ‘얼간이들’ 공연은 매년 더 많은 연예인들의 참여로 이어졌으며 급기야 2002년에는 30여 명의 연예인이 입을 맞추기에 이르렀다. ‘얼간이들’ 공연이 회를 거듭할수록 대중의 호응은 뜨거워졌으며 공연과 기념음반 수익금은 ‘사랑의 식당’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한 보증수표가 됐다. 그리고 꼴루쉬는 이들과 늘 함께했다. 비록 몸은 떠났지만 공연이 열릴 때마다 무대 한 가운데에 걸린 사진 속에서 ‘얼간이들’의 공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3~2004년 동안 ‘사랑의 식당’ 운동을 위해 협회가 거둬들인 총수입은 9천만 유로에 달했다. 41%의 시민 성금과 21.5%의 다른 단체 성금 그리고 유럽연합(EU) 지원금 15.12%로 충당됐고 ‘얼간이들’ 밴드 공연 수익금도 17.73%라는 무시할 수없는 자리를 차지했다.

가난하다, 그러나 왜?

"빈곤층은 증가했다. 이러한 현상은 20년 동안 심화됐고 책임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꼴루쉬가 ‘사랑의 식당’을 ‘개업’한 지 20년이 지난 오늘, 올리비에 베르뜨 현 협회장은 지난 6일, ‘사랑의 식당’ 20돌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프랑스의 빈곤 성적표를 내놓았다. 가장 심각한 식량 결핍은 사라진 반면 빈곤층은 증가했고 더 허약해졌다는 것이다.

협회 통계에 의하면 2003~2004년 겨울을 지나는 동안 ‘사랑의 식당’을 찾은 인구는 전체적으로 10%가 늘었고 특히 파리와 파리 근교, 그리고 동부 프랑스의 경우 상승폭이 30%에 달했다. 같은 시기 최저생계수당(RMI) 생활자도 10% 증가했다.

주된 빈곤층은 한부모 가정과 독신 여성, 30세 이하의 젊은층 그리고 실업자다. 프랑스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는 한부모 가정은 ‘사랑의 식당’ 수용 인구의 31%에 해당하며 최저생계수당 혜택 자격이 안 되는 25세 이하의 젊은층은 ‘사랑의 식당’ 수용인구의 9%를 이룬다.

최근에 발표된 아베피에르 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략 3백만의 프랑스 인구가 노숙자거나 빈민촌에 살고 있다고 한다. 유럽 기준에 따르면 프랑스 인구 10명 중 1명이 극빈층이라 할 수 있는 가운데 프랑스에서 말하는 ‘빈곤’의 기준은 개인 혹은 가정의 수입이 전체 프랑스인 평균 수입의 절반 이하일 경우로 2003년에는 월 1인 수입 650유로(한화 90만원 상당) 이하가 이에 해당했다.

프랑스식 사회주의 보를로 계획, 자선단체 기부자 세금감면 혜택 75%까지

그러나 이 모든 조건을 떠나서 30%의 빈곤층은 1%에 해당하는 부유층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생활여건에서 살고 있다.

프랑스인 평균 가계 예산에서 식료품 소비 비율은 18%를 차지하지만 빈곤층의 경우 30~50%로 올라간다. 또 가계 예산 중 평균 주거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30%인 반면 빈곤층은 50%까지 증가하고 또 6%의 빈곤층은 주거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 뿐만 아니라 (짧은 기간에 독자적으로 주거를 해결할 전망이 없는) 노숙자 수도 2000년에는 7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절망적인 성적표를 기반으로 베르뜨 협회장은 2004-2005년 ‘사랑의 식당’ 운동을 위해 세 가지의 구체적인 '투쟁노선'을 제시했다.

첫째, 가능한 한 빈곤층 가까이에서 이들의 수용 여건을 개선할 것과 둘째, 노숙자 수용시설을 주간에도 개방할 것, 셋째, 보를로 계획 시행에 압력을 가할 것 등인데 여기서 보를로 계획이란 빈곤층을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세금 감면 혜택을 기존의 66%에서 75%로 대폭 상향 조정할 것을 주장하며 장루이 보를로 장관이 제출한 법률 수정안으로 지난달 4일 프랑스 상원에서 통과됐다.

기부는 개인이나 기업이 하지만 결국 정부의 간접적 사회보조금이 되는 보를로 법안은 프랑스식 사회주의의 표본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꼴루쉬는 자신의 코미디 무대에서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어릴 적 가장 힘든 때는 월말이었다. 매월 마지막 30일이 가장 힘들었다…. "

가난한 이들은 한달의 30일이 힘들다.

꼴루쉬는 누구?... '난장판 만들기 위해' 대통령 출마까지

▲ 대선후보 꼴루쉬
ⓒmultimania
꼴루쉬는 천상 코미디언이었다. 그는 자신을 잡종이라 비웃고 세상을 비웃었다. 이것은 지난 1981년 꼴루쉬가 대선 후보에 출마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한바탕 박장대소를 이끌어내는 해프닝이었다.

꼴루쉬의 공약은 ‘난장판을 만드는 것’이었고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엿 먹이자’가 슬로건이었다. 당시 일간지에 게재된 꼴루쉬의 출사표는 이 모든 꼴루쉬의 신랄한 농담을 함축하고 있다.

"나는 게으름뱅이, 구두쇠, 마약 중독자, 알콜 중독자, 동성연애자, 여성, 기생충, 젊은이, 늙은이, 아티스트, 죄수, 갈보, 견습생, 흑인, 뚜벅이, 아랍인, 프랑스인, 더벅머리, 미치광이, 여장남자, 옛 공산주의자, 입증된 기권주의자… 현 정치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모든 이들이 나에게 투표하고 각 시청에 등록하고 이 사실을 유포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 유일한 후보 꼴루쉬"

프랑스에서 대선 후보로 나서려면 각 시도 단체장 500인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꼴루쉬에게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체장 500인의 서명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대선 첫 여론조사에서 15~17%의 지지도를 얻었다.

사태가 상상외로 커지자 정부는 긴장했고 꼴루쉬를 겨냥한 온갖 중상모략이 난무했다. TV 출연도 금지됐다. 인터뷰를 위해 꼴루쉬를 찾은 영국 BBC 방송의 기자가 공약을 물었을때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꼴루쉬는 입고 있던 바지를 내려 엉덩이를 오른손으로 툭툭 치며 카메라에 들이밀었다.

"공약 ? 이게 바로 내 공약이야 !"

그러나 당시 프랑스 국민의 정치혐오증세가 극에 달했던 까닭에 꼴루쉬가 진정 원했다면 대통령에 당선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았다.

1944년 10월 28일 파리에서 태어난 꼴루쉬는 1986년 6월 9일 불의의 오토바이사고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꼴루쉬는 15세 되던 해부터 직접 돈을 벌어야 했다. 웨이터, 전보배달원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가난과 싸워야 했다.

그러던 중 당시 인기 코미디언 로망 부떼이와의 조우는 꼴루쉬의 미래를 바꿔놓았으며 꼴루쉬가 ‘역전까페’라 이름 붙인 아뜰리에는 연예인들의 명소가 됐다.

꼴루쉬는 라디오, TV, 영화를 넘나들며 이름을 떨쳤고 영화 ‘꼭두각시여 안녕(1983)’으로 세자르 최우수 남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꼴루쉬는 당시만 해도 금기였던 여러가지 소재 특히 인종차별주의, 빈곤, ‘쓰레기 미디어’ 등 프랑스 사회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 코미디계를 평정하면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었지만 꼴루쉬는 습관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졸부가 아니다. 옛 가난뱅이일 뿐."

현재는 부유하지만 어려웠던 지난날을 결코 잊지않겠다는 자기 다짐이었다.

그리고 이 다짐은 빈곤층과 연대하는 ‘사랑의 식당’으로 태어났다. 41세 되던 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꼴루쉬는 현재까지도 프랑스인들에게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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