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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차이가 나는 원균과 이순신이 전쟁놀이를 했다?”

▲ 원균의 초상화 (1995년 김산호 화백)
ⓒ 김산호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원균과 이순신이 전쟁놀이를 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5살 연상인 데도 이런 전개를 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원균은 1540년에 이순신은 1545년에 태어났다. 소설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 하더라도 황당하다.

이순신과는 빛과 그림자의 관계인 원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한 반증일 것이다. 최근 이순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원균도 조명을 받고 있다. 그가 임진왜란 중의 전공을 인정받아 권율, 이순신과 동급인 ‘선무 1등공신’에 추존됐다는 사실도 뒤늦게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또, 임진왜란 초기 단독작전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올렸다는 것도, 패배가 뻔한 칠천량 해전을 피하려다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어쩔 수 없이 출전했다가 완벽한 패배를 당한 뒤 그마저도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이순신을 질시한 용렬한 장군인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내몰린 불운한 용장인가.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에 있는 원균 장군의 묘지에 도착했을 때 그 주변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농토들 가운데 드문드문 집들이 보이는 내리마을 안쪽으로 150m 정도 들어가면 원균의 묘지가 있었다.

원균무덤 옆의 애마총

내리저수지를 정면으로 마주한 언덕배기에 있는 묘역은 널찍했다. 원균의 묘지 아랫녘 신도비 옆에 있는 작은 무덤 앞에는 애마총이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원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천리를 달려와 신발과 담뱃대를 놓고 그 자리에서 죽은 애마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말 무덤이라고 한다.

묘역에서 가파르게 난 언던 길을 조금 더 가니 낡은 사당이 있다. 작고 초라한 사당은 모선제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사당 안에는 '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서'라는 문서가 보관돼 있다. 1등 공신 교서로는 국내에 유일한 것이어서 그 역사성과 희귀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균 장군의 초상화도 걸려 있었다. 원행의 원주 원씨 종친회 회장에 따르면 이 초상화는 작년에 그린 것이다. 원균의 본가도 묘지에서 2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의 공식적인 삶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균은 1540년 1월 5일 현재 장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평택시 도일동에 출생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방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인 1592년(선조 25) 2월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어 가배포에서 73척의 군선 지휘를 맡는다. 그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원병과 협공하여 옥포(玉浦) · 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 다툼이 있었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하였다. 1594년 그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고 다시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그 뒤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1597년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칠천량해전에서 삼도 수군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던 중에 대패하여 전사하였다. 그 후 1604년 이순신 · 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좌찬성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경상도는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지휘권을 맡고 있었다. 일본군이 부산진 앞바다에 쳐들어왔을 때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 소수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임진전쟁의 급보를 알리는 공문(임진장초 : 李忠武公全書 卷 2 因倭警待變狀 1)을 보낸다.

경상 해역에서 원균은 단독으로 일본 수군과 맞서 싸우면서 10여 척을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리면서 전라좌수영에 원군을 계속 요청했다. 이 부분은 <임진장초> 만력 20년(1592) 4월 30일자 계본에 언급되어 있다. 원균의 공문에만 나타나는 승전의 기록인 만큼 임진해전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해결해야 할 난제이다.

원균, 이순신과 연합하기 전에 단독작전 승리

이 무렵의 원균 행적은 임진해전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원균과 이순신이 연합하여 전투를 벌인 것은 20여 일이 지난 후의 일로, 이순신과 연합하기 전에 이미 단독작전으로 왜의 수군을 격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선무일등공신 교지 (원주원씨 종친회 소장)
ⓒ 진병일
이순신은 출발하기 2일 전인 5월 2일에도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일부 여러 장수들이 원군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녹도 만호 정운, 군관 송희립은 전면에 나서 말했다.

“적을 치는데 우리 도요, 남의 도요 하며 따지는 것은 있을 수 없사옵니다. 적의 예봉을 꺾는다면 우리 도도 보전하게 될 것이옵니다.”

이순신은 출정을 결심하고 주전함인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한산도에서 원균과 합류한다. 5월 7일 전라좌수영의 해군과 경상우수영이 연합작전으로 옥포에서 일본군 선단을 공격하여 26척을 격파한다. 이어 합포, 적진포 등에서 다시 16척을 불살라 없애는 등 모두 40척을 대파했다.

이후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판옥선 25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은 전라좌·우도와 경상우도의 3도 수군이 연합전선을 구축해 작전을 펼친다. 첫 해전인 옥포전투부터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약 5개월 간에 걸쳐 조선 수군은 일본의 전선만 약 330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선조는 임진전쟁 발발 시 이순신은 원균의 원군 요청을 받았음에도 20여 일이나 질질 끌다가 부하들의 독려로 움직였다고 평가했다. 당시의 상황을 잘 살펴보면 이순신 장군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사실 조선수군의 수와 훈련정도, 군선의 수와 속도, 군수지원체제, 등을 고려할 때 조선수군의 연합 함대가 일본 해군에 연전연승을 거둔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연합해 싸우던 두 장군의 관계는 1592년부터 말부터 나빠지기 시작했고, 1594년 10월의 거제도 공략작전 후에는 이순신이 스스로 체직을 요청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된 것으로 파악(<선조실록> 권 57년 11월 병술)된다.

선조 25년(1592) 6월 초순 일본 측의 요구로 첫 번째 강화 논의가 있었다. 대동강에서 열린 이 회담에서 조선 측은 이덕형이, 일본 측은 야나가와 노리노부(柳川調信) 승려 겐소(玄蘇)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회담에서 조선 측은 ‘무조건 철수’와 일본 측의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入明)’라는 양쪽의 입장만 확인한 채 결렬되었다.

이후 계사년(癸巳年 1593) 벽두 조선,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4월을 전후하여 길고 지루한 강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이 논의는 이때부터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기 전까지 4년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정유재란 직전인 1596년 12월 ‘부산왜영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이순신은 거제 현령 안위 등이 기습공격을 펼쳐 적의 집과 창고를 불태우는 전공을 올렸기에 이들을 포상해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바로 다음 날 이조좌랑 김신국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이 사건은 체찰사 이원익이 군관 정희현에게 명하여 실행한 작전이었다. 그런 내막을 모르고 이순신은 부하에게 보고받은 대로 장계했다.

이원익은 평소 선조에게 “경상도 여러 장수 가운데 이순신이 제일”이라 칭송할 만큼 이순신을 아꼈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장계를 올렸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1597년 당시 상황은 매우 심각해 이순신을 투옥할 때 선조는 직접 ‘이순신을 죽여야 할 이유’로 3가지 죄를 지목했다.

그 무렵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통역을 하던 요시라는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그는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아와 “고니시가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가 바다를 건너올 시기를 알려줄 테니 수군을 이끌고 나가 치라”하는 정보를 흘렸다.

조선 조정은 이 일본측의 반간계 정보를 믿고 이순신에게 명을 내렸다.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자 그가 해로 방어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정에 보고됐다. 선조는 격노하여 이순신을 하옥시키도록 명했다.

현지 상황에 정확한 이순신의 판단은 옳았음에도 선조는 오판하여 이순신이 일본군을 격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충청병사로 있던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임명한다.

원균, 일본 수군과 전투를 피한다는 이유로 권율에게 곤장 맞아

이순신이 물러난 뒤 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은 지휘권 확립에 실패하고, 전략전술면에서 칠천량해전 직전까지 도체찰사와 도원수 등의 해로 차단 전술과 통제사 원균의 수륙병진 전술은 대립했다.

원균은 3월 29일 장계를 올려 안골포와 가덕도 등의 일본군 세력이 약하므로 육군이 먼저 공격한다며 일본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5월 말에도 장계를 올려 조선 수륙 병진 공격작전을 건의한다. 이 작전에 대해 도원수 권율이 반대하자 원균의 건의는 묵살된다.

▲ 원균 장군의 묘지
ⓒ 평택시청
이무렵 일본 수군과 전투를 피한다는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원균이 권율 장군으로부터 곤장을 맞는 수모를 당한다.

이에 따라 원균 통제사는 수군 3만 명과 함선 200척을 한산도에 집결시키고 함대를 두 선단으로 재편한다. 7월 14일 통제사 원균은 조선 수군 함대 전체를 이끌고 출전한다. 일본 함대를 추격하여 부산 앞바다 물마루(水宗)를 지나면서 운용의 어려움을 겪는다. 풍랑 때문에 가덕도 등으로 흩어진다.

정유재란의 첫 전투인 칠천량 해전에서 1천여 척의 일본군에게 원균의 조선수군은 대패하고, 고성 땅 추원포에 상륙했으나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한다. 이 때 전라좌수사 이억기 등도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하고 조선수군은 완전히 초토화 된다.

임진전쟁 첫 해는 두 장수와 전라우수영도 함께 협력하여 협공 전략전술을 펼친 결과 해전에서 승리했다. 두 장수를 평가는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이요, 원균은 모함을 일삼는 군인으로 극에서 극을 달린다. 분명 임진왜란의 전투 결과만 두고 보면 원균은 패한 장수였지만 많은 승전을 한 전공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원균은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부산에서 적을 공격하다가 패전하고 전사했다. 반면에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극적인 최후를 맞고 전사하여 역사의 충신으로 칭송받는다.

원균에 대한 기록이 매우 빈약한 반면, 상대적으로 이순신은 <난중일기>와 원균이 올린 군공장계는 이순신보다 더 많은 6개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평소 이순신을 아끼던 유성룡이 전쟁이 끝난 후 남긴 징비록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히 전한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전략 전술을 적절히 운영했다. 조선 해안의 지형, 지물에 밝은 연해 주민을 이용하여 주변 환경을 전투와 전략을 수립하고 해전에서 승리로 이끌었다.

▲ 원균 장군의 사당
ⓒ 평택시청
반대로 원균은 용감하였지만 해전에서 함대 함의 전투를 선호했던 점과 적군의 기세가 아군보다 강할 때 치밀한 지략을 펼치지 못함으로써 적의 협공을 받아 패했다. 신립 장군도 개인적으로는 우수했지만 수많은 군사를 이끌어 가는 장수로선 지략이 부족해 8000군사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우를 범했고, 원균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의 승리, 화포·군선의 우수성과 원균 등의 조력으로 가능

사실 이순신의 영웅적 승리는 조선 군선과 화포와 전술전략의 응용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원균과 같은 협력자와 여러 조력자, 군관이나 전투 요원, 격군 등이 합심하여 이룩한 것이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다. 라이벌 관계였던 원균과 이순신의 삶을 다시 살펴보니 새로운 화두로 다가온다. 과연 이 말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역사에서는 가정이 없다지만 두 사람이 계속해서 협력했다면 조선의 해전사는 더 빛났을 것이다. 또 조정이 전쟁의 포상을 고루 분배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면 전쟁 기간을 더 단축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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