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중학생이던 90년대만 해도 조금은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내게 해외여행은 일종의 사치이자 꿈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해외여행은 더욱 더 장밋빛으로 물들고 몽롱하고도 막연한 환상이 되었다.

20대 중반인 지금도 해외여행은 아직까지 내게 환상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중학생 시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예전에 비해 조금은 싼 값에 해외여행을 할 수도 있고 꼭 유럽이 아니더라도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할 만한 나라는 충분히 많다. 즉 돈이 문제는 아니라는 소리다. 내 가치관의 문제다.

중3 때부터 나는 무협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 덕에 속독과 한자 실력만큼은 또래에 비해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무협지를 읽고 있는 모습을 집에서는 고운 눈초리로 보지 않았다.

늘 부모님께서는 그런 책 보지 말고 교양서적 좀 읽으라고 독촉하셨고 무협지를 읽고 있다는 것을 가리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무협지 사이에 교양서적 하나를 끼워 책을 빌려오곤 했다.

그렇게 끼워온 책 중 하나가 나의 가치관을 뒤흔들어 놓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다.

중학생 시절 김용의 <영웅문> 사이에 끼워온 그 책은 나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영웅문>이 너무 재미있는 탓이기도 했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말처럼 그때는 아는 것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
ⓒ 창작과비평사
고등학생 시절 역시나 좀 있는 척, 유식한 척 하기 위해 다시 빌려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나의 머리가 좀더 커졌기 때문일까? 이튿날 1, 2, 3권을 몽땅 사버릴 정도로 나를 끌어당겼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 얼마나 큰 쾌감을 주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감독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유홍준 당시 영남대 교수와 함께 떠나는 내 나라 여행은 정말 우리나라가 이런 곳이었나, 라는 의구심과 함께 나에게 너무나 큰 즐거움을 주었다.

특히 그냥 지나치기 쉬운 여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비록 흑백이긴 하지만 사진과 함께 세세하게 설명해 줄 때는 마치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게다가 문화재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에 얽힌 뒷이야기와 그 주변 식당과 여관 이야기까지 하고 있어 그 실재감은 더욱 강하다. 글을 읽고 있으면 그가 갔던 그 길 그대로 나 역시 짚어 나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나에게 아는 만큼 보이고 우리나라도 외국 못지 않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란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실제로 그 책을 읽고 유홍준씨가 간 그 길 그대로 가진 않았지만 몇 군데 직접 가 보았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믿기 때문에 사전에 답사지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아보고 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명제는 절대 틀리지 않았고 지리적으로 가까워 열 번 이상 가본 경주는 갈 때마다 그 아름다움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해외여행은 나에게 아직까지 환상이다. 돈이 없어서 해외여행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핑계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아직 당당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움도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외국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 수 있겠냐고 말이다.

물론 나 역시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외국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모두 경험해 보고 싶고 느껴 보고 싶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고, 그 명제 뒤에 나의 생각을 하나 덧붙이면 보이는 만큼 느끼게 된다. 즉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고 있을 때 해외 문화유산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볼 수 있고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나에게 문화재에 대한 지식뿐 만 아니라 그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주었다. 가끔은 나를 국수주의자로 만들어 버린 책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후회는 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껴지는 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세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국내편 세트 - 전7권

유홍준 지음, 창비(2012)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