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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노무현'은 결벽주의자이다. 빚지고는 못사는 성미다.

30여 년 전쯤의 일이다. 당시 고향인 김해 장유의 불모산에서 고시공부를 하던 수험생 노무현은 직접 독서대를 발명해 특허등록까지 했다. 그리고 사법시험 합격후에 사법연수원생 노무현은 부산의 한 선생님으로부터 500만원을 빌려 그때 고시공부를 함께 한 친구 2명과 사업을 벌였다. 75년에 500만원은 큰돈이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세 사람은 결국 부산의 선생님을 찾아가 다시 500만원을 더 투자해 새로운 기회를 주거나 먼 훗날 갚을 것을 기약하고 이쯤에서 사업을 정리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이 선생님은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면서 "젊은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하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이듬해 개업을 한 변호사 노무현은 돈을 벌자마자 제일 먼저 그 500만원부터 갚았다. 3인의 공동채무였지만 본인의 사업제안으로 일을 벌였고 또 3인 중에서 본인이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만큼 본인이 갚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지만,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 탓이 컸다.

변호사 개업하자마자 500만원 빚부터 갚다

"사랑해요, 한국!" 베트남 호치민을 방문중인 노무현대통령이 11일 오후 섬유제조회사인 한솔비나를 방문하자 현지 종업원들이 태극기와 베트남 국기를 흔들며 환영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도광환
2004년 10월 10일 해방 50주년을 맞이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붉은 색 천에 큰 별이 새겨진 베트남 국기 일색이었다. 이날 오전 9시쯤 하노이 시내 중심부의 국회의사당 맞은 편에 있는 '주석 호치민'(Chu Tich HO-CHI-MIN) 묘소 앞에 커다란 화환이 하나 도착했다. 그 화환에 두른 붉은 색 천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10분쯤 뒤에 노무현 대통령은 호치민 묘소에 도착해 헌화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신이 안치된 호치민 묘소 안에까지 들어가 고인에게 묵념하고 참배했다.

호치민 묘소 참배로 베트남 국빈방문 공식일정을 시작한 노 대통령은 곧바로 이어진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마음의 빚'을 거론하며 과거사를 완곡하게 언급했다.

"베트남의 오랜 역사, 옛날에서부터 많은 나라, 민족이 고난을 겪었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과거의 먼 역사를 보면 동질성을 갖고 또 상호존경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우리 국민들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이 있다. 마음의 빚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노 대통령의 '마음의 빚'이나 과거사 언급은 베트남 정부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르엉 주석도 "마음의 빚이 있다"는 노 대통령의 '가벼운 과거사 언급'에 대해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이 그렇듯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긍심을 갖고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승자인 마당에 식민 통치에 대한 보상은 이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한국은 '미국의 용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도 피해자라는 인식마저 있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은 기어코 마음의 빚 이야기를 꺼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빚지고는 못사는 성미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을 향한 '마음의 빚'

▲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0일 오전 베트남 국빈방문 당시 첫 일정으로 호치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동진
노 대통령은 이날 호치민 묘소 참배 뒤에 한발 더 나아가 한·베트남 경제인들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하노이가 해방된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오늘 아침 '호치민 선생' 묘소를 다녀왔다. 나는 베트남의 역사와 그 역사를 사랑하는 베트남 국민의 자존심을 매우 존경한다."

노 대통령은 베트남 경제인들에게 수도 서울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듯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가 '홍강(紅江)의 기적'을 이룰 것임을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헤드 테이블에 앉은 베트남 상공회의소 회장은 노 대통령의 진심 어린 연설에 시종일관 감동하는 눈치였다.

"베트남 방문 중에 하노이 거리에서 '그 사람들'을 발견했다. 바로 내가 자랑했던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밝고 훨씬 활발하고 의욕에 넘치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것이 홍강(紅江)의 기적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저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다."

이번 노 대통령 해외순방의 주제는 경제·통상 외교였다. 흔히 하는 말로 이른바 '세일즈 정상외교'다. 세일즈에서는 실적이 중요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순방을 마친 후 국민에게 보고해야 할 '귀국 선물 보따리'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의 결벽주의는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1일 오전 7시 노 대통령이 숙소로 이용한 하노이 대우호텔의 그랜드볼룸에서 수행기자단과의 조찬간담회가 열렸다. 한 기자가 "이번 경제통상외교에서 가장 의미있는 성과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계면쩍은 표정을 지은 노 대통령의 답변은 이랬다.

"(그 질문에) 답변을 하려면 공치사가 되고 내가 공치사하면 사업을 실제 주관하는 사람이 섭섭할 것 같다. 되게 말하기 어려운데…."

본인이 직접 성과를 말하면 자기자랑이 되고, 자기자랑을 하면 '사업을 실제로 주관하는 사람'이 섭섭해 할 것 같다는 얘기다. 여기서 말하는 '사업을 실제로 주관하는 사람'은 기업을 가리킨다.

노 대통령이 깬 해외순방의 몇가지 관행

▲ 노무현 대통령의 인도-베트남 순방에 이용한 아시아나항공 특별기. 이번 순방을 계기로 항공사 사장의 대통령 특별기 동승관행이 깨졌다.
ⓒ 오마이뉴스 김당
노 대통령은 이번 해외순방에서 특유의 결벽주의로 몇가지 관행을 깨뜨렸다. 그 첫번째는 사업을 실제로 주관하는 기업의 성과를 정부가 '따먹는' 관행을 깬 것이다.

이제까지는 해외에 진출한 기업의 노력으로 일군 대형 프로젝트나 계약이 있더라도 대개는 대통령의 순방에 맞춰 '사인'을 하는 게 관례였다. 또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앞두고 청와대에서는 정부의 관련 부처와 기업들에게 진행되는 사업을 한데 모으고 채근하곤 했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성과를 빛내기 위해서다.

사실 기업이 그런 성과를 거둔 데는 정부의 외교적 지원과 뒷받침이 있었으므로 기업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다고 해서 꼭 비난받을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결벽주의에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그런 관행마저 마뜩치 않았다.

카자흐스탄·러시아 순방 때부터 노 대통령을 수행한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노 대통령이 기업인들이 이뤄놓은 과실을 따먹는 사인을 안하겠다고 해서 노 대통령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순방에서 깨진 두번째 관행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계속되어온 대통령 해외순방 때에 국적기(대통령 특별기) 사장이 동승하는 것이다. 특히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항공사 사장의 동승은 대통령에 대한 예우이자 항공기의 안전을 사장이 책임지겠다는 제스처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통령과 독대할 모처럼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대를 싫어하는 결벽주의자인 노 대통령에게는 항공사 사장의 동승도 불편했던 모양이다. 천호선 의전비서관은 "의전 개혁 차원에서 그런 동승 관행을 없앴다"면서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경련에서 제출한 대통령 해외순방 경제사절단의 기업인 명단을 보니 전부 기업의 필요에 따라서 온 사람들인데 필요에 따라서 오지 않은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이었다. 명단을 보니 지난번 카자흐스탄·러시아 순방 때도 동행했었다. 알고 보니 항공사 사장이 동행하는 것이 관행이라는 거였다. 그래서 오실 필요 없다고 했는데 미리 잡아놓은 일정 때문인지 인도까지만 별도의 항공편으로 오시고 특별기에는 상무가 동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항공사 사장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베트남에서 5박6일 동안 할 일이 뭐 있겠나."

경제5단체와 대기업 위주로 짜여진 경제사절단의 공식·비공식 의전 관행도 이번에 깨졌다. 청와대는 늘 '그 밥에 그 나물'인 의전 식단을 현지 진출기업 중심으로 대기업·중소기업간의 균형을 잡는 쪽으로 개선했다. 다음은 천호선 비서관의 얘기다.

"국빈만찬 등은 공간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데 국내에서 하듯이 의전을 짜다보면 국내에서 맨날 보던 사람들이 해외에서도 맨날 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또한 의전개혁 차원에서 강신호 전경련 회장 등에게서 '좋다'는 동의를 구해 현지 진출기업 우선으로 좌석을 배치하고 중소기업의 참여를 높였다."

의전식단도 현지 진출기업 중심으로 재배치

그런 점에서 카자흐스탄·러시아·인도·ASEM·베트남으로 이어진 순방성과는 성공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 성공의 이면에는 노 대통령 특유의 고집과 결벽이 묻어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은 인도에서건 베트남에서건 더 많은 한국 상품을 팔기보다는 더 많은 인도·베트남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 진솔함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노 대통령은 인도에서는 즉석 연설로 우리 기업이 인도의 파트너로서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역설했다.

"한국 기업은 시작하면, 뿌리내리면 쉽게 포기하거나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뢰를 받고 있다. 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움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또 최근에 중국이 사스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 한국기업은 떠나지 않았다. 어렵더라도 한번 만든 인연을 성공시키려는 의리와 고집이 있다. 그 점에서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다."

▲ 베트남 호치민을 방문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11일 오후 섬유제조회사인 한솔비나를 방문, 작업중인 현지 종업원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도광환
그리고 베트남에서는 우리 기업이 현지투자한 의류제조업체인 '한솔비나' 공장을 방문해 역시 즉석 연설로 이곳의 베트남 여성 노동자의 심금을 울려 놓았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에 성공을 했느냐 하는 질문을 여러번 받았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을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한국 국민들이다. 우리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가 막 경제성장을 시작할 때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우리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난 여러분의 모습에서 우리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봤다.

그런데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 여러분의 미래가 보인다. 베트남의 미래가 보인다. 그것은 밝고 활기찬 미래다. 지금 여러분이 일하고 있는 환경은 그 당시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던 환경보다 좋은 것 같다. 여러분들의 얼굴은 그때 우리 노동자들의 얼굴보다 더 밝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미래는 밝다. 우리 기업들과 함께 같이 일을 해보자."


베트남 여성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린 노 대통령의 즉석 연설

이런 즉석 연설은 보좌진이 써준 연설원고가 아니었을 뿐이지 노 대통령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준비된 연설'이었다. 윤태영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순방기간 옆에서 지켜본 노 대통령의 꼼꼼하고 철저히 준비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적절한 수면을 위해서는 6시가 좋겠다는 비서들의 건의를 대통령은 한사코 물리치면서 5시 모닝콜을 고집했다. 전날의 일정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었어도 예외는 결코 없었다. 대통령은 그렇게 누군가 아침을 알리러 오기 전에 먼저 아침을 맞으면서 또 하나의 하루를 준비했다. 인도에서도 베트남에서도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노 대통령은 11일 수행기자단과의 조찬간담회에서 "우리 기업들이 참 요령 있게 잘하고 있다"면서 정상회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상회담은 진행되고 있는 그런 것을 잘 챙기고 조금 더딘 것은 다시 한번 챙기고, 즉 챙기고 매듭짓고 새로운 과제를 한번 더 확인해 방향을 설정하는 의미도 있다.…(이번) 방문을 계기로 점검하고 기업이 활발하게 활동하도록 정부의 과제 꼼꼼히 챙기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노 대통령은 'LG에서 시작해 삼성으로 끝난 해외순방'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가는 곳마다 기업과 기업인을 추켜세웠다. "해외에 나가보니 기업밖에 없더라"는 말도 했고, "대통령이 아닌 기업이 국가 대표선수"라는 발언도 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도 지난 13일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은 29위에 랭크됨으로써 지난해보다 11계단이나 떨어졌다.

그런 점에서 지난 14일 저녁 '재계의 대통령'인 이건희 삼성 회장이 주요 그룹 총수와 재계 원로들을 삼성의 영빈관인 승지원으로 초청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및 원로자문단 회의를 개최한 것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비쳐진다. 이날 참석자들은 "기업들이 앞장서서 경제 난국을 헤쳐나가자"고 뜻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는 이와 별도로 내수경기 부양과 지역 균형발전 등 다목적 포석으로 기업도시 설립을 위한 특별법을 준비하는 등 정부와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노 대통령 또한 18일 경제활력을 한 종합투자확대방향 보고를 받고서 새삼 "잘못된 부양책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지 재정지출 등 필요한 정책수단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삼계탕으로 성이 안차는 재계 총수들... 독대할까?

▲ 전국경제인연합이 14일 오후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서 개최한 전경련 회장단회의 및 만찬회에 참석한 재계 인사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이현재 호암재단 이사장, 김각중 경방 회장, 송인상 효성 고문, 이건희 삼성 회장, 강신호 전경련 회장, 남덕우 산학협동재단 이사장, 김준성 이수화학 명예회장,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등이다.
ⓒ 연합뉴스
이제 재계의 관심은 노 대통령이 이건희 회장 등 재계 총수들과 언제 어떤 형식으로 만날 것인지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노 대통령은 올해 1월과 5월 두차례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대기업들이 경제 활성화에 적극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청와대를 다녀온 재벌 총수들은 중장기 투자계획을 앞다퉈 발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재벌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삼성·현대·LG 등 10대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성 자산만도 지난 6월말 현재 27조1066억원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이 돈이 시중에 풀리기만 해도 경기 침체의 숨통을 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경제 활성화를 위한 여러 조처에도 불구하고 '백약이 무효'인 상황에서 노 대통령 측근과 청와대 참모들은 노 대통령에게 재벌 총수와의 독대도 여러차례 건의했다고 한다. 재계 총수들을 대중음식점인 삼계탕 집에 모아 놓고 밥 한끼 먹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차니, 독대문화에 익숙한 기업인들을 따로 불러 독려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기업이 일궈놓은 프로젝트에는 사인을 하지 않겠다고 해 참모들의 애를 먹인 노 대통령이 이런 건의를 받아들일리 만무하다. 노 대통령은 "내가 왜 재벌 총수들과 독대까지 해가며 부탁을 해야 하느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오해 살 만한 일은 안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독대 기피증'은 굳이 재계 총수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오랜 관행인 국가정보원장의 '독대보고'(주례보고)도 반드시 비서실장을 배석케 함으로써 이미 없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현재까지 이뤄진 기무사령관의 대면보고도 단 2회뿐이다.

재임중 재벌 총수와의 독대에서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수뢰하고, 정보기관장과의 독대에서 정치공작을 보고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인들과 뒷거래를 안하면 되지, 만나는 것 자체를 기피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얘기도 설득력이 있다.

노 대통령의 결벽증은 18일 이른바 '한국판 뉴딜정책' 발표를 앞두고서 "무리하거나 잘못된 부양책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지 재정지출 등 필요한 정책수단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새삼 강조한 데서 잘 드러난다. 정책기조나 노선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무리하거나 잘못된 부양책'인줄 알면서도 그런 정책을 쓰는 정부는 없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의 노파심은 사족이다.

흔히 얘기하는 대로 '경제는 심리'다. 어쩌면 지금 경제 주체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노선이나 정책기조가 바뀌었다는 인식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설령 착시(錯視)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결벽증은 그런 착시마저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세다.

독대가 해결사는 아니고 첫술에 배부를 수도 없겠지만, 노 대통령의 결벽증 때문에 경제 회생의 기회를 놓친다면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일 때는 조이더라도 풀 때는 '화끈하게' 풀어주는 것이 노 대통령의 또 다른 진면목이 아니던가.

▲ 지난 12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5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 및 인도, 베트남 국빈방문 등 8박9일간의 해외순방 일정을 마치고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도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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