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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보내고 있는 출판인 고성미씨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해방기의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선생에 관련된 흥미로운 글을 <오마이뉴스 일본지사>에 기고해 왔다. 몽양 선생의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는 신동진 감독 그리고 몽양 선생의 6촌 동생인 여운각 선생과 동행하면서 기록한 여운형 선생의 발자취다. <필자 주>

취재 : 고성미 기자
정리 : 박철현 기자


▲ 몽양 선생의 친필 글을 보며 감격스러워 하는 여운각 선생
ⓒ 고성미
일제 강점기 시기에는 철저한 반일주의자였으며 해방이 된 후에는 ‘좌우합작·남북합작’을 위해 온 정열을 기울인 혼란기의 정치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이 땅을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나눠먹으려 했던 열강들의 잇속챙기기 외교 속에서 목이 터져라 좌우합작을 외치던 몽양 선생은 좌익도 우익도 아니었다. 아니 굳이 표현한다면 우리 민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익 보수파들로부터 공산주의자 혹은 친소분자(親蘇分子)로, 좌익 강경파들로부터는 우경 기회주의자, 혹은 친미주의자라고 매도당하였지만 "우리 민족이 살아나갈 방도를 찾을 수만 있다면 까짓거 좌면 어떻고 우면 어떠랴" 하는 것이 몽양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현재 일본에서 망명 중인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의 저서 <찢겨진 산하>에서도 몽양 선생과 김구 선생 그리고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몽양 선생의 불편했던 관계가 잘 묘사되어 있을 정도로 여운형 선생의 생각은 해방 당시의 이데올로기나 스펙트럼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만일 몽양 선생이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 있어 몽양이 추진하고 있었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위시한 좌우합작 운동이 성공하였더라면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 '미소공동회의'의 개최나 "전후 처리문제는 다룰 수 없다"는 유엔헌장의 규약을 무시하면서까지 미국이 해방조선의 문제를 유엔의 테이블에 상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필요 없다고 하지만 지금 한국의 현대사를 돌이켜 볼 때 건준의 좌절, 좌우합작의 실패는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몽양 선생이 추진한 좌우합작이 성공했더라면 이승만, 메논(Menon, Vengalil Krishnan Krishna, 1897.5.3~1974.10.6), 모윤숙 등이 주도한 5∙10 단독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건준이 민족의 힘을 아울렀다면 6∙25 전쟁은 터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몽양 선생은 백주의 거리에서 암살당했고, 그의 이름은 서서히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1989년 4월 2일. 문익환 목사와 정경모 선생의 평양방문과 4∙2 남북 공동 성명서 발표와 더불어 이를 토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6∙15 선언이 이루어지고 이데올로기의 냉전에서 벗어나 남과 북이 화해의 분위기로 접어드는 이 시기에 몽양은 어둠 속에서 부활했다.

▲ 해방기의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 그의 정신은 해방 59년을 맞은 지금 비로소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고 보훈처가 이에 대해 공감을 표하고 있다. 이에 여운형 선생 역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선생을 민족지도자로서 재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신동진 감독 역시 그렇다. 몽양 선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한국과 일본, 중국 등을 다니며 자료조사를 하고 있는 신동진 감독이 9월 16일에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는 몽양 선생의 다큐멘터리를 왜 만들려고 하냐는 질문에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평가하기 위해서이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몽양 선생이 암살당한 후 공산주의자로 몰리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또 몽양 선생과 관계가 있거나 친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던 수많은 민족 운동가들이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과거 속에서 권력자들에 의해 지워지고 숨겨져야만 했던 진정한 민족주의자로서의 몽양 여운형 선생님의 역사적 흔적을 가감 없이 다루고 싶다."

신 감독은 몽양 선생이 일본 도쿄에 와 육군성 병무국장 다나카 다카요시 소장과 전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를 만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의 자료를 뒤지면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몽양의 자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9월 18일 가장 먼저 도쿄 근교에 거주 중인 몽양 선생의 6촌 동생 여운각 선생을 같이 만날 수 있었다. 그 시절(해방기) 가장 가까이 선생을 모셨던 여운각 선생은 지금도 몽양 선생의 사진과 여러 자료 등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계셨다.

몽양 선생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 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 "지금부터 30년쯤 전에 지인으로부터 고마신사를 방문한 몽양선생의 친필 서명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글을 남기신 사진을 본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귀가 번쩍 뜨였다.

고마신사(高麗神社)는 일본 사이타마 현에 위치한 고려왕 약광(高麗王 若光)을 모시는 신사(神社)이다. 1300년 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왕족과 귀족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도착하여 '고려'라는 나라이름을 성씨로 삼은 고마가(高麗家)가 현재까지 60대를 이어오고 있는 곳이 바로 ‘고마신사’이다.

신사 중에서도 정치, 나라운세 등에 관련된 것을 기원하는 곳이라 일본의 정치인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도 유명한 고마신사. 입구에는 나카소네, 다나까 전 총리 등이 기념식수한 나무들이 울창하다.

▲ 1941년 6월 일본의 고마신사를 방문한 여운형 선생의 방명록 글씨.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血濃於水’ 속에서 그의 의지와 사상이 엿보인다.
아무튼 일본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고구려 민족의 터전인 이곳 고마신사에 1941년 여운형 선생이 다녀가셨다니 그 곳을 방문하면 분명 몽양 선생의 친필 서명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으로 여운각 선생을 모시고 9월 19일 고마신사를 방문하였다.

미리 고마신사에 연락을 하여 방문의 목적과 취지를 설명하고 몽양 선생의 6촌과 함께 가겠으니 협조를 부탁한다는 내용을 전해 놓은 터였다. 오전 11시쯤 고마신사에 도착하니 마침 일요일이라 많은 관광객으로 붐볐다. 접수처에서 예약 확인을 하고 우리는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잠시 후 고구려 왕족 약광의 60대 후손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낡은 방명록이 들려 있었다. 고마 후미야스는 '이것이 몽양 선생이 방문하실 그 당시의 방명록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몽양 선생의 서명을 찾아보겠습니다. 1941년의 방문이셨으므로…'라며 방명록을 펼쳤고 그 손길을 좇는 여운각 선생의 눈빛은 초조하기만 하였다.

앞에서부터 훑어 내려가던 고마 후미야스가 “아, 여기에 있네요”라는 말과 함께 방명록이 여운각 선생에게 전해지자 마치 생전의 몽양 선생을 대하듯 소중하게 받아들고는 필체를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아, 제가 사진으로 본 바로 그 필체이군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

여운각 선생의 말씀에 이어 고마 후미야스는 “대단한 달필이며 멋진 필체입니다, 여운형 선생의 친필로 된 문서는 저도 처음 봅니다”라며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 는 글에 대해 여운각 선생은 “나라 잃은 국민들에게 민족애를 부각시키는 가장 함축된 의미로 가슴에 다가온다”고 소감을 말하였다.

고마 후미야스의 설명에 의하면 해방 전 이 고마신사에는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정치가들이 많이 찾아서 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으며 당시에는 길이 험하여 이곳에 오면 하룻밤을 묵어가야 했다고 한다.

1941년 6월 26일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며 이곳 고마신사에 들린 몽양 여운형 선생. 그날 밤 지인들과 밤새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고마 후미야스의 말에 의하면 방문 당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지만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일본 식민지 때에 새로운 정치 세상을 위해 노력을 하신 분이고 조선의 애국자라는 말을 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필자 역시 몽양 선생의 친필을 마주하니 1940년 일본천황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조선민족을 없애지는 못한다!”는 일갈로 좌중을 압도했던 늠름한 몽양 선생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긴 터널과도 같았던 군사독재정부가 사라지고 문민정부가 기틀을 다지고 있는 이 즈음, 현대사의 재조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 시대. 해방공간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였던 몽양 여운형 선생.

그의 ‘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다시 소리 내어 읽으니 새삼스레 가슴이 뜨거워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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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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