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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차남 한웅의 결혼식 때 한복을 차려입은 최남선의 모습. 당시 최남선은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사학자·문필가·출판인 등으로 알려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그를 ‘역사의 저울’에 달면 공(功)으로 기울까, 아니면 과(過)로 기울까?

공과(功過)가 교차되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참으로 어렵다. 견해나 입장에 따라 한 쪽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이다. 육당 최남선(1890∼1957년)이 바로 그런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육당은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新文館)을 설립, 계몽도서를 출판하였다. 또 이듬해에는 종합잡지 『소년(少年)』을 창간, 창간호에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게재한 사실은 우리 문화사 첫 페이지에 기록돼 있다. 70이 안 되는 생애를 살다간 그가 우리 문화사에 남긴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공과' 교차되는 육당

육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민족적 면모는 그가 3·1의거 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실이다. 문체를 두고 지나치게 나약하다거나 한문투라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지만 그는 이 일로 31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받은 건국훈장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친일파 중에는 초창기 민족진영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일제 말기에 가서 친일로 변절한 사람이 상당수 있다. 그러나 육당은 사정이 다르다. 1921년 10월 가출옥으로 석방된 그는 출옥 직후부터 일제와 ‘교감’을 하고 지냈다.

출옥 이듬해 그는 16년간 운영해온 신문관을 그만두고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창간하였는데 창간과정에서부터 일본측 인사로부터 도움을 받은 구석이 역력하다. 출옥 후 육당이 일본인 거물인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편지는 필자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입수, 첫 공개한 것이다.)

“…잡지는 ‘동명(東明)’이라는 이름으로 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잡지건은 진력한 성과가 가까운 시일 안에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금후의 처분은 모든 것을 하나로 하여 선생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육당이 쓴 건지 의심가는 편지

특히 이 편지의 첫부분과 끝부분을 보면 정말 이 편지를 육당이 쓴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다.

“지난날 (선생께서) 경성(京城, 서울)을 출발하실 때 부친과 함께 역까지 달려갔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정각에 늦어 실례가 많았습니다. ……우선 보고(報告)를 드리면서 이것으로 붓을 놓겠습니다. ”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사이토(齋藤實) 총독의 정치참모이자 총독부 일어판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의 사장을 지낸 아베(阿部充家)였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애국지사 육당 최남선의 면모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3·1의거가 발생한 지 불과 2년 9개월 만의 일이다.

육당이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한 것은 1928년 10월 총독부의 역사왜곡기관인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위원직을 수락하면서부터다. 조선사편수회는 1911년 총독부가 ‘구습(舊習)제도의 조사와 조선사 편찬계획’을 목표로 발족한 단체.

본래목적은 조선을 영구히 강점하기 위해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한다는 ‘동화주의(同化主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편찬하려는 조선사는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 왜곡이 주목적이었다. 육당은 편수위원으로 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실무자로서 직접 편찬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928∼1936년).

총독 측근에게 감사편지 보낸 '민족대표' 3.1의거사건으로 투옥된 최남선이 가출옥으로 석방된 뒤 사이토 조선총독의 정치참모 아베에게 보낸 서한. 최남선이 <동명>을 창간하면서 아베의 도움을 받은 사실이 이 편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끝부분의 '무불선생'은 아베를 지칭한 것이다. 편지 내용 가운데는 최린, 이광수 등 낯익은 이름들도 들어 있다.
ⓒ 일본 국회도서관

이밖에도 그는 총독부가 위촉하는 여러 가지 위원직을 수락, 일제당국에 협조하였는데 이 공로로 그는 중추원참의(주임관대우·1936년 6월∼1938년 3월)를 지냈다.

육당의 대표적인 친일행적 중의 하나는 만주에서 있었다. 중추원참의를 물러난 직후인 1938년 4월 그는 만주행에 올랐다. 처음 맡은 직책은 만주의 친일지 『만몽일보(滿蒙日報)』의 고문 자리. 원래 이 자리는 진학문(秦學文)이 있던 자리였는데 진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다.

정인보 “이제 우리 육당이 죽고야 말았다” 대성통곡

1년 뒤 그는 다시 만주국의 엘리트 양성기관인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부임하였다. 대우는 칙임(勅任)교수에 월급은 4∼5백 원으로 최상급이었다(『삼천리』 1938년 5월호).

사학자로 육당과는 절친한 친구였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그의 집 대문 앞에 술을 부어놓고 “이제 우리 육당이 죽고야 말았다”며 대성통곡을 한 것은 그가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한 것을 두고 한 것이었다. 육당은 이 대학 예과에서 만몽(滿蒙)문화사를 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건국대학 교수 재직중 그는 1940년 10월에 조직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이 단체는 일본 관동군의 반공·선무(宣撫)공작을 지원한 친일단체로 독립군과 항일빨치산을 상대로 한 귀순공작이 주임무였다. 이 단체의 총무 박석윤(朴錫胤)은 육당과는 처남-매부간으로 그는 나중에 만주국 외교부 조사처장, 『매일신보』 부사장 등을 지냈다.

그의 친일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됐다. 4년 7개월간의 만주생활을 청산하고 1942년 11월 귀국한 그는 칩거하면서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이듬해 말 그는 총독부 당국의 부탁으로 이광수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훗날 그는 자신의 학병권유가 마치 조국의 광복을 대비하여 ‘민족 기간요원 양성’을 위한 행위였던 것처럼 변명하고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다. 속으로는 일제패망을 확신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그는 일제의 필승을 장담하면서 대일본제국의 성전(聖戰)을 위해 조선 청년들이 전쟁터로 나가 죽어야 한다고 공언하였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그는 학병권유를 한 반면 그의 3남은 그와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경도(京都)상고 출신으로 도쿄(東京)제대 법학부에 재학중이던 그의 3남 한검(漢儉. 1922∼?)은 학병 출진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문학대학·김일성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그는 부친의 친일행적 때문에 적잖은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북한 고위직출신 신 아무개씨 증언)

▲ 육당 최남선이 1941년~1952년까지 거주했던 (素園). 서울 강북구 우이동 5-1번지에 소재했던 이 건물은 지난해 초 개발을 위해 철거됐다.
ⓒ 권기봉

1949년 1월 초부터 반민족행위자 검거에 나선 반민특위는 2월 들어 문화계 인사를 손대기 시작했다. 2월 7일 마침내 그의 우이동 집에 특위 조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자택에서 ‘조선역사사전’의 원고를 집필중이던 그는 “시대적 현실을 역행할 수 없다”며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같은 날 세검정에서는 춘원 이광수가 특위에 체포됐다. 일제하 문화계의 양대 거물이었던 두 사람이 ‘역사법정’에 끌려나온 것이다.

끝까지 '변절' 사과않고 궤변 늘어놓아

마포형무소 수감시절 그는 「자열서(自列書)」라는 일종의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내가 변절한 대목, 즉 왕년에 신변의 핍박한 사정이 지조냐 학식이냐의 양자 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아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며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도 내가 잘 안다…”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학문을 위해 지조를 버렸다. 이 선택을 그는 ‘변절’이 아닌 ‘방향전환’이라고 했다. 명색이 학자를 자처한 그가 지조와 학식을 별개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가 지조 있는 지식인이 되어줄 것을 기대한 자체가 조선동포들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산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전옥(典獄, 교도소장)이 육당이 쓴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갖고 와서는 읽고 감상문을 쓰라고 했다. 심산은 첫 몇 장을 읽고는 책을 전옥에게 던지며 이렇게 호통쳤다.

“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남선(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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