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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즉시 이뤄졌어야할 친일청산은 우리에게 좌절의 역사로 기록돼 있다. 친일파들의 방해로 제대로 반민족행위자 수사 한번 못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중도에 해산되고 말았다.

▲ 前반민특위 조사관 정철용(鄭澈溶)옹
ⓒ 이재선
제헌국회에서 못다한 '밀린 숙제'를 17대 국회가 하겠노라고 내놓은 것이 열린우리당이 최근 국회에 제출한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개정법률안>이다. 이를 두고 현재 한나라당은 야당탄압, 정치보복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 제헌국회가 구성한 반민특위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한 정철용(79) 선생을 만나 이 시점에서의 친일청산의 의의와 과제 등에 대해 얘기를 들어보았다.

정 선생은 최근 열린우리당에서 친일청산규명특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사실에 대해 "보도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며 "친일진상규명 작업은 일제하 친일혐의자의 행적을 사실대로 규명하자는 것으로 결코 정치공세가 아니다"고 말했다.

정 선생은 이어 "36년간의 점령기간에 대한 청산이 1년도 못되어 끝나고 말았으니 무슨 청산이 되었겠느냐"며 "이번만큼은 제대로 진상을 규명해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일제강점기가 36년 간 지속되었음에도 나라를 판 혐의로 처벌받은 부역자 중 체형 이상의 처벌을 받은 자는 고작 14명에 불과했다. 일제 강점 36년 간 이 땅에는 온통 독립운동가가 넘쳐났다는 것인가?

해방후 친일파 청산을 통한 민족정기 확립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가지고 출범한 반민특위는 그 명성과는 달리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친일파들의 방해책동으로 49년 8월말로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반민특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은 거의 타계했다. 지난 16일 충북 청주로 정 선생을 찾아가 반민특위 시절의 활약상과 17대 국회에서의 친일청산 과제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친일은 정치공세 아닌 역사의 사실 규명 작업

- 반민특위에 참여하기까지의 간단한 경과를 말씀해주시지요.
“내가 반민특위에 참여한 것은 46년 8월경입니다. 당시 제헌의회 국회의원이던 박유경씨가 주선을 해주신 겁니다.”

- 반민특위 참여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
“44년에 청주상고를 졸업하고, 학도병 갔다가 도망 나와서 잡혀 용산에 있는 일본군 20사단에 끌려갔습니다.”

- 해방 직후 직장에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뒤 그 악명 높던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을 미군정이 new korea company 즉 신한공사라고 개명해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회사의 대전지점에서 근무하다가 반민특위에 참여했습니다.”

- 춘원 이광수를 직접 연행하셨나요?
“그렇습니다. 49년 2월경으로 기억합니다. 세검정에 있는 춘원 집으로 체포영장을 소지하고 찾아갔습니다.”

- 그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춘원하면 우리 조선이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분 아닙니까? 그런 분을 체포하는 일이었기에 매우 긴장되었죠.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시지요.
“나와 특경대원 두 명 그리고 조사관 동료 한 사람이 찾아갔습니다. 마침 춘원과 부인 허영숙 여사도 계셨는데, 춘원은 각오를 하고 계셨는지 담담한 표정이었습니다.”

- 혹시 춘원과 대화는 해보셨는지요?
“대화라기보다는…. 당시 조선에서는 박흥식(화신 백화점 사장), 김성수(동아일보 사주), 춘원 이광수 정도가 널리 알려졌을 따름입니다. 게다가 춘원의 명성은 그야말로 대단했죠. 그래서 호기심 반 떨리는 마음 반으로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내 나이 25세였으니까 얼마나 흥분됐겠습니까?”

춘원(春園)의 변심보고 크게 실망

- 어떤 내용이었나요?
“내가 ‘선생님 같은 분이 왜 내선일체론을 주창하셨느냐?, 왜 학병참여를 촉구하셨느냐’ 하고 물었지요. 당시 춘원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으니까요.”

- 무어라고 하시던가요?
“허허…. 그게 참, 한참 묵묵부답이시다가. 오히려 내게 묻더군요. 해방이 1년만 늦게 되었어도 조선이 어떻게 되었겠느냐고요. ‘아마 모두가 황국신민이 되었을 것이요. 조선에 창씨개명 안한 사람이 있소? 아마 모두 일본사람이 되었을 것이요’라고 하더라고요. 그 소리를 들으니 어이가 없어서 “그러면 선생님(정옹은 춘원을 시종일관 선생님으로 호칭하셨다.)께서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묵묵부답이더라고요.”

- 의외라고 여기셨겠네요.
“그렇지요. 춘원이 친일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마도 강압에 의해서였거나 아니면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쯤 반성하고 있겠지 했는데, 대답이 너무 의외여서 놀랐습니다. 춘원 선생님이 이렇게 변하셨구나. 결국 지조를 꺾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군부 내 친일문제도 조사하셨다고요.
“조사랄 것까지는 없고 다만 그 당시 특위에서 군부 내 친일인사를 파악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 파악은 하셨나요?
“남산에 있던 헌병사령부로 찾아갔지요. 전봉덕 부사령관을 만나 찾아온 용건을 설명하고, 군부 내에 있는 친일장교 명단을 작성해줄 것을 요구했지요. 당시 어린 내 생각에도 학도병은 강제로 끌려갔겠지만, 장교 급들은 자진해서 친일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잘 되셨나요.
“참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나에게 일장훈계를 하더라고요.”

- 뭐라고요?
“나라가 있어야 친일행위를 단죄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

- 그게 무슨 소린가요?
“당시 남한에서는 좌우대립이 격화되었는데…. 일단 공산당과 싸워서 이겨야 할 것 아니냐?뭐! 이런 논리였습니다.”

- 공산당을 꼭 친일파가 잡아야 하나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나라 팔아먹은 자들이 무슨 나라 걱정이냐고? 왜 일제 때는 나라 지킬 생각 안하고, 공산당이 나오니까 나라 지킨다고 호들갑이냐? 당신들은 나라 걱정할 자격도 없다고 말입니다.”

- 뭐라고 하던가요?
“내가 만난 전봉덕 헌병부사령관은 자신이 일본 고등고시 합격자로 경시 출신이라고 하더라구요. 일제 시대 경시면 엄청 고위직이죠. 이런 사람에게 친일장교 명단을 내 놓으라 말라 논의하니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결국 허탕치고 말았죠. 이런 친일인사들이 해방 후 정부 고위직에 있었으니…. 애당초 친일청산이란 공염불에 불과한 거죠.”

49년 6월 6일에는 무슨 일이?

- 반민특위가 친일파 경찰 수뇌부에게 강제 무장해제 당했다면서요?
“우리는 6·6사건이라고 부르는데,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피를 토할 심정입니다.”

- 사건 경위를 말씀해주시지요.
“1949년 6월 6일에 생긴 일입니다. 지금의 을지로 국민은행 자리에 반민특위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니 평소 못 보던 경찰들이 사무실 앞에 있더군요. 별 생각없이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경찰이 갑자기 옆구리에 기관총을 들이대면서 무기, 신분증 등을 빼앗고 뒷마당으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는 먼저 출근한 동료들이 뒷머리에 손을 대고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검찰총장(특별검사부장)이던 권승렬씨도 무릎 꿇고 있었습니다.”

- 도저히 믿기지가 안네요.
“나도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권승렬 총장 건도 사실이구요. 이 일은 너무나 치욕적이라 다들 쉬쉬해왔지요. 오전 10시쯤 되자 우리들은 풀어주고 특경대원들만 경찰서로 연행해갔습니다.”

- 누구의 지시였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시 경찰은 중부서장 윤기병이 지휘했지만 윤기병은 내무차관이던 장경근의 실제 지휘를 받았다고 합니다. 장경근이가 누굽니까? 그는 일제 고등계 경시출신 친일파 아닙니까? 그러나 장경근 선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자는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얼마 후 대통령 자신이 직접 지시한 일이라고 담화까지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 그 뒤로 어떻게 되었나요?
“이 사건을 계기로 반민특위는 마비상태가 되었습니다. 반민특위의 무장병력인 특경대가 무장해제 당했으니, 특위자체가 힘이 빠져 버린 거지요. 그러다가 1949년 7월 6일 반민특위개정법안이 통과되어 사실상 특위는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 황당하네요.
“36년의 점령기간에 대한 청산이 1년도 못되어 끝나고 말았으니 무슨 청산이 되었겠습니까? 참으로 비통할 따름입니다.”

- 얼마 전 열린우리당에서 친일진상규명에 관한 법률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보도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친일진상규명이란 작업은 결코 정치문제가 아닙니다. 일제시대 친일혐의자의 행적을 사실대로 규명하자는 것이 왜 정치공세입니까? 이번만큼은 제대로 진상을 규명해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합니다.”

두어 시간에 걸친 대화가 끝났다. 대화 후에 기자는 정철용 옹과 반민특위 활동을 결산하면서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친일파가 누구던가. 나라를 팔아 호위호식한 자들 아니던가? 저들이 신생독립국의 권력을 다시 잡아 오히려 독립투사를 탄압하고, 역사를 왜곡시켜 온 것이 한국 현대사 아니었던가?

아직도 저들에게 역사의 단죄를 내릴 수 없는 이 땅의 현실이 서글프다. 친일의 골이 넓고도 깊은 까닭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친일은 반드시 청산되어야 하고 단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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