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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 선우 순이 작성한 정세보고서 3.1의거 직후 조선내 민심현황과 향후 총독부 당국의 수습책 등이 자세히 담겨 있다. 선우 순은 전형적인 직업적 친일분자로 이같은 정보보고 대가로 총독부로부터 거액의 기밀비를 받곤 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야 한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는 한국 관련 자료가 도처에 산재해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외무성사료관 등 공공기관을 비롯해 학습원대학의 동양문화센터와 도쿄(東京)·와세다대학의 도서관과 기타 역사적 인물들의 개인기념관에 산재한 자료 등.

여기에는 공문서를 비롯해 일제 당시 실력자들간에 주고받은 문건, 편지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한국에서는 전혀 구경할 수 없는 자료들도 상당수 있다. 친일파에 관한 자료 역시 상당수 포함돼 있다.

수 년전 필자는 취재 및 자료수집차 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에서 <사이토(齋藤實)문서>(제2·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재임시절에 수집한 문서)를 검색하다가 3·1만세의거 직후 조선인 밀정이 작성한 정세보고서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은 「朝鮮ノ最近ト對應策(조선의 최근과 대응책)」. 작성자는 ‘조선평양(朝鮮平壤)’ 출신의 ‘선우 순(鮮于 순)’이었다.

와세다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조선인 밀정의 정세보고서

총 40쪽 규모의 이 정세보고서는 3·1의거 직후 조선 내 각 지역·종교세력간의 움직임과 이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임시·영구대책을 상세히 언급한 것으로 전적으로 총독부 당국을 위해 작성한 것이었다. 밀정 중에서도 ‘먹물’을 먹은 고급밀정의 ‘작품’인 셈이다.

▲ '밀정'을 지낸 직업적 친일분자 선우순.
선우순(鮮于순, 1891∼1933년).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일제하 몇 안 되는 대표적인 ‘직업적 친일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직업이 ‘친일’이고 그걸로 일생을 먹고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동생도 그와 마찬가지로 친일 밀정노릇을 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두 형제가 일제의 주구노릇을 했으니 ‘형제는 용감했다’고나 할까.

선우순은 평양 태생이다. 1930년 당시 그가 중추원참의 시절에는 경성(京城, 현 서울)에 산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해당주소의 호적을 확인한 결과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인생의 말로는 친일파로 막을 내렸지만 초창기에는 그도 한때 민족진영에 섰던 인물로 보인다. 『서북학회월보』에 그가 쓴 글이 실려 있기도 하고 1931년에 출간된 『조선신사록(朝鮮紳士錄)』에는 그가 1907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자로 입사해 1910년 3월에 퇴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다른 자료들에서 크로스체크된 바는 없지만 크게 의심할 만한 내용도 아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계기로 친일파가 되었을까?

그가 친일대열로 전향한 것은 『대한매일신보』를 퇴사한 직후 일본인이 평양에서 발행하던 『평양신문(平壤新聞)』에 입사한 것이 한 계기가 된 듯하다. 1910년 11월 보성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12월 교토(京都)의 도지샤(同志社)대학 기독교신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대학은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전신인 일본기독전도회사의 의장인 니지마죠(新島襄)가 설립한 학교로 일본조합기독교회는 조선에 진출하여 종교침략에 앞장섰다.

이 단체는 일본당국과 재벌들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얻어 조선에서 대대적인 전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11년 7월 평양에 평양기성(箕城)교회를 세웠다. 선우순은 바로 이 교회를 다니면서 일본인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을 통해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것이다.

한 때 민족진영에 섰던 선우 순

한편 1915년 도지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양기성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일본인들과 함께 ‘배역유세단(排逆遊說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을 돌면서 조선인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그는 이 단체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해 9월 19일 중추원 회의장에서 개최된 지방유력자 모임에 참석해서는 ‘조선독립 불능론’을 강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일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그는 평안남도 지사 시노다(條田治策)의 사주·후원으로 1920년 10월 친일단체인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창설, 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단체는 평안도 일대의 독립사상을 파괴하려는 단체로써 평양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기관지로 『대동신보(대동신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평양에서는 월간지 『공영(共榮)』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매체들은 일선융화(日鮮融和)·공존공영(共存共榮)을 내걸고 선전하였는데 이는 일제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식민정책을 그가 나서서 대신 나팔을 불어준 셈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그는 “…이들(조선과 일본)은 이해관계가 공통(共通)하고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이므로 내선인(內鮮人, 일본인과 한국인)이 마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혹은 웨일즈와 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대륙방면으로 발전하고 웅비하는 방법…”(『조선 및 조선민족』)이라며 일제의 충실한 대변자역을 자임하였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1920년 11월 평양부 협의회원(현 시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듬해에는 다시 중추원 참의(주임관대우)에 임명되었는데 1933년까지 13년간 5회 연속 중임하였다. 일개 전도사로 출발해 이 정도 대열에 오른 경우로는 그가 유일하다.

당시 그의 친일활동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그가 조선총독을 면담한 횟수를 보면 짐작이 간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1919년 8월부터 1926년 사이에 그가 사이토 총독을 면담한 횟수는 무려 119회나 된다(강동진姜東鎭,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평균해서 22일마다 1회꼴인데 이 수치는 같은 기간에 매국노 송병준(宋秉畯)이 사이토를 면담한 횟수(58회)의 두 배를 웃도는 수치다.

상하이 임시정부서 '칠가살' 대상자로 지목

당시 그는 고급관료나 친일귀족도 아니었을 뿐더러 중추원 참의 70명 가운데서도 66번째 차순이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독의 집무실과 관저를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의 친일의 정도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아래 박스기사 참조)

그의 명성(?)은 상하이 임시정부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당시 임정에서는 일본인 고위관료·매국적(賊)·고등밀정·친일부호·총독부관리·독립군 사칭 불량배·모반자 등을 ‘칠가살’(七可殺, 처단해야 할 일곱 부류의 집단)로 규정, 처단대상자로 지목하고 있었는데 ‘매국적’의 첫머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와 함께 대표적인 직업적 친일분자였던 민원식(閔元植)이 일본 도쿄에서 민족청년 양근환(梁槿煥)에게 처단된 것은 임정의 이 같은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선우 순의 동생은 선우 갑(鮮于 甲, 생몰미상) 역시 그 형에 못지않은 악질적인 친일분자였다. 그는 일본 경시청 고등계 형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유학생 감시역을 하였는데 2·8독립선언 당시 현장에서 일본 경찰들에게 중심인물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체포하게 한 자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직후에는 기자 직함을 가지고 미국에 파견돼 일본을 선전하였으며 재미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기도 했다. 형제가 나란히 일제의 충견(忠犬)으로 활동한 셈이다.

같은 선우(鮮于) 성(姓)을 가진 사람 중에는 이들과는 정반대로 형제가 나란히 독립운동을 한 사례도 있다. 선우 혁(鮮于 赫)·선우 훈(鮮于 燻) 형제가 그들로 모두 임정에 관여하였다.

이들 두 형제는 모두 평안도 출신으로 동시대를 살다가 갔다. 민족의 수난기에 어느 형제가 올바른 삶을 살았는지는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천년이 가도 퇴색되지 않을 민족사의 한 페이지에 흑(黑)과 백(白)으로.

'밀정' 선우 순 1위...친일 관료-조선 귀족-친일자본가 등
[조선인 가운데 조선총독을 자주 만난 사람들은 누구?]

일제시대에 조선인 중에서 총독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총독부의 고위관료나 군 수뇌부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더러 위무(慰撫)나 회유 차원에서 총독이 조선인 유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역대 조선총독 중에서 조선인과 자주 면회를 가진 사람은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였다. 사이토는 3·1만세의거 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총독에 부임한 이래 1919년 8월부터 1926년 말까지 총 839명의 조선인을 만난 것으로 나와 있다(강동진,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이들 가운데 사이토를 가장 많이 면회한 인사 10명을 꼽아보면, 선우 순(119회), 이진호(李軫鎬. 86회), 이강 공(李堈公. 85회), 이왕(李王. 순종, 75회), 한상룡(韓相龍. 73회), 민흥식(閔興植. 59회), 송병준(宋秉畯. 58회), 신석린(申錫麟. 53회), 방태영(方台榮. 51회), 박영효(朴泳孝. 47회) 등이다.

왕족인 이강 공이나 이왕(순종)의 경우 총독의 문안인사나 공식행사장에서의 접견 등이 감안된 것이다. 그외 나머지 인사들들은 모두 친일관료(이진호, 총독부 학무국장)나 조선귀족(송병준·박영효)·친일자본가(한상룡) 등이었다.

이들 중에서 선우순·민흥식·방태영은 ‘직업적 친일분자’에 속한다. 이들은 사회적 직위에 관계 없이 총독을 수시로 만나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기밀비조로 금전을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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