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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여류문인 '허초희'(1563, 호 난설헌)를 만나는 축제가 강릉 초당마을 허난설헌 생가터에서 한국여성의전화 연합과 강릉여성의 전화 주관으로 10일과 11일 이틀간 열린다.

▲ 허난설헌의 초상화(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난설헌시사랑
올해로 두 회를 맞는 '허난설헌 여성문화축제'는 선각자인 동시에 사상가로도 평가받는 허난설헌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양성평등 의식의 고취와 한국적 여성모델을 발굴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여성문화축제는 문학캠프, 전국 시낭송대회, 여류작가 초대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 속에서 허난설헌을 만나게 된다. 특히 첫날 심포지엄에선 '평전 허난설헌'의 김성남 작가와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김정희 교수 등 문학과 여성학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패널들이 억압된 사회환경 속에서 여성으로서 표출된 허난설헌의 예술적 자아를 조명하게 된다.

이밖에 페미니스트 가수 안혜경씨의 노래 '불꽃 난설헌'과 물체극 장르를 개척한 이영란 작가의 모놀로그를 통해서 이 땅의 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허초희(許楚姬, 1563∼1589)

난설헌(蘭雪軒)은 호, 자는 경번(景樊)이다.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여덟살 때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다.

당대 석학인 아버지 허엽과 오라버니,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 너머로 글을 익혔으며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213수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으며 동생인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난설헌의 시를 넘겨주어 1608년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었다. 그 후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격찬을 받아 당대의 세계적인 여류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세(1563, 명종18년) :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중 셋째 딸로 출생.
8세(1570, 선조3년) :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으며 뒷날 주옥같은 시 213수를 남겼다.
15세(1577, 선조10년) : 난설헌은 이 때 서당 김성립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
23세(1585, 선조17년) :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 <몽유광산산>를 지었다.
27세(1589, 선조21년) : 짧은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혔다.
1590년(선조23) : 이 해 11월 남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1592년(선조25) :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쟁중에 싸우다가 죽었다.
1598년(선조31) : 이 해 봄 정유재란때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보여주었다. 이 시가 <조선시선> <열조시선>등에 실렸다.
1606년(선조39년) : 허균은 이 해 3월 27일 중국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모아서 전해줘 <난설헌집>은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선조40년) : 이 해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난설헌집의 발문은 태안 피향당에서 지었다.
1711년 :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하여 <난설헌집>이 간행되었다.
38세(1606, 선조39년) :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줌.
1913년 : 이 해 1월 10일 허경란이 난설헌의 시를 읽고 감화받아 자신이 소설헌이라고 칭하며 시를 지은 <소설헌집>이 활자본으로 신해음사에서 출판되었다.

-자료출처: (사) 허균. 허난설헌 선양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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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강원정치 대표기자, 2024년 3월 창간한 강원 최초·유일의 정치전문웹진 www.gangwoninnews.com ▲18년간(2006~2023) 뉴시스 취재·사진기자 ▲2004년 오마이뉴스 총선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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