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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국가보안법 제 1조)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 국가보안법은 역설적이게도 제정 당시부터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56년 동안 시행해오는 과정에서 존폐의 갈림길을 두고 수많은 논란을 유발했다. 또 현재도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자유 확보'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나라 안팎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국가보안법보다 반공법이 두 배 이상 적용돼

▲ 신학철씨의 그림 반환을 촉구하며 열린 전시회
ⓒ 국가인권위 김윤섭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는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1948년 12월 1일 제정부터 2003년에 이르기까지 국가보안법 적용상에 나타난 인권실태를 조사했다.

이번 조사는 국가보안법 시기별 적용사, 적용실태를 중심으로 살펴본 국가보안법과 인권, 국가보안법 적용기관의 실태와 문제점, 국가보안법 적용절차에서 나타난 인권실태, 국가보안법 적용사 등 모두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실시했다. 또 헌법과 국제인권규약에서 제시하는 인권의 기준과 비교하여 그 구체적인 적용실태를 살폈다.

국가보안법은 제정된 이래 현재까지 일곱 차례 개정됐다. 이 법이 제정된 당시는 식민지를 갓 벗어난 상태로 극단적인 좌우대립이 심했고 건국 당시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한시적인 목적으로 제정됐다. 제정 국가보안법은 모두 6개 조문에 불과했으며, 특히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거나 가입하는 행위를 직접적인 처벌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란상태가 끝나고 좌익관련 조직이 거의 궤멸된 이후에도 국가보안법은 일곱 차례 개정을 통해 더욱 강화됐다. 국제연합 조선위원단의 보고에 의하면 이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의해 1949년 한 해 동안만도 11만8621명이 검거·투옥되었고 같은해 9∼10월에 132개 정당·사회단체가 해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국가보안법 제정 시기 적용사건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정부의 통계는 1961년 이후부터 나타나는데(법원행정처 발간 <사법연감>), 1961년부터 2002년까지 최소한 1만3178명이 국가보안법(반공법 포함) 위반으로 기소,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특징은 반공법이 제정된 1961년부터 폐지(국가보안법에 흡수 통합됨)된 1980년까지는 국가보안법보다 반공법이 평균 두 배 이상 더 많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반공법 제4조(찬양·고무)의 남용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반공법 제4조는 당시 국가보안법에는 없던 조항으로 찬양·고무·동조행위에 어떤 목적이 필요하지 않았고, 다만 반국가단체에 이로운 결과만 초래하면 처벌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술자리에서 말한 사소한 농담이나 경찰관과 다툼에서 생긴 언동 등에 대해서도 '북한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한다는 이유로 구속당하는 사례가 빚어졌다. 이로 인해 막걸리 반공법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또 국가보안법 적용인원이 증가된 시기를 살펴보면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69년 삼선개헌과 1971년 대통령선거, 1972년 유신헌법 제정시기가 그러했다.

한편 1980년 12월 30일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반공법을 폐지하고 국가보안법을 전면 개정(6차 개정)했다. 이를 통해 반공법상 찬양·고무 조항 등은 개정 국가보안법에 흡수되었으며 각 조항별 형량은 상향 조정되었고 처벌 범위도 확대됐다. 따라서 1980년대는 국가보안법 시대라고 불릴 만큼 국가보안법 적용이 잦았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일시적으로 구속 기소자가 줄어 들기도 하였으나 1997년 한 해 동안 기소인원 633명으로 1961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러한 적용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점차 낮아지기 시작하여 2000년에는 196명이라는 낮은 수치를 나타냈으며 이러한 양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안수사기구 확대와 국보법 사범의 상관성

이 통계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국가보안법 적용 인원의 급증시기가 공안수사기구의 확대시기와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가령 5공화국 중반기인 1985년의 국보법 기소자는 176명인데 반해 1986년 318명, 1987년 432명으로 두 배 가량 증가했다.

그런데 1986년은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부가 두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을 통해 대공 부서를 수사6과까지 확대한 시기다. 검찰 역시 1986년 대검찰청 공안부에 공안3과와 4과를 확대 증설하였다. 또 1989년과 1990년에 수치가 급증하는데 이는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을 계기로 설치한 공안합동수사본부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이 기간 동안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낸 1997년 국가보안법 구속기소자 급증현상은 바로 1996년 보안역량 강화 계획에 따른 경찰의 보안수사대 증설과 대검 공안부가 주도한 한총련좌익합동수사본부 설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가보안법 위반자 가운데는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 위반으로 인한 구속 비율이 점차 증가한다. 가령 김영삼 정부에서 7조 위반 구속자는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의 90.1%인 1791명으로 조사되었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구속자의 91.8%가 7조를 위반한 구속자로 조사되었다.

반공법에 뿌리를 둔 7조는 법 자체의 모호성과 그로 인한 적용기관의 자의적인 법 적용 가능성 등으로 국가보안법 남용시비를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되어 왔다. 유엔인권위원회, 유엔인권이사회 등 국제사회에서도 거듭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7조에 대한 적용 비율이 점차 높아 가는 현상은 국가보안법이 국가 안보보다 정부 비판세력을 겨냥한 법이라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인권에 관한 실질적 의미의 헌법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사례를 살펴보면 장관, 국회의원, 대학총장, 공안검사를 비롯해 노동자와 일반 서민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이 법에 따라 처벌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변호사의 변론, 신문기사, 그림, 영화, 소설, 심지어는 취중농담까지 이 법으로 단죄되었다.

국가보안법은 법 제정 이후부터 현재까지 적용과정에서 영장 없는 불법체포 및 구금, 고문수사, 사형과 의문사, 장기구금 등 신체의 자유를 침해해 왔다는 시비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1990년대 이후 점차 개선되기도 했지만 체포, 연행과정에서 인권침해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인신구속을 통제하기 위한 영장주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들에서는 종종 예외여서 인권침해 가능성을 높였다. 이러한 불법구금은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구속기소할 물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자백을 손쉽게 받아 내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 국가인권위는 5월 20일 '국가보안법, 쟁점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공청회를 열었다
ⓒ 국가인권위 김윤섭
또 변호인의 접견교통권 등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밀실에서 장기간 억류해 고문 등 강압적인 수사를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고문수사 관행은 사법부가 고문수사에 의한 거짓자백이라는 피고인의 호소는 무시한 채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채택하거나, 고문 논란에 대해 진상 규명을 하지 않은 데다 수사기관 종사자들의 인권의식이 부재해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는 일반 형사사건에 비해 사형과 무기 등 중형 선고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번 조사 결과 1968년부터 1990년까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사건의 1심 사형선고 인원은 122명으로 같은 기간 전체 사형선고 인원 593명의 20.6%를 차지했다.

특히 대법원 선고 다음날 8명이 사형당한 1972년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이 법의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 외에도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망한 최종길 교수, 1989년 조선대 교지 편집장 이철규씨의 죽음까지 각종 의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국가보안법 수감자에 대한 강제 전향 공작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 또는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70여 명에 이른다는 증언도 있다. 또 국가보안법 위반 수형자 가운데는 장기구금 복역자가 다수 발생하였는데 30년 이상 복역한 장기수만도 33명으로 조사되었다.

이번 실태조사 결과 국가보안법 수사기관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의 원인으로 국가보안법상의 상금(21조), 보조금(22조) 조항, 특진제 편중, 공안 관련 분야의 과도한 인력배치 등 제도 요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인권 보장의 최후 보루로 불리는 사법부가 수사기관들의 위법 행위를 파헤쳐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고 노력히기보다는 인권침해 논란에 침묵해 온 것도 인권침해의 원인이 되었다.

국가보안법 적용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는 국가보안법 관련 당사자가 당하는 피해로 끝나지 않고 시민 인권에 앞서 국가 안보를 더 우선시 해 온 '국가보안법 현상'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켰다.

'국가보안법 현상'은 법률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고 전 국민적인 자기검열 통제 시스템으로 정착되면서 결국 시민들이 양심·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는 무엇보다 국가안보 논리에 무시당하고 침해당해 온 '인권'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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