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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 인디미디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을 한 거냐구?"

아연실색한 푸른 제복의 스위스인 경찰이 질문인지, 비명인지 마땅히 대상도 없는 혼잣말을 되뇐다. 연신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다.

죽은 것일까? 방금 자신의 손으로 성가신 밧줄을 잘랐을 뿐인데, 그런데 저 아래에 사람이 떨어져 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G8 항의 시위대, 경찰이 밧줄 잘라 1인 추락 중상

▲ "여기서 멈추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두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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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1일, 스위스 오본느(Aubonne) 계곡에 위치한 오본느 고가도로.

프랑스 에비앙(Evian)에서 열리는 G8 정상회담에 참가하기 위한 공식 대표단이 스위스 로잔을 향해 출발하자 각각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일단의 대안세계주의 운동가들이 로잔으로 통하는 도로를 차단했다.

영국인 마틴 S.와 독일인 제신 W. 이 두 사람은 100m 길이의 밧줄 하나에 의지한 채 오본느 계곡의 고가도로를 가로질러 양 끝에 매달렸다.

그리고 나머지 운동가들은 플래카드를 이용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일렬로 죽 늘어서 몸으로 도로를 막아섰다. 세계적 환경 보호 단체인 그린피스의 시위 모습과 흡사한 장면이었다.

▲ 고가도로 양쪽으로 팽팽하게 걸쳐진 밧줄에 밝은 색의 천조각을 매달아 쉽게 눈에 띄었다
ⓒ 인디미디어
몇 분 후 스위스 경찰이 출동하기 전까지 시위는 완벽하게 준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문제의 경찰 등장.

시위대 대표의 항의를 묵살한 채 시위대를 현장에서 쫓아내기에 급급한 경찰은 어떠한 협상에도 응할 용의가 없어 보였다.

밀려드는 자동차 행렬을 잠시 멈춘 뒤, 경찰은 시위대를 도로 가장자리로 몰아냈고 이어서 자동차들을 밧줄 가까이까지 전진하도록 유도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시위대 몇몇은 경찰 지휘관에게 밧줄에 매달려 있는 두 사람의 생명이 위태하다고 호소하면서 잠시 실랑이가 오갔지만 경찰은 교통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단 한 번의 경고도 없이 밧줄을 '싹둑' 잘라버렸다.

▲ 플래카드를 걷어낸 경찰은 강제로 시위대를 끌어내기 시작(왼쪽)/밧줄을 지키기 위해 시위대가 즉흥적으로 인간 요철을 만들고 있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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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에 매달려 있던 마틴이 20m 낭떠러지 아래 얕은 강으로 추락하는 순간, 반대편에서 제신이 떨어지는 마틴을 목격하는 순간, 망연자실한 시위대들이 외마디 비명을 쏟아내던 바로 그 순간,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밧줄을 자른 경찰은 그제서야 자신이 단순히 밧줄 하나만을 자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밧줄을 자른 직후, 다행히도 다른 쪽의 제신은 민첩한 동료들에 의해 간신히 구조됐으나 '빌어먹을 마피아(시위대)'들의 즉각 체포를 명령하는 경찰 지휘관에게 '원활한 교통'은 사람의 목숨보다 우선 순위였다.

대략 한 시간 후, 마틴을 병원으로 이송할 헬리콥터가 도착하고 대부분의 시위대가 체포되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는 틈바구니 안에서 심한 충격에 빠진 제신은 경찰서가 아닌 병원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며 또 한번 싸워야 했다.

▲ 푸른 셔츠의 경찰이 칼을 꺼내고 있다(왼쪽)/ 결국 밧줄은 잘리고 마틴은 20m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 제신의 밧줄을 쥐고 울부짖는 여성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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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아닌 살인자를 처벌하라!

▲ 제신의 목숨 줄을 붙들고 버티는 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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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당시, 스위스를 비롯해 영국, 독일, 스페인의 언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제신과 마틴 둘 다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것이 그 이유였을까.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사건 관련 항의 시위가 격렬했다. 경찰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대는 프랑스 영사관을 12시간 동안, 스위스 영사관을 8일 동안 점거하기도 했다.

마틴은 추락 사고로 발과 발목, 골반 골절과 척추가 으스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수 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재활 훈련을 받고 있다. 치명적인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고 있는 제신도 여전히 치료 중에 있다.

▲ 시위대에 섞여 있던 의사가 황급히 강에서 마틴을 끌어내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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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체포된 대다수의 운동가들은 궐석 재판에서 징역 15일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마틴과 제신 그리고 스위스인 운동가 올리비에 L.은 '공공 교통 방해와 운전자들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혐의로 오는 28일 오전 9시 제네바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니용 법정에 출두한다.

반면, 밧줄을 자른 경찰과 지휘관에게는 정직은커녕 어떤 징계 조치도 없었다. 외상이 없는 제신은 피해자로 인정조차 되지 않았다.

급기야 피해 당사자인 마틴과 제신은 민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고 이와 함께 다른 운동가들도 밧줄을 자르도록 명령한 경찰을 고소했다.

6월 23일은 팩스 폭격의 날, '시위의 권리를 자르지 마라'

▲ "시위의 권리를 자르지 마세요!" 기자회견장에서 마틴과 제신은 G8 반대시위에 참가한 일에 후회는 없다며 '시위의 자유권 보장'을 요구했다
ⓒ CPA
G8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혹은 이후에도 경찰의 폭력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이번 오본느 다리 사건 이외에도 제네바에서는 두 가지 경우가 비디오로 촬영되면서 증거로 남아 있다.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이 달아나는 카메라맨을 향해 유탄을 발사, 다리에 중상을 입힌 것과 또 다른 경찰들이 인디미디어 센터가 자리잡은 공장을 포위, 그 속에 있던 사람들을 곤봉을 휘둘러 체포한 일 등이 그것이다.

'오본느 다리 대책위원회(이하 오본느 대책위)'는 이 두 가지 사례와 함께 오는 26일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 탄압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 '시위의 자유 보장'을 요구할 방침이다. 이날 오전 11시 스위스 로잔에서는 변호인단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도 예정돼 있다.

이보다 앞선 23일은 '오본느 대책위'가 주도하는 국제 행동의 날이기도 하다. '오본느 대책위'는 이날, 각국의 스위스 대사관이나 영사관 항의 방문과 오본느 다리 관할 관청인 보(Vaud) 주(州) 주지사에게 집단적인 항의 서한을 팩스로 발송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때 오전 11시부터 정오까지 한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팩스를 보내 이를테면 '팩스 폭격'을 감행할 계획이다.

팩스 내용은 사건 책임자 처벌 요구와 함께 '시위의 권리를 자르지 말라'는 슬로건이 적힌 '오본느 대책위' 양식을 따르면 된다. 사이트(http://www.aubonnebridge.net)를 방문하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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