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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을미사변' 후 일본 망명시절 우범선 일가의 모습. 가운데 어린이는 나중에 육종학자로 이름을 날린 우장춘 박사이며, 오른쪽은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 사카이 나카.
지난 90년 일본인 여류저술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98년 당시 84세)씨는 <わが祖國(나의 조국)>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언뜻 책 제목만 보면 본인의 자서전 같다. 그러나 부제를 보면 남의 이야기를 쓴 책임을 알 수 있다. 부제는 ‘우 박사(禹博士)의 운명의 씨앗(種)’.

그러면 여기서 한국인의 성(姓)을 가진 ‘우 박사’는 누구인가? 흔히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주인공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 1898∼1959년)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쓰노다 여사가 우 박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 데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1914년 도쿄에서 태어난 쓰노다 여사는 1960년대부터 집필활동을 시작한 이후 한동안 일본군인들의 전기(傳記)를 주로 집필하였다. 그러다가 80년대 들어서부터 한일관계사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그 첫 작품이 87년에 출간된 <민비암살(閔妃暗殺)>이다.

쓰노다 여사는 자료수집차 85년 한국을 방문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 한국인 학생으로부터 명성황후(민비) 암살에 가담한 조선군 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이 우장춘 박사의 부친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쓰노다 여사로서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우 박사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육종학자였던데다 그동안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쓰노다 여사는 이후 3년간 한일 양국을 오가면서 우 박사의 흔적을 뒤지고 우 박사 유족들을 만나서 증언을 들었다. <나의 조국>은 이런 인연에서 탄생한 우 박사 집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후사코 여사의 '나의 조국'과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1895년(을미년) 10월 8일 새벽 5시30분경. 채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미명에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들이닥쳤다. 일본군과 일본인 복장을 한 이 괴한들은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일행을 살해하고는 곧바로 근정전을 지나 건천궁(乾淸宮)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국왕(고종)의 침전인 곤령전에 난입,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국왕은 옷이 찢겨지는 등 수모를 당하였다. 또 왕세자는 일본군 장교복장을 한 폭도에게 상투를 잡힌 채 그가 휘두른 칼에 목을 맞고 쓰러졌으나 다행히 칼등을 맞아 목숨을 건졌다.

이들 중 한 무리는 인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로 내달렸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景稙)이 길을 막고 나서자 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는 고종이 보는 앞에서 다시 칼로 무참히 베었다. 이어 왕비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고 울려퍼졌다.

궁녀 3명과 왕비(민비, 시해사건 발발 2년 뒤인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됨)의 비명소리였다. 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이척(李拓. 순종의 본명)을 통해 피살된 자 중의 한 사람이 왕비임을 확인하고는 왕비의 시신를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鹿園) 솔밭에서 석유불에 태워버렸다.

여기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비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폭도들은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그 시신을 능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시간(屍姦)도 서슴치 않은 일본 낭인 무리들

▲ '국왕무사 왕비살해'.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당일 사건 발생 4시간 후인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 수비대 소속 니이로 해군소좌가 일본 육군참모부에 보고한 '극비' 전문.
일본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77년 작고)는 당시 구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있던 이시즈카(石塚英藏)가 사건 직후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 내용(‘…왕비를 끌어내 2∼3 군데 도상(刀傷)을 입히고 또한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했다…’)를 인용, “폭도들이 사체(死體)를 능욕했다”(<日本の韓國倂合>. 1966년 출간)고 폭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최문형(崔文衡. 한양대·사학과) 교수는 “시체에 대한 국부검사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능욕’이란 표현도 적당치 않다”며 “왕궁 침입에 앞서 이미 술에 만취한 자들이 시간(屍姦, 시체 강간)도 서슴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고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국의 왕비가 괴한 무리들에게 살해당하고 또 그 시신이 능욕을 당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진상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을미사변’은 비참하고 치욕적인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치욕스런 사건에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부친 우범선(禹範善. 1857∼1903년)이었다.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포섭돼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이 사건에서 그가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 당초 임무대로 그는 상황이 전개되자 훈련대 제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이고 명성황후의 시신 ‘처리’도 그가 맡았다. 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명성황후의 시신은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우범선 지시로 명성황후 유해 일부 땅에 묻어

우범선은 어떤 인물인가? 대한제국기에 군인으로 활동한 것은 분명하나 <대한제국관원이력서>나 <구한국 관보(官報)> 등 공식자료에는 그의 출신·경력사항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야사(野史) 몇 군데서 일부 확인될 뿐이다.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라는 책에 따르면 우범선이 (별기군의) 참령관(參領官)으로 근무할 당시 생도들이 그를 ‘자네’라고 불러 그가 반발했던 사실로 봐 출신성분은 그리 대단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송촌 지석영(池錫永)이 윤웅열(尹雄烈)에게 그를 추천하면서 ‘무위영(武衛營) 집사(執事) 우범선은 구세군교가(九世軍校家)에 병학(兵學)이 한숙(숙달됨)한 인물’이라고 평한 걸로 봐 무술에 능했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우범선은 무인(武人)집안 출신으로 20세가 되던 해(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여기에 참여했다. 별기군은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건의로 1881년 한국군의 군제(軍制)개혁의 일환으로 창설되었는데 그가 친일로 나선 첫 실마리는 이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그는 친일 개화세력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정책에 눈을 떠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입, 민씨 정권을 몰아내자 그는 개화파들의 천거로 군국기무처 의원이 돼 갑오(甲午)개혁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4월 친일정권에 의해 훈련대가 창설되자 그는 제2대대장에 보임됐다. 훈련대는 나중에 일제의 친일세력 확장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 무렵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잡고 친일세력 축출을 기도하고 있어 친일세력으로선 궁지에 몰린 입장이었다. 일본은 국면전환을 위해 공사를 이노우에(井上馨)에서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로 교체하였다. 미우라는 부임직후 ‘여우사냥’ 운운하면서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세우고는 당시 한국에서 암약하던 일본인 낭인(浪人)패거리들을 끌어모았다.

아들 우장춘 남기고 자객에게 비명횡사 당해

▲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피살된 현장인 경복궁 내 옥호루의 모습.(1900년대 초 촬영) 지금 옥호루는 헐리고 없고, 대신 그 자리에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기념각이 서 있다.
낭인 가운데는 친일신문 <한성신보(漢城新報)>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와 시바 시로오(柴四郞) 등 일본의 대표적 명문대 출신의 지성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이들 중 더러는 나중에 각료·중의원 의원 등을 지냈다) 미우라는 이들 외에 조선인 협력자를 물색하던 중 평소 친일성향을 가진데다 당시 민씨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있던 우범선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우범선은 미우라에게 “조선의 정치개선은 당우(黨羽)를 일소하지 않으면 어렵다”며 민비(명성황후)시해를 통한 친일정권 수립을 역설하였다.

이어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李斗璜. 나중에 중추원 부찬의·전북 도장관 역임),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나중에 총독부 학무국장·중추원고문 역임) 등이 속속 포섭되자 미우라는 당초 계획날짜를 이틀 앞당겨 거사(?)를 결행하였다. 결국 ‘을미사변’은 일본 공사관의 주도 아래 일본인 낭인 무리와 조선인 친일군인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사건 후 우범선은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도쿄에서 망명생활 도중 사카이(酒井ナカ)라는 일본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한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1903년 구레시(吳市)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해말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하였다.

그의 비명횡사는 일본으로 도망갈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현재 그의 묘는 그가 살해된 구레시와 도쿄 두 군데 있다. 도쿄 아오야마(靑山) 묘지에 있는 묘는 일본인 후원자가 유골을 분골(分骨)하여 그의 사후 1년 뒤인 1904년에 만든 것이다.

우범선에게는 우장춘 이외에 유복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차남은 명문 제1고등학교·동경(東京)제국대학 법과를 졸업, 일본 유수의 회사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였다. 그는 모계(母系) 집안에 입적돼 호적상으로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었다.

반면 우 박사는 6·25 와중에 귀국, 일생을 조국의 농업발달을 위해 연구에 전념했다. 우 박사로서는 그 길이 아버지의 과오를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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