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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보채자 아내는 뭐 먹을 거 없나 냉장고를 뒤지더니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의기양양 밤 한봉지를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밤 삶아 줄테니 조금만 기다려."

지난 가을 주말에 몇차례 평소에 눈여겨 보아둔 밤나무 많은 산을 돌아다니며 밤을 주운 적이 있습니다. 꽤 많은 밤을 주워 일부는 삶아 먹고 일부는 냉장고에 보관했는데 그게 여태 남아 있었던 겁니다. 산에서 주운 밤은 하루 이틀 지나면 까만 구멍이 뚫립니다. 벌레가 뚫어놓은 구멍이지요. 주울 때는 멀쩡한 밤이라도 여지없이 구멍이 뚫립니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냉장고에 보관합니다.

ⓒ 이기원

아내는 밤을 커다란 유리 그릇에 담아 씻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재빠른 손놀림에 따라 녀석들의 자그마한 몸에서는 밤색 윤기가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밤 씻기가 어지간히 끝나갈 무렵 아내는 무언가 놀라운 걸 발견했다며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싹이 난 밤이 있었나 봅니다.

ⓒ 이기원

"신기하네, 냉장고 안에 있던 밤에서 싹이 나왔네."
"우와, 정말이네."
"아빠, 이리와봐요. 밤에 싹이 났어요."
"이 밤 심으면 밤나무가 돼요?"

아내와 아이들이 신기하다며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얘기들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더군요. 아무리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길목이라고는 하지만 냉장고 안에 있던 밤에 싹이 나다니요. 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싹이 난 밤은 세 톨입니다. 녀석들의 꽁무니에선 노란 싹이 삐죽 솟아나와 있었습니다.

냉장고가 고장이 나서 제 구실을 못하나 싶어 문을 열어봤지만 별 탈이 없이 제가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더군요. 녀석들은 냉장고 안에서도 들녘의 봄 소식을 감지하고 싹을 틔울 만큼 예민한 감각을 갖춘 것일까요? 내 짧은 소견으로는 신기한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기 힘들 뿐입니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싹이 튼 세 톨의 밤은 화분에 옮겨 심었습니다. 나머지 밤은 알맞게 삶아 맛있게 나누어 먹었지요. 아이들은 화분에 심겨진 밤에서 싹이 자라 흙 위로 솟아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냉장고 안에서 틔운 싹이 과연 죽지 않고 자랄 수 있을까 지켜보는 제 마음도 설레이긴 마찬가지 입니다.

남녘의 봄 소식이 하루가 멀다하고 자꾸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봄을 맞으며 희망 하나를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냉장고에서 싹을 틔운 밤알의 생명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희망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www.giweon.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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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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