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금 필리핀은 겨울이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거의 일년 내내 계속되지만 지금은 섭씨 25도를 오르내리는 살기 좋은(?) 겨울이다. 그래도 한밤중에는 이불을 덮지 않고 자면 썰렁할 정도로 일교차가 커서 필리핀 사람들은 지금을 한겨울로 생각하고 있다.

▲ 필리핀 라구나에 있는 오석주씨 농장
ⓒ 김홍련

이 겨울(?)에 농장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농사를 짓고 있는 한 젊은이를 만났다. 마닐라 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라구나. 우리나라의 60년대 시골을 연상할 정도로 한적한 소도시이면서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농장지대이다. 여기에 한국에서 전 가족을 데리고 필리핀으로 이주해온 한 가장이 있다. 그는 46살의 오석주씨다

“대구에서 큰 경양식집을 했어요. 7억원을 들여 인테리어를 했을 만큼 대형음식점인데다 젊은이들 취향으로 설계해서 대구에서 명소로 자리잡을 만큼 유명했지요.”

그는 옛날을 회상한다. 한때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에서 이름을 날릴 만큼 좋은 보직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쌍둥이 아이를 낳고 보니 약간 지체장애가 있어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투자해 호프집을 차렸는데 옛날 동료들도 잘 도와주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영업이 너무나 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 재산을 털어 대형음식점을 개업했는데 그만 그게 화근이 되었단다.

“한달에 몇 천만원씩 벌다가 몇 천만원씩 적자를 내니 순식간에 알거지가 되더라고요. 겨우 마련한 여비와 얼마간의 돈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친척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수십년만에 찾아온 엘니뇨현상으로 벼가 여물지 못해 수십만평에 쏟아 부은 마지막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지요. 그렇게 그렇게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필리핀입니다.”

세 아이와 아내까지 다섯식구가 건너왔는데 이곳에서 먹고 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몇 달간을 하숙집에서 놀며 지내다가 주인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끼니라도 해결되었으면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농장으로 따라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가만히 관찰하니 이곳에서도 희망이 보였다.

▲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오석주씨
ⓒ 김홍련

그는 소를 키워보고픈 욕망이 일었다. 넓은 농장에 자연목초지가 널려있는 이곳에서 조금만 노력하면 가족은 먹여 살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더구나 수입의 80%는 자신의 몫이고 20%는 지주의 몫이라고 하니 조건도 아주 좋았고, 땅도 2만평이나 되니 열심히만 하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고 한다.

다니던 교회와 한 푼 두 푼 보태준 한인들의 도움으로 황소 50마리를 샀다. 한국에서는 소 한 마리 값이 700만원 정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40만원에 불과했다. 그나마 중간 정도의 소는 20만원 정도였다. 그는 이곳 물정도 잘 모르고 황소의 시세도 잘 몰라 필리핀 사람에게 구매를 부탁했다고 한다.

▲ 농장에서 일을 거들어 주고 있는 필리핀 친구
ⓒ 김홍련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시세보다 비싸게 소를 구입해 어미 소가 되어도 순이익이 별로 없었다. 이익은 없고 사육비는 많이 들고 이래저래 골치가 아파 소를 처분하기 시작했다. 생활비도 없었다. 소 한 마리를 팔면 한 보름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가진 돈이 다 떨어졌으니 이제 새로 소를 살 형편도 못됐다. 그렇게 한 마리 한 마리 처분해 아이들 학교 보내고 생활하다 보니 당시 남은 소라곤 10마리밖엔 안됐다고 한다.

절박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지 7년씩이나 연락이 없던 옛날 직장상사가 우연히 연락처를 알았다고 하면서 약간의 용돈이라며 돈을 보내왔다. 그런데 그게 이곳에서 황소 수십 마리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또 그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이 황소 구입에 드는 돈을 투자해 준다고 했다. 희망이 생겼다.

▲ 재기의 희망을 주는 황소
ⓒ 김홍련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한국에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부채 때문에 매일이다시피 채권자가 전화가 걸어온 것이었다. 연락을 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자신 때문에 상대방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멀리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사정도 해 보았다. 그러나 채권자는 더욱 더 끈을 조여왔다. 그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기도했다. 이 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냐? 아니면 부채를 갚을 것이냐? 고민 고민 끝에 부채를 상환하기로 했다.

직장상사가 보내온 돈을 털어 그 사람에게 송금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아직 많은 부채가 남아있지만 우선 당장 시달리지 않게 된 것이 너무나 후련했다고 한다. '돈은 또 벌면 되지!!'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엄청나게 돈을 벌어 잘 쓰고 다니던 옛 시절이 생각이 났다. 그러나 당시는 가족의 생계를 걱정 해야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새로 시작하자."

▲ 학비 밑천으로 사들인 염소
ⓒ 김홍련

그는 염소 몇 마리를 샀다. 새끼 염소 한 마리가 한국 돈 1만원밖에 안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거금이었다.
"이 염소로 우리 아들 학비라도 마련해야지."

그리고 농장의 틈새에다 망고를 심었다. 적당히 살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살긴 싫었다고 한다. 이곳에 뼈를 묻으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망고나무 한 그루에서 대학생 한 사람의 등록금을 벌 수 있다. 10년 이상을 키워야 되는 일이지만 성급히 생각하고 무리하게 하다간 또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는 이제 찬찬히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 삼아 욕심보다도 성실로서 승부를 걸어볼 작정이었다.

축협이나 농협에서 많은 기술지도를 해주고 있는 것도 그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인터넷이 그를 살려주고 있는 셈이다.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 그는 용기와 희망을 얻었고 남을 배려하고 돕는 것은 가진 자보다 없는 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틈틈이 교회봉사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아내도 한국인 학교에서 학생을 자원봉사로 가르치고 있다.

항상 바쁜 그가 시내까지 가자면 상당한 부담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면서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주변 이웃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언젠가 그가 도와준 사람이 자기 가족을 굶기지 않고 건강하게 자식을 키워준다면 그게 자신의 작은 보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돈을 빌려주었거나 투자해 준 사람 중에서 아직 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비록 IMF가 가져다준 상처로 모든 재산을 잃고 외국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자연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간 다져온 부지런함으로 꼭 재기해 빚을 갚겠습니다.”

그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망고나무가 심겨진 농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덧붙이는 글 | *많은 사람이 사업 실패나 부도로 해외로 도주하는 사례가 많은 가운데서 열심히 자연과 더불어 농사를 지으며 당당히 자신을 채무자라고 밝히고 재기를 다지는 모습이 아름다워 취재했습니다.

*김홍련 기자는 필리핀 현지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