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장흥 '암챙이 골짝(유치면)'은 올해가 저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전쟁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가갸거겨"를 외던 유년의 초등학교며 농주 한 대접이면 촌놈 목소리도 키워 주던 주막집도 이제 서서히 기억의 편린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 유치자연휴양림 구름다리
ⓒ 김대호
깊은 단잠을 기대하며 7년 만에 장흥군 유치면에 있는 자연 휴양림을 찾았다. 애써 잠을 청하려 1만부터 거꾸로 세어 올라오지만 "졸졸"거리며 끼여드는 개울물 소리에 '무념(無念)'은 '상념(想念)'이 되고, 다시 세기를 수십번은 반복한 듯싶다. 열서너살 첫 몽정(夢精)처럼 잠 못 드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 이제 수몰될 암챙이 골짝(유치면)
ⓒ 김대호
"나는 암챙이 골짝(유치) 놈이어야. 빨치산 본부가 있었다고 하더라."

죽어서도 고향 탐진강을 끝내 찾지 못하고 임진강을 흐르고 있을 친구 녀석은 1년 전 부음처럼 '쑥국새'로 다가와 밤새 '암챙이 골짝 놈'을 반복한다. 친구는 자신이 그렇게 애타게 그리던 '암챙이 골짝'이 수몰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담배가 피우고 싶다. 허한 사람 속을 담배처럼 빠르게 채워주는 것이 있을까? 15년간의 금연이 못내 후회가 된다.

배낭 짊어지고 오솔길 더듬어 몇 시간을 헤매던 십수년 전부터 아스팔트 타고 영암에서 20여분만에 달음질하는 오늘에 이르는 동안 머리까지 서늘한 유치 휴양림의 공기를 즐기지 못한 것은 오늘뿐이었다. 숫자 세기는 내 심장 박동 소리보다 빨라지고 좁은 공간에서 들려 오는 코 고는 소리가 참을 수 없다.

▲ 전쟁의 상처를 품고사는 가지산
ⓒ 김대호
차의 시동을 걸어 무작정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을 탐닉하던 풀벌레 소리며 나 홀로 즐겼던 쑥국새 소리까지 순간에 신기루가 된다. 비포장 산길을 올라 고라니 한 마리와 까투리 여러 마리를 밀어내고 산 정상에 차를 세워 보림사 쪽에서 막 모습을 드러내는 가지산(해발 509.9m)을 바라보았다.

야만의 시대, 저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을까?

유치는 영암 덤재, 화순 피재, 장흥 빈재, 강진 땅재 등 높은 산과 재에 둘러싸인 분지로 이뤄져 있다. 그러다 보니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한국 전쟁 당시 장흥읍이 65일 정도 인민군에 점령되었던 반면 유치는 무려 1년 반 동안 군경과 치열한 대치를 벌였다.

▲ 자연습지가 된 옛 논을 비추는 아침햇살
ⓒ 김대호
'빨치산의 해방구'였다는 '멍에' 때문에 동네 개도 흥얼거렸다던 새마을 사업의 혜택은커녕 변변한 도로나 노인정 하나 허락되지 않은 오지 중에 오지로 방치돼 오다 결국 탐진댐을 막아 고을 전체가 수장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낮에 부산면에서 만난 김영수(가명·75) 할아버지. "어디 옛날에 유치 사람들이 사람 대접이나 받았간디. 살림들이 다 옹삭(옹색)허다 본께 땟국물이 질질 흘러서 읍사람들이 '암챙이 촌놈들'이라고 골렸제(놀렸지). 거그는 밤에는 인공, 낮에는 대한민국이다 본께 경찰이 유치놈들은 산사람들하고 통비자라고 단산리하고 대리 같은 동네는 싹(모조리) 불 처질러 없애 브럿어."

또 다른 할아버지는 "전쟁 터진께 경찰이 보도연맹으로 엮어서 굴비 엮데끼 독(돌) 묶어서 바다에 빠쳐(빠뜨려) 수도 없이 죽였제. 인공 세상 된께 복수하느라고 군경 가족들을 죽이고 돌아온 경찰들이 또 복수하고…한 집서 50명 넘게 지사(제사) 지내는 집도 있당께. 시방(지금)은 그때 시절(세월)이 그랬능게 하고 서로 없든 일로 해불었제. 그 일은 없던 일이여"라고 다짐처럼 말한다.

▲ 이곳 바위는 온통 피빛이다
ⓒ 김대호
그 세월이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으면 사람들은 서로 '없던 일'로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린 것일까?

▲ 그래도 가을은 찾아오고
ⓒ 김대호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산감나무 잎이 제법 노랗게 가을을 탄다. 군경에 의해 오래 전 소개된 암챙이들의 집은 이미 산이 되고 논은 늪이 되어 산짐승을 위한 훌륭한 터전이 되어 있었다. 두어 시간을 산길에서 머물다 하산 코스로 접어드니 산을 허무는 '밤재터널' 굴착 공사가 한창이다. 소나기 뒤끝에 대가리를 내민 꽃무릇이며 살 오른 표고버섯을 구경하느라 한참을 보내고서야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장흥군 유치에서 오른 산길은 강진군 옴천에서 끝이 난다. '암챙이 촌놈'의 족쇄가 지겨워 처자식 거느리고 도시로 뛰쳐나온 녀석의 아버지는 살았고 '암챙이 촌놈'이 자랑스러운 녀석은 죽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여전히 살아남았고 가정을 꾸렸고 이 땅에 살다갔다는 가장 확실한 흔적인 딸 아이가 세상이 태어나 '아빠'라고 불러줌으로써 나는 더 확실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부재(不在)가 녀석에게 자유를 주었을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우리는 강해서 살아 남은 것일까?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일까? 표현하지 않지만 때로는 살아남은 것이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되고 비겁함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살아남은 당신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회환'일 뿐이다. '부재(不在)하게 될(혹은 된) 것들에 발목이 잡힌 건 여전히 살아 남은 사람들'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음 놓을 자리 보지 않고, 마음 길 따라가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이 기자의 최신기사"마음도 수납이 가능할까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