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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번지는 서양물감을 보며 나는 때때로 천년을 보내고도 그 색이 발하지 않는 우리 사찰의 탱화는 무엇으로 그렸을지 항상 궁금했다.

상감청자처럼 그 여백을 흙으로 메우지 않고서야 어떻게 천년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이번 여행에서 천년세월을 간직하고자 했던 스님들의 탱화와, 상감을 통해 청자에 세긴 도공들의 ‘꿈’은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탱화를 만드는 상사화와 청자에 새기는 상감에 얽힌 비밀의 실마리는 신라 애장왕 원년(AD800년)에 창건한 정수사(靜水寺) 대웅전에 모셔진 ‘무명도공조상위패(無名陶工弔喪位牌)’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정수사 부도탑 주변에 흐드러진 상사화
ⓒ 김대호
절 집 산야에 상사화가 많은 것은 옛 시절 스님들이 탱화를 그릴 때 꽃은 말려 물감을 만들고 뿌리는 즙을 내어 칠했는데 좀이 슬지 않고 색도 바래지 않아 즐겨 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상사화꽃 하면 함평군 용천사나 고창군 선운사를 꼽는다.

▲ 상감청자를 발명한 무명도공의 위패가 모셔진 대웅전
ⓒ 김대호
전남 강진에서 대구면 청자마을을 거쳐 도립공원 천관산의 줄기인 천태산 정수사에 가면 군데군데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상사화(相思花, 꽃말 이룰 수 없는 사랑) 꽃을 볼 수 있다.

그 규모로 본다면야 천지를 붉게 물들이고도 모자라 사람의 심사까지 헤집어 사랑의 열병으로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이 두 사찰의 상사화라면 정수사의 그 것은 야학당 선생님 푸른 그림자에도 귀밑머리 뒷꽁지(뒷통수)가 여러운(부끄러운) 소박한 미열에 깃든 꿈결이다.

상사화는 그리움이다.

아직도 한 번도/당신을/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가슴 아픈 일인가를/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만나지 못하고/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오랜세월/침묵속에서/나는 당신에게 말하는 법을 배웠고/어둠 속에서/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익혀왔습니다.
죽어서라도 꼭/당신을 만나야지요/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오늘은 어제보다/더욱 믿으니까요.
<이해인 詩 상사화>


▲ 대웅전 단청과 상사화
ⓒ 김대호
스물을 조금 넘긴 나이 때 인연을 맺어 누이처럼 따랐던 혜성스님은 가을밤 몇몇 지인들과 달맞이 같던 길에 상사화에 얽힌 슬픈 전설을 전해 주었다.

뜻풀이처럼 ‘서로를 그리워하는 꽃’ 상사화는 6월이면 형체도 없이 잎은 시들고 석달 열흘을 보내고 난 9월에야 꽃대를 세운다.

▲ 도공들이 가마에 들기 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찾았다는 정수사 돌다리
ⓒ 김대호
아주 오랜 옛날 산사 깊숙한 토굴에서 용맹정진 하던 젊은 스님이 있었다.

그러던 9월 어느 날 소나기가 장대처럼 내리던 날, 스님은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한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수행도 멈추고 가슴앓이를 하던 스님은 석달 열흘만에 상사병으로 피를 토하고 죽고, 쓰러진 곳에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바로 그 꽃이 상사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서로를 그리워 하지만 만날 수 없는 숨바꼭질 같은 사랑을 상사화 사랑이라고 했다.

▲ 탱화물감에 넣을 상사화 즙을 내었을지도 모를 돌절구
ⓒ 김대호
스님들은 그 그리움을 상사화에 담아 탱화를 새긴 것이다.

피를 토하고도 이루고자 했던 여인과의 사랑이 속세의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부처가 되는 미륵세상임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과연 도공들이 상감을 새겨 천년을 간직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5∼6세기경부터 중국에서 생산된 청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신라말기인 8∼9세기경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에서 생산이 시작되어 14C 쇠퇴기까지 500년 고려왕조 동안 대구면 정수사에서 미산까지 6km에 이르는 집단적으로 청자마을을 형성한다.

대구면에서 20km 떨어진 곳에는 당시 동남아시아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던 해상왕 장보고대사의 청해진이 중국과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 청자의 전래경로가 설명되는 것이다.

▲ 사찰 주변을 온통 포위한 이름모를 들꽃
ⓒ 김대호
또한 중국 당나라와 교역이 이뤄진 영암군 당포(唐浦)와 마찬가지로 이곳 포구인접 마을 이름이 당전(唐前)이고 보면 이곳에도 청자와 관련해 당나라로 나아가던 포구가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발견된 4백여기의 옛 가마터 중 188기가 강진군 일대에 집중돼 있고 그 규모가 대구면 일대에만 모두 18만여평 규모에 퍼져 있는 것으로 볼 때 가히 청자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현존하는 국내 국보와 보물급 중 80%가 용운리 일대에서 만들어 졌고 나라가 외세에 유린당하던 시절 일본과 프랑스 등 세계 곳곳으로 도둑질 당한 명품청자의 대부분도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껴묻거리(부장품) 도굴현장을 보았다는 김모씨(남·71)는 “죽창으로 쑤셔서 ‘텅텅’ 소리가 나먼 거그가 독널장(석관묘)이여 거그를 쇠꼬챙이로 쑤시먼 새금파리(사기그릇의 파편 여기서는 청자 파편)가 묻어 나오면 십중팔구 청자가 묻혀 있제. 그때 쌀 한말 값으로 팔려 나간 것이 지금은 수억원이 넘는다고 하드마. 일본으로 많이 물건너 가브럿제” 라고 증언한다.

중앙정부인 경주와 개성에서 천리길을 넘는 이곳 강진에서 부와 권력의 상징인 청기와 등 고급청자가 구워졌다는 것은 신라 말 이곳에 터를 잡은 이들이 중앙권력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후 장보고대사가 암살되고 청해진이 폐허로 변하면서 대륙을 호령하고자 했던 발해의 꿈이 그러했듯이 대양을 경영하고자 했던 해상왕국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억겁(億劫)의 세월을 기다려온 미륵세상에 대한 동경을 영원토록 잊지 말자고 상사화를 탱화에 담았듯이 대양을 지배한 해상왕국에 대한 그리움과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천년동안 간직하고자 상감을 새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 용(장보고)이 승천했을 극내기에서 바위를 뚫고 흐르는 물
ⓒ 김대호
천년을 넘게 이어온 정수사 가는 길의 지명은 용문(龍門)마을에서 시작돼 용이 구름을 타는 용운(龍雲)마을에 이르고 마침내 극내기(극락으로 나가는 길)에서 멈춘다.

혹시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해 김제 벽골제 공사현장으로 끌려가던 행상왕국의 유민들과 달리 이곳을 탈출한 이들이 흑산도에 정착해 반달산성을 쌓아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일부는 도공으로 신분을 숨겨 이곳에서 청자에 천년의 꿈을 새기면서 장보고의 원혼이 극락에 이르기를 기원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론이다.

▲ 상사화에 낼 않은 검은나비
ⓒ 김대호
정수사에는 도공들이 쪽빛 하늘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학의 문양을 상감으로 그리면서 천년세월을 간직하고자 했던 그리움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강진답사 여행을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꽃무릇(상사화)가 지기 전에 정수사에 들러 미륵정토를 꿈꾸던 해상왕국 청해진의 기억을 천년동안 간직하고 했던 무명도공들의 위패에 잠시 묵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 극내기의 물이 모여 이룬 용운제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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