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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국군인>과 함께 같은 음반(음반번호 5079)에 실려 1943년 9월에 태평레코드에서 발매된 군국가요로 <어머니의 기원>이라는 곡이 또 있다. 역시 <매일신보(每日新報)> 현상모집에 당선된 가사에다 곡을 붙인 것으로, <우리는 제국군인>이 전쟁터로 가는 청년의 입장을 노래한 것인 데에 반해 <어머니의 기원>은 그러한 아들을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한겨울 거리에 센닌바리로/ 일억의 감사(感謝)을 모으고 섰는/ 용사의 어머니가 부럽더니/ 이제는 소원을 풀었나이다
꽃 피는 정국(靖國)의 신사(神社) 앞에서/ 아들의 충혼과 대면을 하는/ 영령(英靈)의 어머니가 부럽더니/ 이제는 소원을 풀었나이다
사나이 장부로 세상에 나서/ 내 품에 안기어 듣던 자장가/ 오늘은 군가로 화답하오니/ 어머니는 웁니다 감격의 울음
나서는 아들의 모습을 안고/ 묵묵히 그 뒤를 따르는 마음/ 돌아옴을 바라지 아니 하오니/ 군국의 어머니는 굳세나이다
(신문에 실린 내용을 현재 맞춤법에 따라 바꾸어 표기한 것이다)


수천 편의 응모작을 제치고 당선되어 상금으로 거금 5백원(圓)을 받은 작품답게 <어머니의 기원>에서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이 적극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약 2500만 정도였는데도 제1절에서 ‘일억’을 운운한 것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인구를 합쳐 말했기 때문이니, 내지(內地)(일본 본토를 이르는 말)와 식민지 조선이 하나라는 뜻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더구나 지금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적인 장소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야스쿠니(靖國) 신사까지 등장하고 있으니, 표현의 정도가 대단히 노골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머니의 기원>에는 많은 군국가요에서 보이는 비장한 감정 묘사가 작품 전반에 걸쳐 나름대로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비장감이 과도하게 강요되었던 일제 말기의 사회 분위기에 오히려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면서 흘리는 눈물이 감격의 눈물로 미화되고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 굳센 마음으로 찬양되는 내용은, 전쟁의 광기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되어 버리고 마는 상황의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이 곡의 가사를 쓴 사람은 <매일신보>에 이름이 신목경조(神木景祚)라고 나와 있는데, 주소가 인천부 대화정(大和町)(현재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崇義洞)) 40번지라는 것 말고는 그에 관해 알려져 있는 바가 없다. 이름이 일본식이기는 하지만 우리말 가사를 써서 현상모집에 응모한 것을 볼 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한 우리나라 사람인 것으로 추정이 된다. 1948년에 나온 책 <친일파군상(群像)>에서는 어떤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머니의 기원> 작사자를 박경조(朴景祚)로 쓰고 있기도 하다.

작곡은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정의의 행진>을 발표한 것으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전기현(全基玹)(1909-1943(?))이 맡았다. 폴리돌, 콜럼비아를 거쳐 1941년에 태평레코드로 입사한 전기현은 <어머니의 기원>을 작곡하기 전인 1942년 1월에 국민가요라는 명칭이 붙은 군국가요 <민초합창>(박영호(朴英鎬) 작사, 백난아(白蘭兒)-태성호(太星湖) 노래, 음반번호 5021)을 발표하기도 했다.

노래를 부른 가수 차홍련(車紅蓮)은 1942년에 태평레코드에서 데뷔한 이후 1943년까지 열 곡 남짓한 작품을 발표했는데, 군국가요로 부른 것은 <어머니의 기원> 한 곡만이 확인되고 있다. 차홍련은 광복 이후에 가수로 활동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므로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1943년 9월 당시 <매일신보>의 광고를 보면, <우리는 제국군인>과 <어머니의 기원>은 조선총독부, 조선군(朝鮮軍) 보도부(報道部),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등 일제 당국과 친일단체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38년에 설립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의 후신으로 1940년에 설립되었으며, 일제 말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단체 가운데 하나였다.

두 노래가 이처럼 대대적으로 추천을 받고 홍보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신문을 통해 공모한 작품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신문이나 잡지, 또는 각종 기관, 단체에서 공모해 군국가요를 제작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때로는 같은 노래를 여러 음반사에서 각각 취입해 동시에 발매하는 식으로 선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식민지로 있던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예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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