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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철아, 이제는 니캉 내 캉 우리 부자는 동지다. 마 어느 놈이 무섭노?
ⓒ 박도
1987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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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철아, 내 니 몫까지 하마..."


-운명의 그날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해(1987년) 1월 14일, 나는 그날도 예삿날처럼 공사 현장에 있었는데, 본청 총무과장이 오후 7시에 다방에서 좀 보자고 해요. 그 전화를 받고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인사이동이면 인사과장이 보자고 할 테고, 총무과장은 볼일이 없을 텐데…’ 하는 정도였어요.

약속시간 다방으로 갔더니 네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들 인상도 험악하고 순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어요. 직감적으로 찬 기운이 확 돌더군요. 두 사람은 부산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었어요. 부산사람 두 사람(안기부 요원과 운전기사)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남은 두 사람이 대뜸 위압적으로 "서울에서 왔소. 곧장 서울로 갑시다” 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어떻게나 그들 서슬이 무서웠던지 ‘내가 왜 서울에 가야 하느냐?’는 반문도 못하고,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갑시다”하니 마지못해 응해 주더군요.

집에 가자 아내와 은숙(종철 누나)이가 “종철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다그쳐 묻더군요. “내, 서울 가서 알아보고 전화하마”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왔어요. 서울행 밤 열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어서 몇 번이나 물었으나 “가 보면 알 겁니다” 라고 퉁명스런 한 마디 뿐이었어요.

새벽녘에 서울역에 도착하자 새까만 양복을 입은 네댓 명의 덩치들이 마중을 나왔어요. 그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아차’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 남영동 대공 분실 정문, 2층 벽돌 건물은 사건 후에 지은 새 건물로 그 전 가건물에서 박정기씨가 아들의 운명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어요(나중에야 그곳이 남영동 대공 분실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한사코 종철이를 먼저 보여 달라고 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내 말은 들은 체도 않고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서는 밤차를 타고 왔으니 몸이나 닦자는 거예요.

대충 몸을 닦고 나오자 해장국밥을 시켜주고는 다시 (남영동 대공 분실) 가건물 2층에서 기다리게 하대요. 무작정 기다리고 있으니 조바심이 났어요. 그래서 “우리 종철이나 보여주시오”라고 애원했어요.

그들 몇은 번갈아 내가 있는 방을 드나들면서 “마음을 크게 먹으세요”하면서 계속 나에게 엉뚱한 질문 -주로 내 과거 전력이나 집안에 사상문제 여부 등-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짜증을 내면서 “이 사람들 와이 이라나. 종철이나 빨리 보여줘요” 했으나 여전히 딴 청만 하는 게예요. 나는 점차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마침내 나를 다른 사무실로 데려가대요. 실내는 책상에 세 개 있었고 덩치 좋은 형사들이 빙 둘러 서 있었어요. 자신을 박원택 계장이라고 소개한 자가 사건 경위의 말문을 열었어요.

▲ 아들의 비석 언저리를 가다듬는 아버지의 마음
ⓒ 박도
한 다부지게 생긴 자(나중에 알고 보니 조한경)가 “자기는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으로 살아왔고, 국가에 충성해 왔다. 경찰이 수사를 하다보면 피의자에게 위협을 주는 일도 있는데, 아드님을 조사할 때 발을 구르면서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습니다”했습니다.

그러고는 “술을 많이 마셨는지, 밥을 줘도 안 먹고 물만 많이 먹더라”고 하면서 저희에게 유리한 말만 잔뜩 늘어놓는 거예요.

마침 종철이 형과 내 삼촌이 왔기에 그 자리에서 한 번 사건의 시말을 재연해 보라고 하니까 박원택이 지시하고 조한경이가 재연하대요. 그래서 실장실에 가서 똑같이 재연해 보라니까 대공 분실장 전수린 앞에서도 똑같이 하대요. 그것이 치안국장 강민창이가 발표한 그대로예요.

하지만 그때 그 발표를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멀쩡한 젊은 놈이 책상을 치자 죽는다는 건 소도 웃을 일이지요.

그날 오후 네 시경에야 경찰병원 영안실에 있는 종철이의 시신을 봤습니다. 그 새 부산에 가족들도 비행기를 타고 와서 같이 봤지요, 종철이는 온몸이 이미 굳어 있었어요.

▲ 친구들이 세운 돌비석
ⓒ 박도
그때 제 집사람이 아들의 시신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더군요. 그들의 작전이 맞아떨어진 거지요. 순간 나는 남은 가족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이런 와중에 저들은 내게 거의 강제로 도장을 받아가 부검을 했어요. 처음 시신을 검진한 분이 중앙대 의대교수 오연상 박사였고, 부검한 분은 고려대 법의학 교수 황적준 박사였어요. 입회검사 안상수, 지휘 검사는 최환씨였어요.

다음날 벽제 화장장으로 갔지요. 영구차에서 종철이의 시신을 담은 관이 내려지자 아내가 또 기절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대기시켜 놓은 앰뷸런스에 아내와 은숙이를 싣고 갔어요.

나는 종철의 화장에 합의해 준 일이 없었어요. 그때 나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또 다른 불상사가 날까 봐 저들에게 끌려 다니기만 했어요. 종철이의 뼛가루를 가지고 임진강으로 갔습니다.

거기 샛강에다 뼛가루를 뿌렸어요. 그날은 강물도 얼지 않았고 비까지 뿌렸습니다. 그날의 내 모습을 한 신문기자가 단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말이 없대이….""

▲ 아들을 장사 치른 후, 하숙방을 둘러보는 아버지
거듭된 조작에 또 조작, 진실은 없다

-수많은 학생운동 사건중에서 박종철 사건만은 어느 정도 실체가 드러난 셈이지요?
"아직도 시원케 밝혀지지 않은 게 있습니다. 우선 종철이 연행 시간입니다.

그들은 1월 14일 아침 8시에 연행했다고 심지어 고문 경찰관 부인 일기장까지 조작했습니다만 제가 조사한 바로는 1월 13일 자정 무렵에 연행해 갔어요. 그들은 종철이를 심문한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조작한 듯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바로는 1월 13일 학교에서 박명진 친구의 성적표를 대신 받아 밤 11시 무렵 신림동 하숙집에 전해 준 뒤 자기 하숙집으로 돌아오다 행방불명됐거든요.

그런데 경찰은 아침 8시에 연행해 와서 11시에 죽었다고 하거든요. 7시간 남짓 차이가 나요. 그동안 무슨 짓인들 안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연행 후 3시간이라고 끝까지 우겼어요. 세 시간동안 자술서도 두 차례나 썼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합니까?

또 하나는 부검 결과 흉부압박사라고 했지만, 우리 가족(종철이 삼촌)이 부검 때 입회해 보니까, 전기고문 같다. 왜냐하면 신체의 여러 군데에 반점이 있었다고 그러더군요. 아마 강민창 주도하에 관계대책회의에서 하나만이라도 뭔가 숨기자라는 회의 결과를 따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고문 경찰관은 다 풀려나왔나요?
"그럼요. 조한경 10년, 강진규 8년, 황정웅과 반금곤은 5년, 6년을 실형 받았고, 이정호는 3년을 받았지만 모두 형량대로 다 살지 않고 가석방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지휘선에 있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 박처원, 유정방, 박원택 등도 여태 잘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기네 사람은 철저하게 감싸더라고요. 일제 때 독립군을 고문한 경찰이 해방 후에도 잘 사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습니까?
"나도 용서란 말이 좋은 줄은 잘 압니다. 한 때는 ‘저들은 하수인이다’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들의 태도를 보면 도저히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독하게 마음을 먹어요.

▲ 아들의 죽음으로 바뀐 아버지의 인생길, 열렬한 민주 투사가 된 아버지.
저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잘못을 모르고 있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다가 생긴 실수라고 가볍게 여겨요. 그런 자에게 ‘좋은 게 좋다’ 식으로 용서해 버리면 이 땅에 고문은 근절시키지 못하고 부당한 권력은 계속 이어갑니다.

나는 현재 유가협(민주화운동 유가족협회) 조직을 이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강하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울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국가 공권력에다가 막대한 자금으로 회유하고 협박 공갈을 일삼아 왔어요. 정말 그동안 학생 하나 죽거나 실종시키는 일에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의문사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늘 힘없는 백성만 당해 왔지요. 그래서 늘 흐려지는 내 마음을 추스르면서 스스로 독해지려고 애썼지요."

▲ 1987년 5월 18일, 명동 성당 김승훈 신부가 광주의거 7주기 추도 미사 중 당국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범인 은폐 축소 조작을 폭로했다.
-제가 보기에는 박종철군은 그래도 인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억울한 죽음으로 끝날 뻔했지요. 먼저 시신을 검안했던 중앙대 부속 병원의 오연상 박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종철이가 숨을 거둔 후 불려갔던 그분이 입을 다물었다면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겁니다. 또 당시 부검에 입회했던 안상수 검사의 용기도 높이 살 만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그분은 검찰복까지 벗었지요.

그리고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 이부영씨의 역할도 컸습니다. 영등포 교도소에 갇힌 몸으로 범인이 축소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그분의 용기 덕분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교도소에서 나온 그분의 쪽지를 그해 5월 18일 미사에서 밝혀 5공 정권의 부도덕성을 백일하에 입증했지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진실을 밝혔던 김승훈 신부님도 용기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쪽지를 전달한 교도관, 황인철, 김광일 변호사 그밖에 내 일처럼 앞장섰던 수많은 애국 시민들…. 정말 그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들이 아비 눈을 뜨게 했지요"

-아들 때문에 아버지의 인생길이 바뀐 셈입니다. 아들을 원망해 보지 않았습니까?
"대학 입학 후 경찰서에 드나든다는 걸 알고서는 그 당시 대학생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통과의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실 나는 지방 공무원이었고, 정치에는 별로 관심도 없이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처음에 말했다시피 내 소원이 퇴직 후 목욕탕 사장으로 손자들 재롱 속에 내 인생을 마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을 잃고 내 눈이 떠졌습니다. 종철이가 죽고 난 뒤 곧 정년퇴임하게 되었고, 그후 유가협에 참석하게 됐지요. 여기 와서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까 내 아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몇 해 전 강경대군 사건 때는 재판 방청 중에 법정 소란으로 석 달 남짓 교도소 생활도 했지요. 이 모두가 아들 때문이지만 한번도 그 놈을 원망해 보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 놈이 내 눈을 띄워준 효자지요.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데 죽는 날까지 내 힘자라는 데까지 지가 바라던 세상이 오도록 투쟁의 대열에 앞장 설 겁니다."

-아들이 바라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주' '민주' '통일' 이 세 말입니다. 사실 해방 후 모든 문제는 조국 분단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분단 문제 해결이 사회 갈등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분단 극복이 쉽지 않은 줄 압니다. 하지만 남북이 인내하면서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고, 정부간 뿐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교류가 더 잦아져야 합니다."

-대담 마무리 말씀을 해 주십시오.
"아쉬운 것은 현재 운동권 역사가 잘 조명이 안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론과 학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 같습니다.

▲ 가자! 우리 함께 이 길로….
ⓒ 박도
그들이 그렇지 못하는 데는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이 있는 듯한데, 이럴수록 백성들은 체념할 게 아니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얘기로 대학 뜰에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300여 유가협을 이끌고 있기에 그 일도 만만치 않은 듯, 대담 중에도 몇 차례 전화가 왔다.

저녁에 또 만날 분이 있다고 해서 다시 택시를 타고 동대문으로 돌아왔다. 을지로 3가에서 나는 그날 찍은 사진을 단골집에 맡기기 위해 내리고 아버님은 창신동 ‘한울삶’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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