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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총평 프란치스코.
ⓒ 이재선
버거씨 병으로 7번에 걸친 대수술 뒤에 두 다리를 완전 절단한 뒤, 오히려 삶의 전의를 불태운 사람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사람들은 그를 가르켜 '병신대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 분은 사람들 말로 두 다리 없는 '병신'일 터이고, 본인이 보살피고 있는 중복장애인이나 정신지체 장애인들도 일반인들에게 '병신'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총평 프란치스코(63)에게 신체적 장애란 단지 불편함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자신이나 자신이 보살피고 있는 중복장애인들을 '병신'으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장애'라고 생각하니까요.

버거씨병에 걸려 두 다리 절단

이야기는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우총평은 클린턴 이스트우드를 닮았다는 동네처녀들의 시샘에 한껏 우쭐했었습니다. '크레에에--에지 러브'를 기세좋게 불러제치던 시절이었지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어여쁜 딸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영화제목처럼 '짧은 행복 그리고 긴 고통'의 세월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시절 '버거씨병'이라는 이름도 낯설고 치료방법조차 알 수 없었던 낮선 손님이 불쑥 찾아왔고, 건장한 두 다리는 발목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대퇴부에 이르도록 7번에 걸쳐서 잘려나갔습니다.

물론 청춘도 잘려나갔습니다. 두 다리 잘린 남편을 뒤로 하고 아내는 아이와 떠나고, 젊음도 떠나고, 청춘의 열병과 같던 사랑도 떠나고, 희망도 떠났답니다.

홀로 버려진 우총평은 여기저기 거지처럼 떠돌다가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서울 둔촌동에 있는 '애덕의 집'이라는 천주교 복지시설에 들어갑니다.

'절망'이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인간의 심정을 아시나요? 혼자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인간의 고독과 고통을 아시나요? 명주실보다도 더 가느다란 희망의 끈이라도 있다면 삶은 복받은 것이겠죠. 고독, 고통, 절망…. 이것이 우총평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왜 추억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가슴을 후벼파듯 더 안쓰럽게 인간을 만드는 것인데…. 서풍에 실려온 봄내음이 그리운 사랑을 일깨우고, 아지랑이 하늘거리던 뒷동산 오솔길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두운 방 모퉁이에서 울부짖는 사내를 상상할 수 있나요?

마구잡이로 햇살이 쏟아지던 봄날. 우총평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무작정 '애덕의 집'을 나섭니다. 그곳에서 얻은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과 함께 낯선 세상 속으로…. 그 이후 우총평씨가 겪은 일들은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정신지체 장애인과 불우노인 때문에 우총평씨의 인생은 송두리째 반전해 버립니다. 두 다리는 없어도, 뜨거운 가슴, 연민,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날부터 우총평은 구걸과 장사를 해서 정신지체 장애인과 불우노인을 보살펴드리기 시작합니다.

복지시설 만들어 안정되면 천주교측에 양도

처음 두 명에 불과하던 정신지체 장애인과 불우노인이 소문을 듣고 한둘씩 우총평씨 집으로 찾아들어, 어느덧 감당할 수 없는 숫자로 불어나자 우총평은 몇 날을 고민하게 됩니다. 두 다리도 없는 내가 저들을 어찌 보살필 수 있을 것인가? 내일 먹을 일용할 양식 걱정으로 하루해를 보내는 주제에 저들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뜬 눈으로 날을 새운 우총평은 불우노인들에게 집에서 나가줄 것을 요구합니다. 같이 있다가는 겨울에 얼어죽거나 굶어죽을 것이 뻔해서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노인분들이 나가기를 거부합니다. 굶어도 좋으니 같이 있자는 것입니다. 이들의 거절에 우총평은 당황해 합니다.

우총평은 같이 살다가는 얼어죽기 십상이라고 노인분들을 설득하지만, 굶기와 노숙을 밥먹듯하고 사회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아온 노인분들에게 우총평의 단칸방은 천국의 보금자리였던 셈이지요.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우총평씨는 울며겨자먹기로 다시 거리 구걸과 장사에 나서게 됩니다. 떠밀리다시피 사회복지운동가가 된 셈이지요.

인생 참으로 재미있지요? 과정이야 어찌됐던 우총평씨 이야기가 주위에 알려지자 천주교 신자들이 그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집으로 와서 장애인과 노인분들 빨래해주는 사람, 반찬거리 만들어주는 사람, 쌀 가져다주는 사람. 그리고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후원금을 주고 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우총평씨의 이야기가 꽤 알려진 후에 그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가 1989년 초가을, 치악산 끝자락 원주에서였습니다. 단풍으로 치장한 치악산 풍경이 감동이었다면 우총평씨와의 첫 만남은 충격이었습니다. 두 다리 없는 사람도 처음 보았거니와 불편한 몸으로 장애인들의 머리를 감겨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때의 충격과 감동은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 김포 '프란치스코네집'에서.
ⓒ 이재선
제가 우총평씨를 만나고 어느덧 15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총평씨는 15년 동안 무려 5개의 복지시설을 설립합니다. 정상인도 할 수 없는 기적같은 일은 해냅니다.

1987년 경기도 하남시에 정박아들과 지체장애인들을 위해 '작은 프란치스코네 집'을 설립합니다. 1989년에는 제천에 '살레시오의 집'을 설립합니다. 1992년에는 제주에 여성장애인만을 위한 '살레시오의 집'을 설립합니다. 같은 해 경기도 김포에 남성장애인들을 위한 '프란치스코네 집'을 설립합니다. 2001년에는 경기도 파주에 '프란치스코네 집'을 설립합니다.

제가 우총평씨가 설립한 복지시설을 나열한 것은 그 분의 건축 실력을 보여드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두 다리 잘린 장애인이 15년간 중복장애아, 불우노인을 위해 불굴의 정신으로 이루어낸 기념비적 업적을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총평씨는 복지시설을 만들어 그 시설이 안정되면, 항시 그 시설들을 천주교측에 넘겨왔습니다. 경기도 하남시의 '작은 프란치스코네 집'은 천주교 영보수녀원측에게 넘겼고, 제천 '살레시오의 집'은 천주교 원주교구에게 넘겼고, 김포 '프란치스코네 집'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게 넘겼습니다.

여러분이 이 시설들을 방문해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나하나의 시설이 사회복지시설로는 상당한 규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두 다리 없는 장애인이 맨손으로 세웠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더 이상 가질 게 없는 '무소유'의 삶

지금 우총평 원장이 직접 운영하는 곳은 제주 '살레시오의 집'과 파주 '프란치스코네 집'입니다. 파주 '프란치스코네 집'은 개인주택을 전세내어 우총평씨가 새롭게 출발하는 복지시설이어서 시설이 아주 열악한 상태입니다.

저는 오랜 세월 우총평씨를 지켜보아왔습니다. 변함없는 불굴의 정신, 장애아들에 대한 사랑을 볼 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무소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물에 대한 탐욕은 인간 욕망의 가장 큰 부분일 것입니다. 특히 장애라는 불리함을 지닌 인간에게 경제적 안정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총평씨는 항시 빈손으로 새출발을 하곤 했습니다.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마다 우총평씨의 마음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우총평씨는 공동체를 천주교측에게 넘길 때마다 저에게 항시 자문을 구합니다. 그때마다 저의 대답은 '반대'였습니다. 갖은 고생을 해서 공동체를 안정시켰는데, 여기를 떠나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다른 사람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원장님(저는 우총평씨를 이렇게 부릅니다.) 혼자 살아가기도 벅찰 것이다. 뭐 이런 식의 논리가 저의 주장입니다.

그때마다 우총평씨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항시 웃기만 하십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찾아가면 이미 공동체는 천주교측으로 넘어간 뒤입니다. 이런 일이 한 번 두 번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반복되자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더군요. 그러나 아직도 소심한 제 마음 한켠에는 그러한 원장님의 행동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미 60세가 넘으신 분, 신체적 장애가 있으신 분이 이 거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가시려고 또 빈손으로 나오시나?

이야기가 길어졌죠? 지루하시기도 하고요. 여러분들은 우총평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사실 잘 모르실 겁니다. 본인이 워낙 밖으로 드러나기를 싫어하시니까요. 하지만 1991년에는 막사이사이상 후보로 추천된 바 있고, 같은 해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습니다. 1995년에는 이 분의 이야기가 MBC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 충북 제천의 '살레시오의 집'.
ⓒ 이재선
이 기사를 쓰는 저는 이 분에 관한 이야기를 1994년 가을에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제목을 붙여 책으로 엮어낸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분을 15년간 지켜보아왔습니다. 이 분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의 참모습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중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저 같은 속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 즉 자신이 목숨으로 일구어온 것을 하루 아침에 다 버리는 정신세계 때문일 것입니다. 평범한 욕망에 붙들려 사는 저로서는 이해도 수긍도 하기 힘드니까요. 소유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말이 쉽지 세 번씩이나 그런 실천을 했을 때는 필히 인생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있는 거겠지. 뭐 이렇게 생각하고 맙니다. 거기까지가 제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일 터이니까요.

세상에는 자칭 타칭 사회복지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한평생 자신을 희생한 고귀한 정신들이지요. 그럼에도 굳이 제가 우총평씨를 여러분에게 소개드리는 것은….

성직자도 아니고 재력가도 아니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자랑할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할 중증 장애인…. 두 다리가 없으니 여름에는 무좀 안 걸리고, 귀찮게 발닦을 일도 없다고 자랑합니다만, 옆에서 보기에는 안타까운 사람.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는 사람. 자신의 덕행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

이제는 이런 사람이 사회에 더 알려져야 할 때가 아닐까요?

덧붙이는 글 | 현재 <프란치스코네 집>에는 강성아(뜨리아)라는 여성 자원봉사자 한 분이 우총평 원장님을 돕고 계십니다. 뜨리아는 벌써 7년 넘게 우총평 원장님을 돕고 있는 30세의 아가씨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회복지 시설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중복장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힘이 필요합니다. 뜨리아는 그런 삶을 7년 넘게 견디어 오고 있습니다. 제 눈에는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꽃다운 젊음을 중복장애아, 그리고 불우노인을 위해 바친 셈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집 연락처 (031) 94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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