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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태어났으니 소위 해방동이다. 어머니는 금방 돌아가셔서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다. 무골 호인 아버지에 계모 밑에서 자란 전라도 광주 출신 소년은 공부할 환경이 아니어서 그냥 집밖으로만 나돌았으나, 세상에 단 한가지 꼭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비행기조종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 애기 파이퍼 워리어 조종석에 앉은 신 교장, 주조종석은 보통 좌측이지만 교습 습관대로 신교장은 항상 우측에 앉는다.
ⓒ 장크리스토퍼

다섯살 땐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 장충단 공원 근처에 있던 무슨 박물관 - 본인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 천정에 매달아 놓은 낡은 복엽기를 본 뒤 싹이 튼 조종사에의 꿈은 그 이후 학교, 군대, 사회생활 어디에라도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흔 세 살되던 1987년, 엉뚱하게도 미국 뉴욕에서야 조종사 면허를 얻었다. 지금은 조종교관 자격에다가 보잉 747을 조종할 수 있는 상업용 조종사 면허를 비롯해서 온갖 면허를 다 땄다.

신상철. 자신의 말마따나 비행기에 미친 사람이다.

호기심도 많고 영리했지만 계모 슬하의 소년 신상철은 어린 시절을 설움으로 보냈다. 결국 겨우 고등학교를 마친 신은 그나마 비행기하고 가까운 공군에 자원 입대한다. 공군에 입대했지만 조종사가 되는 길은 아니었고, 순전히 제대하면 갈 곳이 없었던 이유로 장기복무 신청을 했다. 이등병에서 상사까지 12년을 공군에서 '되고 싶었던' 조종사들 뒷바라지로 세월을 보냈다.

대전 공군기술교육단에 지원해서 5년동안 교관생활을 하는 사이에 야간대학에 등록해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대한민국에서 나온 비행기 책은 안 읽은 책이 없었다. 정작 조종에 관한 책은 육군항공학교 조종교범으로 공부했고, 가끔 서울에 올라가면 명동 '딸라골목' 일본서적 파는 곳을 뒤져서 비행기관련 책이라면 모두 사 모았고, 필요한 책은 주문도 했다. 일본책을 읽으려니 자연스럽게 일본어 공부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꿈이 야무져도 조종사가 되는 길은 아득한 곳에 있었으니 당시 한국에서 조종사가 되는 길은 공군사관학교를 가거나 육군항공대에 들어가는 길이 유일한 길이었다.

해서 조종간부후보생에 지원했다. 4년제 대학 졸업생만 뽑았지만 늘상 정원미달이어서 학력제한의 문턱을 낮춘 해에 기회다 싶어 지원했지만 이번에는 나이 제한에 걸려 고배를 마셨다. 호적등본을 위조할 생각도 했고 공참총장한테로 탄원서도 제출해 봤지만, 공군하사관 출신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 길마저 막아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동안은 비행기를 잊고 살았다. 제대하고 서울로 온 뒤 아내하고 큰아들 먹여 살리는 것이 완전히 극빈 생활이라 그야말로 비행기의 '비'자도 생각할 수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옛 부대 대대장 - 유 중령이라고 했다 -이 한일합작 전자회사의 공장장으로 가면서 용인공장의 자재계장으로 데려갔는데 이때 조종사 꿈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생활이 안정되자 지병(?)이 도진 것.

이후 인도네시아에 파견 나간 것을 기화로 맛을 본 외국물을 계기로 자신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는 한국보다 외국이 낫겠다 싶어서 이란 공군에 전기기술자로 지원하는 등 이제는 계속 외국으로 돌았다. 당시는 팔레비 시절이라 이란 국내 정정이 불안할 망정 경제생활은 풍족했다고. 지금도 부인은 이란에서의 2년 동안이 생애 최고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한다고 전한다. 한국에서 봉급이 미국 돈으로 환산해서 200불 정도였는데 이란에서는 월 1500불씩을 받았었다는 얘기.

그러나 이란에서의 꿈같은 생활은 팔레비의 몰락과 더불어 끝이 났다. 베트남 탈출을 방불케 하는 공항 탈출 작전 끝에 스위스 취리히에 왔지만 챙겨 가지고 나온 돈 만 불은 이리 저리 찢겨 없어지고, 그래서 정착한 곳이 아르헨티나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의 4년 반도 중간에 포클랜드 전쟁으로 조용치를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미국행을 결심하고 해오던 전자수리상 가게를 처분해 마련한 1억2500만 페소는 전후 인플레로 기껏 미화 780불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 항공료가 3000불인 마당에 780불만 손에 쥐었으니, 그나마 80불 정도로 애들 먹일 거 사고 나니, 700불이요, 하는 수 없이 미국에 있는 지인들 도움을 받아 다달이 갚기로 하고 미국에 입국했다. 2300불 빚을 지고 시작한 미국생활이니 오죽했을까?

처음에는 메릴랜드(Maryland)로 왔지만 돈벌이도 시원치 않고, 하는 수 없이 가족들을 뒤에 두고 혼자 뉴욕으로 왔다. 그저 비행기에 미쳐 지내온 인생이니 보이는 게 또 뭐였겠는가. 다시 취직자리라고 구한 곳이 대한항공 화물터미널. 기술자로 취직하고 가족들을 데려와서 플러싱에 정착했다.

이후 시간만 났다하면 가는 곳이 생겼으니 L.I.E. Exit 49S 루트 110선상에 있는 리퍼블릭 에어포트(Republic Airport)다. 괜히 비행장 주차장을 배회하면서 비행기 뜨고 내리는 것을 보는 것으로 눈요기를 하던 중, 비행기를 닦고 있던 젊은 미국인을 만난 것이 계기가 돼서 비행기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됐다. 이 젊은이가 자신과 데리고 간 아이들 둘(둘째 애까지 나서 당시에 네 식구였지만 비행기 소리만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부인은 오지 않았다)을 4인승 비행기에 태우고 사뿐히 날아오른 것.

이 사건이 신상철에게는 쥐약(?)이 됐다. 비행기 타는 거 그거 별 거 아니로구나, 싶어진 신씨는 이후 돈만 손에 쥐었다하면 시간당 100불이 가는 비행기 타기를 계속 한 것이다. 당시 부인은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자신은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네 식구가 살아갔는데, 걸핏하면 돈을 챙겨서 비행장으로, 비행장으로 사라지는 신씨를 부인이 수상하게 생각한 것도 당연한 일. 얼마 안 가서 탄로가 나고 사단이 났다.

이후 2년간은 다시 비행장과는 멀리 지냈다. 부인하고 이혼 직전까지 갔던 탓.

안되겠다 싶어서 대한항공을 그만 두고 사우디항공으로 전직했다. 근무지는 사우디였지만 봉급이 3배라 갔고, 1년동안 돈을 벌어서 돌아왔다. 그래서 시작한 사업이 자동차 얼람, 스테레오 설치 사업. 사업이 제법 됐다.

그러나 이마저 얼마 안 가서 어려워진 것이, 비행기 병이 도진 데다가, 자동차메이커들이 출고할 때 아예 오디오 얼람, 이런 등속을 장착해서 차를 내놓자, 비즈니스 영역이 무디어진 것이다.

이에 신상철씨는 여기서 아주 인생의 도박에 들어갔다. 아예 가게문을 닫아걸고는 조종사면허시험에 매달렸다. 그래서 얻은 것이 Private Pilot License였다. 나이 마흔 세 살 때다. 조종사면허를 얻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부인은 다시 불평을 시작했고, 신상철씨는 내친 김에 가게를 아예 폐쇄하고 멀리 오클라호마 비행학교로 훈련을 떠나버렸다. 석 달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고, 결국 계기비행, 상업용 비행조종면허, 쌍발기, 교관과정 모두를 끝내고 해당 면허를 모두 취득했다.

▲ 고향에 비행학교를 설립해서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신상철 교장. 오는 6월달에는 그 꿈을 시동한다.
ⓒ 장크리스토퍼
그리고 나서 설립한 것이 뉴욕한인비행학교다. 비행학교 교장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운영이 쉽지 않아서 미국학교에서 시간제로 교관을 했다. 박봉이었지만 경력을 쌓는데도 필요하겠고 해서 열심히 했고 이후 프리랜서로 미국사람 비행기를 빌려서 교습을 계속했다.

그동안 아이들은 잘 자라줘서 큰애는 앤더슨 컨설팅(Anderson Consulting)에, 둘째는 Lehman Brothers에서 부사장보로 일하고 있다. 둘째가 작년에 비행기를 사줬다. 파이퍼 워리어(Piper Warrior) 4인승 단발기지만 신상철씨에게는 최신형 코퍼레잇 젯 못지않게 소중한 아기가 됐다. 2년 동안 공부해 취득한 ATP( Airline Transport Pilot) 면허에 수상기 조종사자격증까지 갖췄고 비행기까지 가졌으니 평생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비행시간도 3000시간을 넘겼다.

누군가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보인다했던가. 오랜 꿈을 이룬 순간, 신상철씨는 내심 품어왔던 정말 꿈을, 자신에 대한 약속을 지키고 싶어졌다고 한다.

1962년 우연히 펼쳐든 미국잡지에서 보잉707이 취항해서 로스엔젤레스에서 일본 도쿄까지 무착륙비행했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내 언젠가는 비행기로 태평양을 날아 건너겠다고 했던 스스로의 다짐. 그 다짐을 실천에 옮기고 싶어졌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생긴 이벤트가 오는 6월 결행하는 미주 100주년 기념 뉴욕-서울 태평양 횡단 단독비행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났던 고국을 자가용비행기로 다시 찾는 것이다. 물론 무착륙비행은 아니다. 열 몇 번씩 내리고 뜨고 15일쯤이 걸리는 먼 하늘길이다. 이번 장거에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은 보험료 - 전체 예산 7~8만불 중 보험료만 5만불이 넘는다. 신 교장이 가지고 있는 보험은 미국내 비행만 커버되고, 외국까지 아우르는 보험은 아예 사기조차가 쉽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결국 구한다고 구한 것이 비행기를 중고가격으로 쳐서 다 커버하는 조건으로 그 돈을 모두 내야한단다.

원래는 조용히 개인적인 모험으로 끝내려 했던 것이 우연히 매스컴에 노출됐고, 그래서 기왕이면 이민 100주년의 의미도 살리자 해서 이민100주년 기념이 됐지만, 그러고 보니 스폰서들도 붙고 보험료 해결에도 도움은 된다고 말한다.

"미국 전역에 한인들이 사는 대도시들은 일단 거쳐서 태평양으로 들어갈 작정입니다."

뉴욕에서 워싱턴DC로, 거기서 다시 애틀랜타로, 그리고 다시 휴스턴-달라스 메트로지역, 피닉스,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시애틀, 벤쿠버 - 거기서 알래스카의 주도인 주노로 갔다가 앵커리지를 거쳐서 베링해를 건널 참이다. 당초에는 알류산열도를 따라 내려올 계획을 했는데, 기후변화가 심할 것을 고려해서 미국-러시아 사이에 비행협정이 새로 체결된 마당에 베링해를 건너기로 항로를 수정했다는 것.

베링해를 건너면 그후에는 러시아 동해안을 따라서 날아내려 가다가 캄차카반도를 지나서 사할린, 그 다음에는 일본을 거쳐서 그리던 고국 한국의 김포에 내려앉을 계획으로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전 뉴욕한인회장 주명룡씨가 여러모로 신 교장을 위해 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국 내에서의 다른 계획은 통보받은 바가 없다는 것이 신 교장 얘기다.

다만 한국에 가면 비행기를 고향으로 타고 내려가서 목포비행장에 일단 내려놓을 작정이라고 한다. 그냥 내려만 놓을 건 아니고, 목포대학과 전남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비행학교를 만들어서 한 2~3년 육성하다가 마땅한 운영자를 찾으면 자신의 이름으로 설립된 비행학교를 고향에 만들어 두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그러니 이번 비행이 단순히 태평양횡단으로 끝나는 일과성 축하비행만도 아닌 셈이다.

"사람들이 극과 극이지요. 비행기, 이러면 엄청나게 무서운 기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다른 세계 물건 취급을 하구요 - 그 반면에 호기심에다가 낭만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종사, 새처럼 날고 싶어, 뭐 이런 식 말이죠."

그러나 둘 다 아니란다. 무서울 것도 없고, 또 호기심에 낭만, 이것도 아니어서, 실제 타보고는 실망하는 사람도 많다고.

비행기 조종에는 네 가지 기본비행 스타일이 있는데, 직진수평비행에 상승비행, 강하비행과 방향전환비행이 그것들이고, 이 네 가지라는 게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는 것. 비행기 뜨고 내리는 것을 보면 속도가 빠르고 그러지만, 정작 비행기 조종간을 잡고 앉아 있으면 계기는 바쁘고 복잡하게 움직이지만 비행기 자체는 속도감을 별로 느낄 수 없다고 한다. 하늘에 워낙 높이 날아올라 있어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짜릿한 맛도 아니고 덤덤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 비행기 한 대를 유지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어갈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신상철씨 얘기다. 기름값 이래야 타는 시간만 태우는 것이니까 그렇고, 주차비에 해당하는 돈도 한달 해봐야 기껏 150불 정도에다가, 보험료, 검사비 해서 그리 큰돈은 아니라는 것이 신 교장의 설명이다.

어쨌든 한인사회에 신상철씨 같은 이가 있는 것이 얼마간 신기하다. 다 큰 어른 - 이제 곧 환갑으로 접근하는 나이에도 저다지 순진하고 외골수가 있을까 할만큼 비행기에 대한 열정이 절절하다. 그러기에 그 나이에 만난을 무릅쓰고 조종사 면허를 땄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해가 쉽질 않다.

자신이 가르친 훈련생이 처음으로 단독 비행을 하는 날은 처녀 머리 올려주는 기분으로 솔로비행패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장년이 된 순수를 대하면서, 우리 한인사회도 몽땅 비행기에 태우고 활주로를 치달리다가 비행기처럼 사뿐히 날아오를 수는 없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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