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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범
브루스로 태어나 브렌다로 성장했던 사람.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성장했으며 다시 남자로서 살고 있는 사람. 이제 그는 브루스도 브랜다도 아닌 데이비드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그는 이제서야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실험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존엄성

1967년 캐나다 위그페그에서 일란성 쌍둥이 중 형으로 태어난 브루스는 생후 8개월이 되던 날 포경 수술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의료진의 실수로 브루스는 성기를 잃게 된다. 성기를 잃은 자식을 보며 상심에 잠겨 있던 브루스의 부모는 수술과 호르몬 치료를 통해서 완전한 여성으로 길러질 수 있다는 존 머니 박사의 말을 믿고 브루스의 성전환 수술을 결심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쌍둥이 케이스'의 시작이다.

당시 의학계의 거물로 통하던 머니 박사는 성전환 수술의 전문가였다. 그의 이론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문이 있더라도 그 누구도 함부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더욱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는 독단에 빠지게 된다.

머니 박사는 정상적인 남성으로 태어난 신생아도 여성으로 길러질 수 있다는 발표를 한다. 워낙 거물급 존재였기에 아무도 그의 이론에 이의 제기를 하지 못했지만 몇 몇 의사들이 머니 박사의 이론에 대해서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자 머니 박사는 브루스의 사례를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 근거로 제시하게 된다.

그의 발표에 의하면 브루스는 성전환 수술과 호르몬 치료를 통해서 완벽한 여성으로 성장하고 있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머니 박사의 이 발표는 큰 주목을 받았고, 남성과 여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는 이론의 막강한 뒷받침이 되면서 30년 이상 페미니즘 운동 등에 강력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브랜다에서 브루스를 되찾으며 다시 데이비드로

머니 박사가 브루스가 브랜다로서의 삶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고 발표한 것과는 달리 브랜다가 된 브루스와 그의 가족들의 삶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브루스는 한 번도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이 남자아이처럼 살아가면서, 인형 놀이보다는 전쟁 놀이를 즐겼고 치마나 드레스 입기를 거부했다.

여자아이처럼 길러져 여자의 외모를 지닌 채, 남자처럼 행동하는 브루스는 왕따가 되어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자신의 외모는 분명 여성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여자가 아닌 것 같다는 혼란 속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까지 당하는 그의 삶은 고통 그 자체이며, 그 고통은 가족들에게도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머니 박사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브루스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발표를 계속한다. 독선적인 의사의 고집으로 한 인간의 삶과 그의 가족들의 행복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브루스의 부모는 브루스에게 그의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하게 된다. 브루스는 그제서야 모든 것이 확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한 번도 자신이 여자라는 생각을 가져본 일은 없었지만 남자라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브루스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게 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된다.

브루스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던 '브랜다'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다시 한번 성전환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어린 시절 성기를 잃었기 때문에 성기가 제 기능을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자신에게 '여성'이기를 강요하는 정신적 고통이 그에게는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브루스는 성전환 수술 후, '데이비드'로 다시 태어나 아내 제인 폰테인과 결혼하여 새 삶을 살아간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진실

브루스에 대한 머니 박사의 발표들은 '쌍둥이 케이스'라는 이름으로 30년 동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처럼 여겨져 왔다. 인간의 성은 환경에 의해서 길러진다는 주장의 막강한 근거가 되었으며, 브루스와 비슷한 사례의 환자들에게 같은 시술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브루스의 '진실'은 그 실체가 밝혀진 이후에도 외면 받게 된다. 브루스의 사례를 통해서 성은 길러지는 것이며, 따라서 여성은 남성과 별 차이가 없는 동등하다는 주장을 해왔던 여성계는 만일 이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들의 주장이 흔들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외면했다.

그 동안 강한 근거로 제시해 온 '쌍둥이케이스'가 거짓이라면 결국 성은 길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남녀 차별적 사고만 굳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선천적으로 차이가 있으므로 할 수 있는 일과 능력에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게 될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또한 의료계는 지난 30년 동안 자신들이 해 온 과오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한다. 그들의 눈앞에 '진실'이 있음에도 자신들의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 '진실'을 외면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성의 선천성이나 후천성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인가 여성인가라는 외형상의 특징은 무의미하며 인간은 남성, 여성 그 이전에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 정체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머니 박사는 브루스가 '여성'을 강하게 부정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반대파의 주장에 지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브루스에게 자신의 무리한 치료를 받을 것을 강요한다. 자신의 의학적 업적을 위해서 한 인간의 삶을 짓밟은 것이다. 그는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했으며, 진실을 외면한 그의 발표는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진실이 되어 강하게 작용했다.

브루스가 고통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진실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머니 박사의 입을 통해서 발표되는 이야기들을 진실로 믿게 된 것이다. 왜곡된 진실이 얼마나 죄악인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일 자체가 인간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저렇다'라고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자로 길러지고 여자의 외모를 가진 브루스가 남자였다는 진실은 충격이었다. 브루스에게 아무리 '여성'을 강요해도 그의 진실은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한 인간에게 억지스러운 것을 강요하고 주입시킨다고 인간적 정체성마저 강요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성기의 모양에 따라 인간의 정체성이 결정되고, 행동과 말투, 의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정체성이 그의 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남성스러운 여성도 여성스러운 남성도 그 자체로 인정을 받아야지 그들에게 여성답기를 남성답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 여성답다는 것도 남성답다는 것도 모두 인위적인 편견일 뿐.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 - 여자로 길러진 남자 이야기

존 콜라핀토 지음, 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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