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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말이 있다. 그 색안경에 따라 세상은 빨간색이 될 수도, 파란색이 될 수도 있다. 색안경의 품질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을 구분치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일에 대한 편견과 독단을 지적하는 말이지만, 사실 우린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결국 편견과 독단을 벗으려면, 가끔 색안경을 바꿔 쓰는 수고쯤은 감수해야 한다. 하나의 잣대, 하나의 색안경만을 고집한다면 필경 사물에 대한 전면적 통찰에 이르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린 사실 그 자체를 직접 견문할 수 없어 신문, 방송, 인터넷 등 언론이 제공하는 색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일종의 '전문(傳聞)'인 셈이다. 형사소송법은 이른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전문 진술의 증거능력을 제한하고 있다, 허위개입의 여지가 많은 전문진술을 유죄인정의 증거로 사용하려면 엄격한 증명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신문이 제공하는 이른바 전문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늘 유동적 상태에 있다. 더욱이 일부 신문이 정치적 선호에 따라 사실을 취사 선택하여 편집하고 있다는 점에 이르면 언론에 대한 의심은 어떤 면에서는 합리적인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선거, 그리고 권력과 언론의 불협화음에 대한 한 신문의 해석론은 누구에게나 권장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색안경은 아닐 성싶다. ㅈ일보의 한 논설위원은 "본격 대선이 시작도 되기 전에 정치권과 언론계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정치인들의 과민성과 언론계의 내분"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더 나아가 이 기사는 "권력이 언론에 압력을 가하는데 또 다른 언론이 권력의 시녀(侍女)를 자처하며 다른 언론들을 몰아세웠고,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과 '한경대(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대한매일)'로 불리는 언론계 내분이 대선 후보들의 도에 지나친 특정언론 배척이나 "내가 대통령이 되면?"식의 공공연한 대(對)언론 협박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고 진단한다.

아마도 정치인들의 과민성이 권력과 언론의 때아닌 전쟁을 만들었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것이 특정 후보의 대선전략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개연성도 높다. 그러나 언론은 늘 하나의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전제라면 모를까 이른바 언론계 내분이 이 때아닌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의 비판을 자초한 언론 스스로의 허물도 있을 터인데, 오로지 원인은 외부의 적(?)에만 있다는 해석을 믿기는 더욱이 어려운 것 같다.

첫째, 권력과 언론이 싸울 때 항상 권력이 옳다거나 언론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권력의 불법, 부당한 언론 개입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언론이라고 해서 권력의 적법, 정당한 법 집행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권력과 언론의 갈등관계는 관전자인 대다수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실보다는 득이 많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시절 권력과 언론의 밀월관계가 민주화를 얼마나 지연시켰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던 토마스 제퍼슨의 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민사회의 양식은 권력의 불법, 부당한 언론 압살에 대해서는 당연히 언론과 손잡고 권력에 맞서 싸우는 것이기에 권력과 언론, 시민사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위해 어느 정도의 갈등은 생산적인 것일 수도 있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권력이 있듯이, 같은 이유로 비판받아 마땅한 언론이 있음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둘째, "권력이 언론에 압력을 가하는데 또 다른 언론이 권력의 시녀(侍女)를 자처하며 다른 언론들을 몰아세웠고,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과 '한경대(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대한매일)'로 불리는 언론계 내분이 권력의 언론경시증을 낳았다는 해석은 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미국 <시애틀 타임즈>의 발행인인 프랭크 블래든은 뉴스와 공익보다는 단기간의 이익을 추구하는 미디어 복합기업들로 인해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다양한 언론은 미국 헌정질서를 지키는 감시견이라고 주장한다.

굳이 딴나라에서 원용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법원도 같은 생각이다. "언론사가 타인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범위가 넓은 만큼, 자신에 대한 비판의 수인 범위도 그만큼 넓어져야 하며, 매체간의 광범위한 상호비평의 활성화는 언론의 부패를 막는 안전판이자 국민의 정보선택권을 넓혀 올바른 여론형성에 기여하는 것이고, 국민들은 자신들의 의사결정을 위하여 개개 언론사가 공급하는 다양한 의견을 타 언론사에 의한 비판과 함께 접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국민이 여러 개의 색안경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정한 거래만 보장된다면 소비자 후생측면에선 진보라 할 일이다. 오히려 민주주의 적은 여론 독과점에 있다. 특정 신문들이 여론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면서, 다른 일부 여론이 언론계의 내분을 불렀고, 그것이 권력의 대언론 협박을 자초했다는 해석은 아무래도 신세대식 트렌드&아젠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 김택수 (변호사, 법무법인 정세)
ⓒ 희망네트워크
물론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후보들의 여러 공약과 정책 중 언론관에 대한 검증도 빼놓을 수 없다. 후보들 스스로도 유불리만을 따져 피할 일도 아니다. 언론도 자신의 색안경만을 검증의 잣대로 삼을 일은 더욱 더 아니다. 누가 더 민주주의적 여론 형성의 가치에 충실한지를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먼훗날 떳떳한 역사의 기록을 남길 결심이라면 언론 스스로의 허물에 대해 용기있는 기자들의 고백과 참회도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아무래도 "네 탓이로소이다"라는 자탄만으로는 미래의 트렌드를 따라 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모니터링 칼럼을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김택수씨를 비롯해 이용성 한서대 교수, 김창수 민족회의 정책실장,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방인철씨,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 권오성 목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권오성 목사, 소설가 정도상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김근식 교수, 권오성 수도교회 목사, 대학생 오승훈씨,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고 있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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