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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겨울이라는 계절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란 이런 것이다. 부엌에 있는 상자에서 귤을 꺼내다 머리맡에 한 무더기씩 쌓아놓고 까먹으면서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만화책 따위나 읽는 모습. 그러다가 누군가 '야, 눈온다'하고 소리를 지르면 '어디, 정말' 하고는 뛰어나갔다가, 또 한참 후에 새파랗게 언 손발은 아랫목 이불 밑에 묻어둔 채 귤을 씹으며 무용담을 떠들어대는 모습. 내게 귤이란 눈만큼이나 단단히 새겨진 겨울의 아이콘이며, 향수와 미각에 연결된 한 자락이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웬만하면 우선 귤 한 상자를 들여놓았다. 언젠가 차도 없고 배달도 없던 초등학교 삼사학년 무렵, 걸어서 한 삼십 분 길의 과일도매상에서 산 만원짜리 귤 한 상자를 한 살 터울의 작은누나와 함께 눈길에 썰매 삼아 밀고 끌며 옮겨온 적이 있었다. 그렇게 눈길을 지나온 손발과 볼을 쿨럭쿨럭 연탄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요란한 아랫목에 묻고, 그 눈길에 묻어온 얼음기와 신 맛을 이기지 못해 눈도 차마 못 떠가면서 또 귤 몇 개를 까먹던 흥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나의 외할머니. 하루 종일 장바닥에서 부대끼느라 파랗게 언 손 한 쪽은 아랫목 이불 밑으로 밀어넣으며, 또 한 손에는 귤 천원어치가 들어있는 검정비닐봉지를 외손주 눈가에 흔들며 '우리 은식이 잘 먹는 귤 사왔지'하고 눈웃음치던 외할머니의 귤냄새처럼 향긋하던 몸내음을 잊을 수 없다.

부모님은 귤을 너무 많이 먹으면 손발이 노랗게 변한다고 겁을 주기도 하고, 하루에 몇 개 이상은 먹지 말라고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나는 어쨌거나 귤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한 철 지나면 귤에 물릴 만해서 눈이 녹았고, 그러면 또 개학을 해서 학교 가는 재미에 귤 그리운 걸 잊고 다른 계절을 지냈다.

군 생활을 할 때도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은 초컬릿과 청량음료보다도 과일이었다. 입대 초기에는 물론 누구나 초컬릿 따위 단 것을 찾게 된다. 그렇지만 막상 영내매점(PX)에 드나들기 시작하고부터 그런 것들이야 사서 먹으면 그만이지만, 과일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짧은 후방근무를 마친 부대가 전방 철책 지역으로 투입되고부터는 가끔 휴가나 외박 복귀자들 편에 과일 맛을 보는 일도 딱 끊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궁하면 통하기 마련인지, 그렇게 과일도 없이 보내야 할 군대에서의 첫 겨울을 최전방 철책지대에서 맞이하던 1999년,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제주도의 감귤 농가에 평년의 서너 배를 웃도는 이상풍년이 찾아왔고, 그래서 가격이 폭락해 멀쩡한 감귤들이 썩어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방부에서는 군의 보급수송망을 통해 그 감귤을 적극 소비하기로 했고, 바로 그 귤 상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제주도와 가장 멀었을 우리 부대까지도 순식간에 옮겨져 소대 당 열댓 상자씩 나누어졌다.

게다가, 우리 부대의 지휘관이 제주도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제주도 농협에서 '특별히' 추가로 보내온 귤상자가 2차로 도착하면서, 전방 소초의 좁은 공간에도 달랑 천 원 짜리 귤상자가 그득그득 쌓이기 시작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애굽에서 탈출해 사막에서 굶주리던 히브리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 '만나'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하필 내가 군에 와서 처음 맞는 겨울, 그래서 마침 귤이 몇 개라도 먹고 싶었던 그 때 그런 '귤벼락'이 쏟아진 사실을 내가 어떻게 심상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귤을 먹을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곤 했었다.

어쨌건, 말리는 사람 없이 마음껏 먹는다면 한 사흘에 한 상자씩은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귤을 먹어댔다. 세 끼니 밥을 먹은 뒤엔 입가심으로 서너 개를 먹었고, 또 전방인지라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세수하고 앉아서 열 개, 발 닦고 앉아서 또 열 개 하는 식으로 귤을 먹어치웠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군대에서는 원래 그 음식을 좋아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이전보다 많이 먹게 되며, 또 집착하기까지 하게 된다. 귤 상자가 들어온 첫 며칠간, 간부들은 귤 배급량을 조절하고 통제하기에 골몰했고, 병사들은 그렇게 나누어 받은 몇 개의 귤을 누가 뺏어갈세라 알뜰히 챙겨가며 먹어 치웠다. 밤샘 경계근무의 피로를 오전 잠으로 달랜 노곤한 오후에는 분대별로 귤 내기 농구를, 제법 치열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평소 실력의 두세 배를 먹어치우는 군인들이었지만, 서른 명 남짓한 소초에서 스무 상자가 넘는 귤을 '썩기 전에' 소화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딱 1주일이 지나갈 때, 이미 귤은 적절한 수준 이상으로 섭취되고 있었고, 더 이상 병사들은 할당받은 귤을 도둑맞을까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한 사나흘이 더 지났을 때, 귤은 이젠 '맛있는 음식'에서 '부담스런 숙제거리'로 변해 있었다. 더구나 상자 밑바닥에 들어있던 것들이 무르다 못해 썩기 시작하자 초반 궁할 때는 하루 십여 개에 그치던 배급량이 수십 개로 늘어났고, 귤은 하루아침에 소초 생활의 가장 부대끼는 물건으로 바뀌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젠 경례자세가 불량하거나 경계근무 도중 잡담을 하다 걸리는 병사에게 '팔굽혀펴기 30회' 대신 '귤 세개 원샷'의 형벌이 주어졌고, 휴식시간에는 '귤 먹이기' 농구나 족구 시합이 벌어졌다. 어릴 적 어른들의 말씀이 빈말이 아니었다 싶게 병사들의 얼굴과 손은 하나씩 노랗게 물들어갔고, 화장실에는 채 소화되지 못한 귤 알갱이들의 흔적이 굴러다녔다. 그렇게 그 해 겨울, 생각지도 않았던 전방 철책에서 나는 '원 없이 귤을 먹고 싶은' 어릴 적 소원을 이루었고, 밤이면 쓰린 속이 밀어 올리는 신물을 다스리느라 잠을 설치기까지 했었다.

얼마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는 나흘간의 짧은 휴가를 받아 집에 올 수 있었다. 아침 일곱 시에 출발했지만 간신히 밤 일곱 시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던 그 날, 경황 중에도 식구들은 '귤 귀신이 왔다'며 귤을 들이밀었고, 나는 어머니 앞에서나 간신히 두세 개를 먹는 척 했을까, 차마 넘기지를 못했다. 내내 강하려니 싶어 불사조인 줄 알았던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 입맛도 그리 달지는 못했겠지만, 최전방에서 군 생활하느라 고생한 아들이 물릴 지경으로 귤에 묻혀 살았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있는 사람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단단히 질렸다고는 해도 꼭 한 달쯤 지나고 나서 나는 다시 귤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많던 귤들을 당장 문 밖에 허리까지 쌓여있는 눈 속에다 묻었으면 하나씩 녹여먹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을 하면서, 다음 휴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휴가를 나왔을 때, 이미 산 아래는 개나리가 피고 있었고, 바로 몇 달 전, 한 상자에 천 원씩 먹었던 귤의 값은 원래 크기의 절반만큼 말라붙은 듯한 것 서너 개에 천 원씩 할 만큼 올라 있었다.

올해도 날이 서늘해지면서 모과의 향을 떠올렸듯이, 바람이 차가와지자 귤의 냄새가 느껴진다. 요즘에도 주기적으로 '파동'이나 '폐사'로 인해 밖에서 남는 음식만 골라서 폭식하고 있을 군인들을 생각하고, 또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면 그 시절 끔찍스럽던 눈보라를 떠올리며 가슴을 두드릴 것이다. 올해는 눈이 내리면, 따뜻한 아랫목에서 귤 상자를 끼고 굴러다니며 한 열 권 짜리 소설책이나 읽어대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김은식의 홈페이지 : http://www.kes.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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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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