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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마이트'가 지나간 자리
처음 <초보목수이야기>라는 부제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목수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올려야지 마음먹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첫 번째 글을 쓴 것이 년 초의 일인데 이제 겨우 세 번째 글을 띄우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여름 계절학기 수업을 들었던 7월 한 달을 제외하고는, 여름방학 대부분 주당 40시간의 목수 일을 하며 보냈습니다. 때때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게을러 가을학기 개강을 며칠 앞둔 이제서야 다시 컴퓨터에 앉았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터마이트'(Termite, 아래 상자기사 참조)라고 불리는 '흰개미'입니다. 대개의 미국집들이 그러하듯, 제가 있는 이곳 학교 아파트 역시 실내가 나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계속적인 수리와 보수가 필요합니다. 목재라는 자재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작업은 흔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빗물이 외벽을 타고 실내로 스며들어 나무가 썩었다든가, 그 나무를 덮고 있는 석고보드(Drywall)에 균열이 생겼다든가 하는 일들이지요. 따라서 이사를 가고 빈집이 되는 경우 점검관이 집을 매우 꼼꼼하게 조사하여 수리하거나 보완해야할 것들을 작업지시서로 만들면 그에 따라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목공일에 있어, 이러한 작업의 원인제공자 중 가장 난처한 것은 바로 터마이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죽은 나무만을 먹는 습성 때문에, 건축자재로 사용된 목재가 그들에게는 아주 좋은 먹이감이겠지요. 그것이 집의 뼈대를 이루는 기둥이건 마룻바닥이건간에 개의치 않고 말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목재들은 석고보드 같은 내장재로 덮여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연히 알게 되어 석고보드를 들어내고 안을 들여다본다 할지라도, 이미 터마이트의 무리가 한바탕 포식을 하고 지나간 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후에 남겨진 잔해는 전쟁 뒤에 남겨진 참혹한 현장과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무결을 따라 먹어가버린 뒤라 남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냥 손으로 건드리면 부서지기 쉬운 종이와 같은 형태일 따름이지요. 누군가는 골다공증 걸린 뼈조직에 비유하기도 하더군요.

터마이트 자체가 인간에게 병을 옮긴다든가 하는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스개소리처럼 기둥을 다 먹어치워 지붕이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렇다 해도 건물의 골격을 이루는 목재를 하나씩 먹어치운다는 것은 건물의 근간을 흔드는 중차대한 일임에는 틀림없겠지요.

터마이트(Termite)란?

▲ 터마이트

'흰개미'는 '개미'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곤충이다. 영어로는 'white ant'가 아니라 'termite(터마이트)'로 불린다. '개미'와 '벌'의 중간이며 분류학적으로는 '바퀴벌레'에 가깝다.

이미 2억여년 전에 지구상에 출현했으며 약 2,000여종이 주로 열대 및 아열대지방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는 '일본흰개미'만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난 97년 산림청 임업연구원 조사에서 '집흰개미'까지 발견되어(진주 부산 등) 학계에 충격을 준 바 있다.

흰개미는 끊임없이 나무를 갉아먹어야 생존한다. 뱃속에 공생하는 원생동물이 나무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의 섭취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 원생동물은 흡수된 셀룰로오스를 분해, 흰개미에 영양을 공급하며, 그 배설물은 흰개미 유충의 먹이로 공급된다.

일본흰개미는 서울 주변에서도 발견되며 휴전선 이남 전역에 분포한다. 추위에는 강하지만 건조(물 없음)에 약해 습한 목재에서 살아간다. 1개체의 코로니(집단) 수는 1만-2만마리로 적당한 생활장소를 찾아서 집단으로 이동한다.

목조 건축물에서는 토대 기둥 마루틀재 마루판 등의 하부재를 수평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 이 피해는 지난 일본 고베 대지진 때 확인된 바 있다. 당시 심하게 파괴된 목조 건축물의 대부분은 흰개미의 피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집흰개미는 1개체의 코로니가 1백만마리에 이르며, 물을 운반해서 건조된 목재를 공격하는 등 그 피해가 가공할 정도이다. 목재만이 아니라 지하의 케이블선, 주택의 벽, 단열재까지 공격한다. 아열대지역에서는 목재로 만든 학교 교사 1동이 2-3개월만에 파괴된다고 한다.

<'주간 내일신문' 기사 인용>
http://www.naeil.com/weeklynaeil/
naeil/news/286/286451.html / 주간 내일신문
몇 주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비어 있던 어떤 아파트를 수리하는 공사가 끝나고 페인트팀이 도색을 하다 이상한 흔적을 발견하고 제가 일하는 목공소로 긴급히 연락을 해왔습니다. 아무래도 터마이트로 의심된다고 말입니다.

현장에 가서 석고보드를 들어내고 벽을 뜯어보니 목재기둥들의 삼분의 일 정도가 이미 먹힌 상태였습니다. 터마이트들이 우글거리는 현장을 덮친 셈이지요. 이런 해충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페스트 컨트롤'팀에서 진압을 한 이후에 다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입주자의 입주예정일이 임박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기는 했지만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 말입니다. 반쯤 먹혀 들어가 힘없이 사그러지는 목재를 들어내고 새로운 기둥을 차례차례로 세우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찌보면 터마이트란 녀석이 그리 낯설지가 않다고 말입니다.

목표에 조용히 스며들어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존재가 어디 터마이트 하나뿐이겠습니까? 게으름이나 거짓말이 그렇고, 욕심과 분노가 그러하며, 자만심이나 이기적인 마음이 그렇겠지요. 정작 본인도 모르게, 아무렇지도 않게 스며들어 조금씩 그 영토를 확장시켜나가다 보면 어느새인가 우리 삶이 흔들릴 정도로 잠식당한 참혹한 현장을 발견할 때가 있으니 말입니다.

좀 주제넘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쟁이니 투기니 하는 어지럽고 시끄러운 사회 문제로 가득찬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딘가에서 조금씩 시작된 터마이트의 다른 변형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터마이트는 그 해악을 충분히 증명해주는 아주 명백한 증거를 남기는 반면, 우리 인생의 터마이트들은 그렇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 후자의 경우가 더 심각한 일이겠지요. 일하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가 남긴 좋지 못한 흔적 혹은 나를 이미 잠식한 터마이트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이래저래 목공일에는 좋은 반면교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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