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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아침 직원회의 시간은 침묵 그 자체다.
"직원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교무부장이 일어나 개회를 알린다. 그러나 개회는 교무부장에게만 중요하다. 아니, 부장 모두에게는 최소한 중요하다. 최소한이란 필요한 부분만을 의미한다. 그 외의 부분은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직원회의의 최소한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부장들에게는 자신의 직급 서열을 아는 것이고, 담임에게는 자기가 아이들에게 전해줄 지시사항만을 분별해내는 것이고, 비담임에게는 자신과 관련된 학교 업무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비담임 대부분에게 최소한이란 없다. 그저 의례적인 시간일 뿐이다.

교무부장인 말뚝이가 전날 술이라도 잔뜩 마신 날은 아직 덜깬 목소리로, 여전히 혀가 꼬부라지는 말투로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기도 하지만, 아무도 그 걸 탓하지 않는다. 아니 탓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웃지조차 않는다. 그만큼 직원회의는 의례적인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밥을 먹듯이, 뒤가 마렵지 않아도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신문을 집어들고 뒷간을 찾듯이, 그저 일주일에 두 번 정해진 요일에 형식적으로 전 직원이 모여 그렇고 그런 소리를 듣는 시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부장은 자신이 발언할 순서를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부장끼리도 순서가 있어 교무, 연구, 학생 순서로 할 말을 해야 한다, 담임은 그들이 하는 말 중에서 자기가 반에 올라가 전해주어야 할 사항들을 적당히 적어두면 된다.

그래서인지, 어떤 담임들은 그날치 교재 연구를 하다가도 이 거다 싶은 사항은 기가 막히게 받아적지만, 얼띤 사람은 직원회의가 다 끝나고 나서야 옆 사람에게 미안한 얼굴로 묻기도 한다.
"오늘 중요한 거 뭐 있었어요?"

어떤 사람은 신문을 뒤적이기도 하고, 여성지를 침 발라넘기는 선생도 있고, 소설책에 코를 박고 정신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저 초임 발령의 몇 선생만 눈을 빛내며 직원회의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 집중력도 한 학기가 지나기 전에 시들해진다. 지시하는 사항도, 전달하는 것들도 다 그날이 그날이니까.

그런데 그 아침의 직원회의는 좀 달랐다. 아니, 말뚝이가 직원회의를 시작하겠다고 한 말은 똑같았다. 연구 부장은 기껏해야 지도안을 언제까지 내달라는 것이었을 뿐, 특별한 무엇은 없었다.

이제 학생부장의 차례였다.
아이들에게 터미네이터로 알려져 있는 그는 늘 같은 얼굴에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웃음이 없는 사람, 그래서 어쩌다 그가 웃으면 마치 인조 인간이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은 일부러 그가 교문지도 하는 시간을 피해 등교하기도 할 정도였다. 목소리 톤도 늘 일정해서, 듣는 사람에게 역시 인공적인 음색처럼 느껴지는 그가, 그날은 자기 차례에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담임선생님들께 알려드립니다. 아주 긴급한 사항입니다."
평상시와 다르게 높아진 목소리와 긴급하다는 말에 들어간 꼿꼿한 긴장감이 선생들을 집중하게 만든다.

"요즘 학교 폭력 때문에 학생부로 답지하는 공문이 한 달이면 수십 종입니다."
답지? 공문도 답지라는 말을 쓸 수 있나? 하긴 답지가 한군데로 몰려든다는 뜻이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 가만, 터미가 저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니 뭔가 큰 일이 있긴 있나보지.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잡생각을 머릿속으로 굴리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말은 계속 마이크를 타고 교무실 안을 쨍쨍 울린다.
"오늘 아침 긴급한 공문이 왔습니다. 경찰서에서 온 건데요, 학원폭력실태를 조사해달라는 겁니다. 학급 함에 설문지를 넣어 놓았으니 학급 조회에 들어가 바로 작성하셔서 통계까지 내 제출해주십시오. 통계 용지는 설문지 제일 위에 놓아두었습니다. 아침 조회 끝나자마자 학생부에 꼭 내주셔야 합니다."
아니, 이제는 경찰서에서까지 학교에 공문을 보내나?

교육개혁 차원에서 공문을 줄인다는 얘기가 엊그제 같았는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공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불만이 교사들 사이에서 늘어나고 있었다. 교육청에서 보내는 공문만도 셀 수가 없을 정도인데, 무슨무슨 기관에서 협조 공문을, 그것도 교육청을 통해 내려보내고, 이번에는 아예 경찰서 공문이 따로 접수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학교 폭력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더니 신문이나 방송이 온통 그것으로 도배질이었다.
"이건 분명 고위층 아들이나 딸이 폭력에 한 번 시달렸던 때문일 거야."

갑자기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학교폭력에 눈 뻘겋게 뜨고 달려드는 사회 분위기를 그렇게 비아냥거린 선생도 있었다. 학교 폭력을 없애자는 거야 굳이 반대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사냥하듯이 아이들을 들쑤셔대면서 과연 학교폭력이 사라질 수 있을까? 학교 폭력은 그냥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아니라 사회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러니 그 해결 방법도 역시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 교육적 입장을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할텐데, 지금처럼 흥미 만점의 해결 방법은 달구어진 냄비 속의 팝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교육 환경이 좋아져야 하고, 입시 중심이 아닌 인성교육 중심으로 교육 정책도 바뀌어야 하고, 사회의 부정적 영향에서 벗어나 올바른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비로소 학교 폭력도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 아닐까? 틀에 박힌 교과서를 배우고, 좁은 교실과 운동장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해야 되는 부담감으로 머리를 싸매야 하고, 밖에 나가면 그 나이 또래의 민감한 감성을 부채질하는 온갖 유혹과 미끼가 즐비한 판국이니, 아이들이 폭력의 마수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병풍에 그린 닭이 울기를 바라는 꼴인지도 모른다.

생각은 끝이 없이 퍼져나가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그런 얘기를 터놓고 나눌 상대도 없거니와, 이야기해보았자 뾰족한 해결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닌 말을 굳이 내뱉어 놓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였다. 그저 머리 속으로만 생각하고, 불만을 안으로 삭이는 처세술에 이제 익숙해진 탓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자 나 자신에게 모멸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직원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아직도 술이 덜깬 것처럼 말뚝이가 더듬거리며 폐회를 선언한다. 정해진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래서 의견을 나누고 생각의 골을 좁히는 일은 전혀 없는 회의가 끝났다.

담임인 선생들이 부지런히 학급함에 가 설문지를 뽑아들고 교실로 향한다. 나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쨌든 또 한 번의 직원회의를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으로 스적스적 우리 반 학급함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별로 걸릴 것도 없지만 괜히 직원회의는 부담스럽다.

우왕좌왕, 난리법석인 아이들을 겨우 달래가며 설문지를 받고 나자 벌써 이십여 분이 지나간다. 자리로 돌아와 설문지를 일별하고, 각 항목마다 바를 정자를 써가며 통계를 내던 나는 그만 어느 아이의 설문지를 읽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만다.
"푸하하핫! 나 원, 이것 좀 봐."
특별히 누구에게 들으라는 말도 아니면서, 적당한 크기로 올라간 목소리가 교무실에 퍼진다. 몇몇 선생들이 내 주위로 몰려든다.

"어멋!"
"허허허."
"어머, 호호홋."
"맞긴 맞는 말이네, 뭐. 허, 참."
설문지를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설문은 '폭력학생에게 빼앗긴 물건이나 돈의 액수', '빼앗긴 곳', '폭행을 당한 곳', '폭행의 정도' 등을 묻다가 마지막에 '비행학생이 자주 가는 곳은?'이라는 문항이 있었다.
그런데 한 녀석이 그 대답에 이렇게 쓴 것이다.
'비행 학생이 자주 가는 곳은?' (학생부)

그날, 통계란에 내가 정말 학생부라고 썼을까?
말썽이 잦은 아이들과 함께 길거리 농구대회를 열고부터 학교가 편안해 졌다는 어느 학교의 학생부를 떠올리며, 들어갈 때마다 위협과 짜증이 가득하던 우리 학교 학생부 분위기를 기억하고, 늘 몇 녀석씩 꿇어앉아 진술서와 반성문을 쓰는 풍경으로 떠오르던 학생부 덕분에 그날 아침 우리들의 교무실은 뜻하지 않은 웃음으로 화기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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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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