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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을 달리던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 자리가 텅 비어 보인다. 점심시간이 끝난 것이다. 좁은 땅바닥마다 물방울처럼 박혀 있던 아이들이 이제 더 좁은 교실 구석에 구겨져 또 한 시간의 졸린 수업을 받아야 할 차례다.

나는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운동장을 천천히 걸어 교무실로 들어온다. 학교 건물 앞으로 드문드문 뿌리내리고 있는 향나무며 수수꽃다리, 잎 넓은 벽오동마다 먼지가 자욱하다. 그 중 한 놈을 발로 툭 차본다. 금방 흩날릴 것 같던 먼지들은 그저 움씰 몸만 흔들고 여전히 나무에 달라붙어 있다.

오랜 세월동안 아이들의 발 밑에서 날아오른 저 먼지들이 이제는 마치 식물의 일부분이기나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 몸을 이루고 있다.

현관문을 밀다가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두어 반쯤 되는 아이들이 체육 준비를 하는지 줄을 맞추느라 법석이다. 그러나 그 풍경도 점심시간의 왁작하던 아이들에 대면 잔잔한 햇살처럼 보일 뿐이다. 숱한 아이들이 달려댄 뒤끝이라 운동장에는 역시 자욱한 안개처럼 먼지가 날리고 있다. 그 먼지 사이를 햇살이 헤엄치듯 옮겨 다닌다.

잠시, 나는 내가 문득 저 햇살과 먼지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에 빠진다. 시간이 정지해 버린 곳에 불시착한 이방인처럼 그 풍경이 낯설기도 하고 한편으론 너무나 친숙해 보이기도 한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교무실로 들어선다. 대부분 5교시 수업에 들어가고, 몇몇 선생만 남아 있는 교무실 역시 가라앉아 있다. 나도 가라앉은 발걸음으로 자리를 향해 걷는다. 마음이 그래서인지 발 밑이 푹푹 빠지는 것 같다.

교감 자리를 보니 그는 낮잠에 빠져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마치 의자가 졸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몸이 의자에 묻혀 있다. 가뜩이나 작은 몸집인 그는 졸고 있을 때는 아예 의자 속으로 기어들어가 있는 것 같다. 의자에 묻혀버린 사나이, 그래서 결국은 의자가 되어버린 사나이로 남지 않을까, 그는.

몇몇 학교를 거치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거기에 적당한 비굴과 오기와 아부를 합해 승진 시험을 보고, 늙어서 손에 분필 가루 묻히기 싫다는 말을 하며 행정직으로 옮겨앉고, 그러나 안락하고 편안한 나날의 맛에 길들여지면서, 드디어는 저렇게 행복한 낮잠을 위해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이제는 이 낡은 학교에 가장 어울리는 정지한 시간의 몸짓을 한 채 오월 어느 하루를 의자에 묻혀 흘려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무실의 고요를 적당히 맛갈스러워하며 나는 책꽂이에서 시집 한 권을 꺼내든다. 정지용이다. 이런 날은 정지용이 어울린다. 그의 잔잔한 언어와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물흐르듯 흘러가리라. 아무 곳이나 들춰본다. 눈감고도 외울 수 있는 그의 시 <유리창>이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 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자식을 잃고 썼다는 그의 시가 이렇게 잔잔할 수 있다니! 슬픔을 안으로 감추어 흐르게 하는 그의 마음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눈을 감고 시를 가만히 읊어본다.

갑자기 교무실이 왁자지껄해진다.
"어서 들어오라니까, 이놈들."
굵직한 소리에 이어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아이들의 소리도 묻어든다.
"먼저 가."
"밀지 말라니까."
"에이, 씨."

소란스런 아이들의 말소리를 뚫고 다시 굵은 음성이 높아진다.
"이 자식들, 조용히 못해. 한 놈씩 순서대로 들어와. 너, 너, 너까지 앞에서부터 네 놈은 이 거."

고개를 들어보니 말뚝이가 지시봉으로 교무실 입구 유리창을 가리키고 있다. 지적을 당한 아이들이 유리창에 달려들더니 아슬아슬하게 유리창을 틀 채 떼어낸다.

"다음 네 놈."
이번에도 아이들이 달려들어 유리창을 떼어낸다.
"깨끗이 닦아와 검사 맡을 것. 만약 먼지 한 알갱이라고 있으면 혼날 줄 알아."
"예."
"옛 써."

순식간에 아이들이 달려들어 유리창을 모두 떼어낸다. 유리창을 떼내는 소리와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말뚝이가 그런 아이들을 향해 야단치는 소리까지 뒤얽혀 교무실은 금방 아수라장이다.

그런 소란이 한동안 이어지더니 언제 그랬느냐 싶게 갑자기 고요함이 흐른다. 단잠에 빠져 있던 교감이 갑자기 웬 소란이냐는 듯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다시 의자로 파묻힌 것도 한참 지났다.

아이들은 모두 제 몫의 유리창을 떼어내 운동장 가 수도로 달려간다. 그리고 유리창이 하나도 없는 교무실로 맑은 햇살이 적들처럼 쳐들어온다.

늘 뿌연 먼지가 끼어 있고, 그 먼지들에게 차단당한 햇살이 마치 병든 사람의 얼굴처럼 창백한 모습만 비춰주더니, 아예 유리창을 떼어버리자 거짓말처럼 맑게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교무실이 너무 지저분해서 원. 교육환경이 이래서야 어디 마음 놓고 교재 연구나 할 수 있겠어?"
말뚝이가 조용해진 교무실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정말 너무 지저분했죠?"
수업이 빈 영어 선생이 말뚝이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그러나 아무도 말뚝이가 빼먹은 수업시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일 주일에 겨우 열두 시간인 수학 시간에도 제대로 수업을 하는 법이 없다. 대개는 문제지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반장을 불러 한 마디 하면 끝이다.

"내가 수업 끝날 때쯤 올라갈테니 문제 다 풀고 기다리도록. 만약 떠드는 소리가 옆 반에 들리면 혼날 줄 알아."

그리고 때때로 교실에 올라가 문제를 다 못 푼 아이들의 뺨을 그는 슬리퍼짝으로 때렸다.
"쓰레빠짝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무기라니까. 그저 얼굴이 조금 부풀어오를 뿐 부작용이 전혀 없거든."

그런 그가 오늘은 자기 수업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와 교무실 유리창을 닦게 한 것이다. 아이들은 답답한 교실에 틀어박혀 억지로 문제를 푸는 것보다는 차라리 유리창을 닦는 것이 즐거운지 운동장 건너편에서 물장난을 하기도 하고, 유리창에 물을 끼얹기도 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얼마 후, 먼저 닦은 아이들이 유리창을 들고 들어온다.
"이리 와 봐. 음, 그만하면 됐군. 잘 닦았다. 그렇게 깨끗이 닦아놓으니 좋지?"
그 아이들이 들어가고, 또 다른 아이들이 유리창을 들고 들어선다.

말뚝이는 아주 흡족한 표정이다. 아이들이 속속 유리창을 들고 교무실로 들어와 그에게 검사를 맡고, 창틀에 유리창을 끼워놓고, 교실로 올라간다. 그 아이들의 손에서 물이 뚝뚝 흐른다.

유리창이 거의 끼워지고, 마지막 아이들 네 명이 유리창을 달아놓는다. 교무실은 아까 유리창이 없을 때보다 더 맑다. 대한민국 중학교 아이들 오십 명이 빼먹은 수학시간 덕분에 한 중학교 교무실이 맑아진 것이다.

마지막 아이들에게 검사를 해주며 말뚝이 또 한마디한다.
"녀석들 맨날 공부는 죽어라 하고 싫어하더니 유리창은 잘도 닦는군. 그럼, 그렇게 유리창 닦듯 인생을 살아야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런 말뚝이 자신은 유리창 닦듯 자신의 일생을 맑게 닦아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유리창을 바라본다.

한시간 내내 아이들이 닦아놓은 유리창이 가을 하늘처럼 맑다.
제 얼굴보다도 투명하게 닦아놓은 유리창 너머로 흰 구름 한 점이 천천히 흘러간다. 그 구름을 보며 나는 또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는 지용의 시를 떠올린다. 너무 맑은 것은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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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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