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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해교전과 햇볕정책을 둘러싸고 언론과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했다. 특히 소위 '주류언론'이라 자처하는 조·중·동은 군과 정부의 서해교전 대응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최종적으로 그 칼날은 햇빛정책을 겨냥했다.

조선일보는 물론이고 동아일보도 “햇볕정책의 실패”, “햇볕정책이 북의 도발을 자극한 간접요인”, “햇볕정책으로 우리 군의 안보태세가 해이”, “햇볕정책 바람에 주적(主敵) 개념이 흐릿해지면서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에겐 고민거리가 새로 생겼을 것”, “햇볕정책, 허황된 꿈 버려라”며 햇볕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여기서 거두절미하고 특정 부분만 강조하는 것은 언론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조·중·동의 서해교전과 햇볕정책에 대한 보도태도에 대해서는 여러 지면에서 언급된 바 있다. 그런데 조·중·동 사이에도 서해교전과 햇볕정책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중앙일보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햇볕정책에 대해 다른 논조를 취하고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홍석현 회장은 중앙일보는 열린 보수를 지향하며 조·중·동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고 햇볕정책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그것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와 차별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더 나가서 도약의 전기가 되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미디어오늘, 2001년 5월 24일).

그래서인지 이번 서해교전과 햇볕정책 논쟁에서 중앙일보는 햇볕정책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김영희 대기자(편집국장 역임)와 권영빈 주필의 칼럼이 주목된다.

“DJ가 싫으면 햇볕도 싫고 DJ가 나쁘면 모든 게 나쁘다는 식이어선 대북 정책이 바로 설 수 없다. 햇볕이 군 사기를 죽이고 무력도발을 유인한다는 주장이야말로 마녀사냥식 감정대응이다. 군인은 전쟁도발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억지를 위해 존재 한다…교전규칙에 따라 무조건 사격하는 게 아니라 적의 전쟁도발인지 아닌지 판단할 줄 아는 군 수뇌부의 판단이 더 중요하다.(권영빈 칼럼「햇볕이 유죄인가」1999년 6월 18일)”

서해교전의 시점에서 보면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는 글이지만 사실은 연평교전 시점에서 쓰여진 것이다. 물론 이 칼럼은 당시에도 쏟아지는 '햇볕유죄론'에 맞서 햇볕정책을 강력히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햇볕론자'였음을 인정한 권영빈 주필도 2002년의 서해교전에 대해서는 연평교전과 사뭇 다른 입장을 취한다.

국방은 강풍이고 화해협력은 햇볕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북 정책은 강풍과 햇볕의 공존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강풍은 사라지고 햇볕만 남았다. 안보는 사라지고 화해협력만 남은 듯 정부도 그러했고 일부 햇볕논자들도 햇볕 지상주의자들이 돼버린 것이다.(권영빈 칼럼「이런 햇볕론자들…」2002년 7월 5일)

이는 연평교전과 달리 이번 서해교전에서는 군이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교전 후 북한에 대한 군과 정부의 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권영빈 주필은 햇볕론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교전 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군과 정부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태도로 해석된다(조선일보가 이 칼럼을 전혀 다르게 읽어 자신들의 주장과 동일시한 것은 일종의 왜곡이다. 조선일보 2002년 7월 10일).

김영희 대기자는 "…서해교전이 있었다고 햇볕정책 전체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전부 아니면 전무의 주장은 성급하다. 폐기돼야 한다는 그 햇볕정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남북대화의 중단을 의미하는가. 군사적인 대치상황으로 복귀하자는 것인가. 햇볕정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과 전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은 다르다…우리 함정이 북한 함정에 기습공격 당한 책임은 햇볕정책에 있지 않고 북한 경비정의 진로를 막고 고속정의 후방, 적함까지의 유효 사거리 안에 초계함을 배치하지 않은 작전실수에 있다…버릴 것은 햇볕정책이 아니라 햇볕정책에 대한 맹신이다. 초계함과 고속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필요하면 선제공격을 허용하는 선에서 햇볕정책의 기조는 유지할 필요가 있다(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햇볕정책의 운명」2002년 7월 3일)"고 주장한다.

이 칼럼은 햇볕정책의 기조는 문제가 없지만 다만 그것을 구성하는 한 축인 안보태세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아마 조·중·동 내에서 햇볕정책에 대한 비교적 합리적인 햇볕정책 옹호론으로 보인다. 그 역시 칼럼을 통해 햇볕정책을 계속해서 옹호해온 바 있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서해교전에 대한 사설에서는 이러한 합리적인 접근이 그렇게 부각되지 않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실제로는 크지 않은 논조 차이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서해교전과 햇볕정책에 대한 논조에서 미흡하지만 중앙일보의 칼럼을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가 답답한 언론현실 속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차이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 이용성 한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우리는 모든 언론이 진보적이길 원하지도 않고 그것은 사실 가능하지도 않다. 보수와 진보의 양 날개가 공존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조가 자리잡힌 언론구도를 기대할 뿐이다. 이러한 언론구도를 형성하는 데 우리 언론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것은 보수적 논조 속에서도 합리성을 갖는 것이다.

반세기 넘게 시대착오적인 냉전논리를 여전히 조자룡의 헌 칼처럼 휘두르는 신문들에게 최소한의 합리성이라도 지켜달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중·동이 전체 신문시장의 70% 정도를 점하고 있다는 냉엄한 언론현실에 비춰볼 때 조·중·동 간의 작은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 8>은 7월 25일(목) 권오성 목사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한서대 이용성 교수를 비롯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최민희 사무총장,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남북문제 전문가 김창수씨, 권오성 목사, 김택수 변호사,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방인철씨, 대학생 오승훈씨, 소설가 정도상씨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며 일반 독자 1인의 기고를 포함한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의 기고와 ‘최고-최악의 기사’에 대한 의견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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