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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실조 걸린 앙골라 어린이
ⓒ msf.org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해 정부군과 반군간의 27년에 걸친 내전으로 50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사망하고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50만명이 실향민이 되었으며, 하루 천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하는 나라, 아프리카 서남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앙골라.

강국틈에 낀 내전

우리는 아프리카 하면 가뭄, 홍수, 전쟁, 기아 등의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이들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즉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많고, 전쟁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프리카 영토를 나눠 가질 때 군인들이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 두고 자를 대고 선을 그어 사이좋게(?) 배분했다는 일화처럼 지금 아프리카에서 끊이지 않는 내전과 기아에 대한 서구사회의 책임문제가 빠져 있는 것이다.

앙골라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이루자마자 ‘앙골라해방 인민운동(Movimento Para Libertacao de Angola, 이하 MPLA)’과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ano Nacional para a Independencia Total de Angola, 이하 UNITA)’ 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독립 이듬해인 1976년 11월 MPLA가 UNITA를 물리치고 단독으로 집권했으나 그것은 내전의 끝이 아니라 본격적인 시작에 불과했다.

인접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백인 소수정권이 사회주의 성향의 MPLA 정권이 자신들에게 위협적이라고 판단해 UNITA 반군 지원을 위한 군대를 파견했으며, 미국도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중앙정보국(CIA)을 통한 무기와 군사훈련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구소련과 쿠바는 5만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MPLA 정부군을 직접 지원했다. 당시 앙골라 내전은 가히 ‘미·소냉전의 아프리카 버전’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앙골라는 독립 당시만 해도 의욕적인 국가건설 프로그램으로 주목받던 나라였다.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수천명의 쿠바와 (구)소련 의사들이 건너와 광범위한 공중보건계획의 틀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남아공이 MPLA 정부의 대항마로서 당시 야당지도자였던 후나스 사빔비(Jonas Savimbi)와 그의 UNITA 조직을 선택함으로써 국가건설 프로그램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다.

사빔비는 7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의 비상한 머리와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갖춘 인물인 반면, 최측근들의 의견조차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정도로 독선적이며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독재자이기도 했다. 그의 UNITA 반군조직은 한때 전국토의 70%를 차지한 적도 있었는데, 반군들은 점령지역의 어린이들을 수시로 잡아가 남자아이들은 전투의 총알받이로 쓰고, 어린 소녀들은 짐꾼과 성노리개로 이용했으며, 마을사람들은 반군이 지나가면 무조건 갖고 있는 모든 식량을 넘겨줘야만 했다.

사빔비는 에두아루두 도스 산투스(Eduardo dos Santos) 대통령과 MPLA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마을을 습격해 주민들을 살해하고, 농작물을 불태워 사람들을 강제로 고향에서 내쫓음으로써 국민들이 겁에 질려 자신을 따를 수밖에 없는 ‘공포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던 80년대 말 남아공과 쿠바군이 물러나고 세계적으로 동서냉전이 종식되자, 앙골라 내전을 이끌고 가던 엔진이 교체되었다. 바로 이데올로기의 전쟁에서 석유와 다이아몬드 자원을 둘러싼 정부군과 반군 지도자들, 서구기업들 간의 이권다툼과 탐욕의 전쟁으로 바뀐 것이다.

앙골라 게이트

앙골라의 주요 지하자원은 다이아몬드와 석유로, 다이아몬드는 사빔비의 UNITA 반군이,석유는 산투스 대통령의 MPLA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즉 서로가 틀어쥐고 있는 자원을 서구국가에 팔아 한 쪽은 반군진압을 위해, 다른 한 쪽은 정부군 공격을 위한 무기구입에 경쟁적으로 매달려 온 것이다.

UNITA는 자신들이 장악한 동부지방과 중앙고원 지역에 매장된 다이아몬드 판매를 통해 무기구입과 반군활동을 위한 자금을 확보해왔다. 물론 공식적으로 다이아몬드 원산지 표기를 의무화함으로써 내전지역에서 채광된 다이아몬드를 규제하는 유엔의 제재조치로 이들의 다이아몬드 판매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기업 드비어스를 포함한 세계의 보석 산업은 “피의 다이아몬드”의 유통을 금지하는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전 세계 연간 다이아몬드 생산금액 70억 달러 중 60%에 달하는 42억 달러 어치를 수입하는 미국은 사빔비를 비롯한 아프리카 군벌들의 불법적인 다이아몬드 유통을 막는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반면, 과거 민족해방투쟁을 이끌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산투스 대통령과 MPLA 지도자들은 사회주의노선을 포기하고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석유를 팔아 부를 축적했다.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나이지리아 다음으로 많은 석유가 나는 앙골라는 석유만으로 2001년에 30억~50억 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이 중 3분의 1에서 절반에 달하는 10억~30억 달러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치지도자들이 돈을 다 빼돌린 것이다. 앙골라 MPLA 정부와 서구의 정치인, 석유기업들 간의 검은 커넥션은 프랑스 석유회사 엘프와 세계적인 무기중개상 피에르 팔콘,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아들 장 크리스토프 미테랑이 연루된 소위 ‘앙골라 게이트’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여기에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석유개발기업 핼리버튼의 대표를 역임한 체니 부통령도 연루된 의혹을 사고 있기도 하다.

지난 2002년 2월 반군지도자 사빔비가 전투 중에 사망함으로써 4월 드디어 정부군과 반군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돼 27년 간의 내전이 사실상 막을 내렸다. 하지만 앙골라에서 죽음의 행렬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비록 내전은 끝났지만, 내전 기간에 모든 산업시설과 농경지가 완전히 파괴돼 식량과 의약품의 절대적인 부족 속에 수십만명이 죽음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내전이 끝나기 전에는 국토의 90%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지역(grey zone)이어서 상황의 심각성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UNITA가 점령했던 지역으로 들어가 구호활동을 시작한 <국경없는 의사회>에 따르면, 지금 앙골라의 상황은 지난 10년 간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위기 중 최악이라고 한다.

외면하는 국제사회

내전 종식 후 여행의 자유가 생겼지만, 사람들은 움직일 힘조차 없어 집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그나마 구호단체들의 도움을 찾아 갈 힘이 남아 있는 사람들도 외부의 원조량이 절대적으로 적어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연사망률이 인구 만명당 한명이면 위기상황으로 간주되는데, 앙골라 전지역 평균이 보통 만명 당 4명 수준이고, <국경없는 의사회>가 들어갔던 갈랑귀(Galangue)지역의 담바(Damba)란 마을에서는 자연사망률이 만명 당 7명을 넘어섰으며, 치핀두(Chipindo) 지역에서는 6달 사이에 주민 만 8천명 중 4천명이 사망했다.

이 단체의 한 의사는 “우리는 마을에서 다섯 살 미만의 아이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아이들 영양실조 비율이 57%에 달해 상당수 아이들이 이미 사망한 것이다. 여기에 내전이 끝나 해산한 UNITA 반군 5만명과 그들의 가족 3십만명이 더해질 것으로 예상되어(UNITA 반군은 해산하기 전 사빔비의 측근들까지도 야생버섯으로 연명해야할 정도였다고 한다) 상황은 더욱 나빠질 전망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관심이나 지원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지금 앙골라 국민들이 치르고 있는 끔찍한 고통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기업과 정부는 앙골라가 가진 자원을 둘러싼 이권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2002한·일 월드컵에서 세네갈을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빛나는 활약에 열광했던 한국의 국민들도 디우프의 화려한 발재간과 녹색의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음보마의 야생사자 같은 모습에는 시종일관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머나먼 대륙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이 ‘세계화된’ 우리의 현실이다.

덧붙이는 글 | 국제민주연대 발행 '사람이사람에게' 2002년 5,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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