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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하게 행복한 작가 김종광

▲ 소설가 김종광.
ⓒ 홍성식
어떤 이는 '김유정의 부활'이라고 했다. 누구는 '제2의 이문구'라고 그랬다. 발빠른 문학평론가 몇몇은 해학적 리얼리즘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돌아온 채만식'이라 부른다. 이 모든 극찬을 한몸에 받고있는 소설가 김종광(31).

2000년 처녀작 <경찰서여, 안녕>(문학동네)에서 구사되는 능수능란한 충청도 방언과 전성기에 이른 권투선수처럼 치고 빠지는 현란한 문체는 입을 가진 누구나 한마디쯤 칭찬을 보태게 했다. 중견평론가 김사인 역시 '종잡기 어려운 현실에 맞서는 하나의 창조적 입지'라는 말로 신인 김종광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뿐이랴, 창작과비평사는 등단 4년차의 새파란 청년에게 그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신동엽 창작기금'을 수여했고, 올해는 대산문화재단도 김종광의 미래에 신뢰를 보내며 창작지원금을 쾌척했다.

여기에 하나 더. 지난해 10월엔 그의 표현대로 '나를 무지하게 챙겨주는 착한, 그러면서도 강하고 심지 굳은' 아내 이혜정(31)까지 얻었으니 김종광을 '2002년 한국에서 가장 행복한 소설가'라 단정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듯하다.

바로 그 김종광이 최근 새로운 소설을 내놓았다. <71년생 다인이>(작가정신).

<71년생 다인이>는 어떤 소설인가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보다는 조국을, 가족보다는 민족을 생각하며 살았던 71년생 여자아이. 90년 대학에 입학해 전대협을 접했고 불합리한 남한사회의 현실에 눈뜨고선 강의실이 아닌 돌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집회장에서 삶을 배웠던 여대생. 전대협의 이름이 한총련으로 바뀌었음에도 통일과 해방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감옥까지 가는 투사. 그녀의 이름은 양다인이다.

소설은 90년대 한총련의 혁명적 투사(?) 양다인이 자신의 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나를 그냥 좀 놔둬줘라, 응. 나 먹고살기도 버거워 죽겠는데 한총련이 합법화되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니?'라는 충격적인 말을 시니컬하게 내뱉기까지의 과정을 아버지와 이복동생, 고교동창과 어머니 등 제3자들의 진술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 <71년생 다인이>
ⓒ 작가정신
얼핏 90년대 우후죽순(雨後竹筍)격으로 횡행했던 후일담 소설의 재판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일단 <71년생 다인이>는 90년대 후일담 소설에 청승맞게 들어 앉아있던 과도한 자기연민과 비극적 낭만성을 완벽히 거세시켰다.

여기에 무른 듯 보이지만 기실은 적확(的確)한 김종광 특유의 '입담'은 독자들이 자기연민과 낭만성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허용치 않는다. 이는 다수의 눈을 통해 한 사람의 생을 들여다보는 소설의 독특한 시점과도 연관이 있을 터. 이에 대에 김종광은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체질적으로 1인칭 시점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사람을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건 필연적으로 감상에 빠지기 쉽고, 오류에 봉착할 가능성 또한 높을 수밖에 없다. 소설은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을 유지해야 한다. 이번 작품의 형식은 이런 고민들 속에서 나왔다."

"우리 친구하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뒷짐을 지고 천천히 양반걸음으로 걸어도 뒷골이 땡기는 폭염의 연속. 이 뜨거운 여름한낮에 인터뷰를 위해 김종광을 만났다. 채 해가 기울기도 전이라 햇살은 따가웠고, 흘러내린 땀에 셔츠가 몸에 척척 감겨드는 짜증스러움이라니. 에라, 모르겠다. 옛날부터 이열치열하지 않았던가. "우리 소주나 한잔하지요."

벌겋게 달아오른 숯 위에 올려진 돼지껍데기는 지글거리며 익어가고, 내처 소주부터 서너 잔 들이켠 우리. 올라오는 화덕의 열기와 독주로 인해 벌렁대는 가슴. 더워서 죽을 것 같다. 그때 지나치게 정중하게 작가대접(?)을 하는 기자에게 김종광이 던진 한마디. "우리 친구하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맞다. 김종광과는 두어 번 술자리를 가졌었다. 2001년 겨울 한 출판사가 주관한 망년회였을 게다. 너나 할 것 없이 연말이면 술자리는 왜 그리 많은지. 1차, 2차, 3차로 이어지는 술판에 김종광은 만취해있었고, 여러 명의 화가들과 자정까지 퍼붓다가 그 망년회를 찾은 기자 역시 대취상태.

"아, 당신이 김종광입니꺼. <경찰서여, 안녕> 좋습디다."
"다 그렇게 말들 해유. 새삼스럽지 않구만유."
"어린 나이에 잘 나가서 좋겠수."
"그쪽만 하겠어유. 그래봤자 글쟁이지유."

마구 퍼마신 술이 이유였을까? 말펀치를 주고받던 우리는 서로에게 눈까지 부라렸던 것 같기도 하다. '새끼 건방지네. 지가 소설을 쓰면 얼마나 썼다고 개폼을 잡어' 정도가 기자의 생각이었고, '저놈 봐라. 새파란 기자새끼가 초면에 건방을 떠네' 정도가 김종광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김종광의 기억에 의하면 우리는 그 뒤로도 한두 번 더 이러저러한 술자리에서 만났단다. 역시 얼큰하게 취했던 어느 날은 "우리 동갑이니까 말 놓고 친구하자"라는 의기투합까지 갔었단다.

그러나, 그도 기자도 주량 이상으로 마시면 술자리에서 떠들었던 말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블랙신드롬 현상(일명 필름끊김 현상)'에 시달리는 사람들. 둘 다 서로에 대한 기억은 파편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긴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떠리. 불과 10여분만에 후다닥 소주 한 병을 해치우고, 두 번째 병이 탁자로 날라져올 때, 문득 그가 육친(肉親)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괴이한 느낌의 이유는 김종광도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 양다인도 기자도 71년생 90학번이고, 우리는 동일한 시대를 살아왔다는 모종의 동류의식(同類意識)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래는 서로에게 정중하게 소설가와 기자 대접을 하며 경어로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자연스런 반말투로 고쳐 쓴 것이다. 김종광의 삶과, 그의 소설,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그의 아내 이야기.

"황석영과 이문구의 소설이 좋았어"

- 소설가는 이야기꾼이잖아. 어릴 때부터 이야기꾼 기질이 있었냐?
"뭐 날 때부터 소설가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겠어? 열다섯 살 때부터 소설을 써서 밥을 벌어먹는 사람이 되고싶긴 했지."

▲ "고등학교 때야. 성욕을 주체 못하는 청소년들의 일탈욕구를 괴발개발..."
ⓒ 홍성식
- 처음으로 소설을 쓴 때는 언제지?
"고등학교 때야. 성욕을 주체 못하는 청소년들의 일탈욕구를 괴발개발 쓴 거지 뭐(웃음). 여자의 가슴을 묘사하는 대목을 읽은 친구들이 '너 여자 가슴을 한번이라도 봤냐'라며 놀리기도 했지. 대학시절에 이때 쓴 것들을 몽땅 태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까워 죽겠어. 특히 동성애자 여고생의 이야기를 쓴 <동성애>라는 작품은 진짜 아까워. 지금 읽으면 얼마나 재밌겠어?"

- 중고교 시절엔 뭐하고 지냈냐?
"별다른 기억은 없고, 그냥 책은 무지하게 읽었던 것 같어. 세칭 이야기하는 고전말고 한국소설을 많이 읽었어. 시립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지 뭐. 이외수(소설가)를 특히 좋아했었지."

- <71년생 다인이>를 보면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사실적인데 너도 '조국통일' 외치며 돌 꽤나 던지고 다닌 모양이지?
"무슨…. 심정적 지지자 정도였어. 열심히 데모(?)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은 그 시대 학생들 모두에게 보편적인 거였잖아. 대학엘 다닌다는 자체가 죄스러운 시절이었고. 하여간, 집회는 자주 나갔어. 하지만 그 시절 나만 그랬겠어? 너도 마찬가지 아냐?"

- 습작시절 경도됐던 작가는 누구야?
"황석영의 문장과 이문구의 문체를 흠모했지. 조정래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도 나를 소설가로 만든 힘 중의 하나지."

- 너를 김유정과 채만식 혹은, 이문구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황송할 따름이지. 그분들과는 단순히 몇십 년 나이 차이만 있는 게 아니잖아. 그 차이는 문학적 경력의 차이고, 그분들이 이룬 것의 뒤꿈치에라도 이르려면 한참은 더 발벗고 달려야하겠지. 개인적으론 요절한 김소진(소설가)이 채만식의 맥통을 제대로 잇고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분들을 넘어서고 싶다는 게 내 과분한 욕심이지. 어쨌건 대가(大家)들의 이름 옆에 내 이름이 붙는 건 기쁘고 영광스런 일임에는 분명해."

"결혼? 너도 해봐, 재밌고 좋아"

- 신혼이잖아. 재미 좋아?
"아내도 소설을 쓰고싶어하는 여자야. 나를 너무 잘 챙겨주지. 어느 땐 엄마같고, 어느 땐 동생같어. 시원찮은 남편 건사한다고 묵히고 있는 소설에 대한 아내의 열정이 빨리 꽃폈으면 좋겠어."

- 어떻게 만났는데?
"날 가르친 선생님(소설가 송기원)이 소개해줬어. 속된 말로 첫눈에 가버렸지. 만난 그날 밤새 술 마시고 두 번째 만나서 '결혼하자'고 그랬어. 몇 개월 사이에 후다닥 식도 올렸고. 지금은 잘 살어. 결혼생활? 해보니 좋아. 재미도 있고.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만나면 바로 결혼하자고 그래."

- 듣자니 '한 달에 100만원은 벌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던데.
"총각 때는 그랬지(웃음). 근데 결혼하니까 180만원(그는 구체적 근거 없이 이 금액을 말했는데 왜 꼭 180만원인지 기자도 알 도리가 없다)은 필요하더라. 전업작가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10월이면 아빠가 되는데 애 낳으면 더 힘들겠지. 하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계속 달려야하지 않겠어. 그래서 난 청탁 들어오는 원고는 절대로 거절하지 않아. 어차피 전업작가의 수입이란 원고료가 전부니까."

- 소설은 뭐고, 소설가는 뭘까?
"각자의 경험에 따라 동시대를 가능한한 진실에 가깝게 기록하는 행위겠지. 소설가는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이고."

- 어떤 소설을 쓰고 싶어?
"위에서 말한 것에 부합되는 소설이지 뭐. 내가 경험한 전대협과 IMF, 무너진 이데올로기 등이 소설의 재료가 되겠지."

<71년생 다인이>는 많은 부분 자전적인...

- 소설 얘기 좀 하자. <71년생 다인이>엔 자전적인 요소도 들어있지?
"아주 많이 포함되어 있어. 71년생 90학번의 전형적인 인물 중 하나가 다인이라고 생각해. 물론 내가 다인이에게서 느끼는 건 경외감과 열패감이지. 왜냐면 난 그녀처럼 신념과 열정으로 살지 못했으니까. 모델이 된 인물이 있냐고? 소설을 쓰는 내내 학교 동기인 K가 떠오르긴 했어. 멋지고 무서운 친구였는데…."

▲ "갈수록 질문이 어렵네..."
ⓒ 홍성식
- 80년대를 다루는 90년대 '후일담 소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
"난 기본적으로 후일담 소설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80년대가 그처럼 소설 몇 편으로 정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잖아. 달관과 달성으로 양분된 후일담 소설은 일종의 오만처럼 보여. 이번 소설을 쓰면서도 그것들을 경계했어. 80년대가 그렇듯 90년대 역시 환멸과 절망이라는 2개의 단어만으로 간단히 정리될 순 없잖아."

- '90년대의 객관화' 혹은, '전교조 세대의 세상읽기'라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냐?
"소설에 대한 평가야 읽고 느끼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 크게 신경 안 써. 내 의도는 80년대 세대와 90년대 세대의 차별성을 이야기해보자는 것이었어."

- 궁극적으로 네가 쓰고싶은 소설은 어떤 거냐?
"갈수록 질문이 어렵네(웃음). 불가해하고, 난해한 상황에서도 처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싶어. 내가 겪은 90년대는 개인주의, 신세대, 환멸로 정리되지만 그 속에서도 대의명분과 신념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분명 있었어. 내가 품고있는 그들에 대한 경의를 기록하고 싶어."

- 소설가가 안됐다면 뭘 하고 있을 것 같냐?
"다른 걸 하기에는 지나치게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성격인데 소설가가 된 게 다행이지 뭐. 여차했으면 룸펜으로나 뒹굴었을 텐데. 문학기자 하고 사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긴 했어"

- 준비하고 있는 책이 있냐?
"9월쯤에 창작집이 나올 예정이야. <서점 4시>(가제)라고. 친구니까 사서 읽어라. 알겠냐?"

그래도 김종광에게 하지 못하고 남은 말

인터뷰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아직 환하다. 취한 발걸음으로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 길이 차이가 많이 난다. "좀 떨어져서 걸어. 난 키 큰 사람이 옆에 오면 괜히 주눅들어." 이런 또 가시 돋친 설전을 벌이자는 말인가?

하지만 그때쯤 기자는 그의 소설만큼이나 살갑고, 따뜻한 김종광의 마음씀씀이를 벌써 읽고 있었기에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 전혀 기분 나쁘거나 하지 않았다. 소설가들의 모임이 있다며 2차를 하러 떠나는 김종광의 뒷모습. 21세기 한국문학의 한 축이 될 것이 분명한 그의 등이 든든해 보였다.

친구가 되기로 했던 그 술자리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덧붙여볼까.

"종광아, 이미 알아챘겠지만 나도 너 못지 않게 사람 좋아하고, 가슴 뜨거운 사람이다. 냉소의 제스처일랑 내처버리고 언제건 머릿고기 안주 삼아 다시 한번 낮술 하자. 네가 소설창작을 강의한다는 종로의 민예총 앞으로 일간 가마."

경찰서여, 안녕

김종광 지음, 문학동네(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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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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