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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괄한 성격에 남자 선생들과 퇴근길에 맥주집에도 자주 가고, 오백 한 잔 정도는 완샷으로 들이킬 줄 아는, 그래서 누구나 스스럼없이 이야기 건네기도 편안해 하는 수학과 처녀 박 선생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더니 킥킥거린다.

늘 청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즐겨 신던 박 선생이 오늘따라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왔다. 어깨 쪽에 레이스가 달린 그야말로 공주옷이다. 아침에 박 선생 주변의 이 선생과 문 선생이 그런 박 선생을 놀려댔다.
"박 선생, 시집 못 가더니 이젠 병까지 걸렸군. 많이 아파?"

문 선생의 말에 영문을 모르는 박 선생이 되묻는다.
"아프다뇨?"
"공주병 말야."
그제서야 눈치를 챈 박 선생, 손을 들어올려 문 선생을 때리는 시늉을 했지만, 역시 사람 좋은 평소 성격대로 자기가 먼저 키득대며 웃고 만다.

"문 선생도 저런 옷 한 번 입고 오지. 애들이 참 좋아할텐데."
이 선생, 난데없이 화살을 문 선생에게 날린다. 이 선생 역시 성격이 괄괄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며 직설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성격이다.

"이 선생님도. 나한테 저런 옷이 어디 있어요? 저런 옷이야 박 선생 같은 처녀 선생한테나 맞지, 아줌마 다된 나 같은 사람이야 어디..."
문 선생,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박 선생의 공주옷이 그리 나빠 보이지만은 않는 듯,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만져보기도 한다.

그런 문 선생을 보며 이 선생이 다시 한 마디 건넨다.
"하긴 문 선생이야 어디 저런 옷이 어울리겠나? 사람한테나 어울리지."
이 선생이 빙글빙글 웃는다. 문 선생을 놀리는 기색이 완연하다.
"어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람한테나 어울리다니? 그럼 나는 사람도 아니란 말이에요?"

문 선생, 역시 놀리는 말이라는 것을 짐작한 말투로, 그래서인지 억지로 팩 토라지는 말소리다.
"아, 그거 몰랐어? 문씨는 사람이 아니라 멍멍이잖아."
"멍멍이?"
문 선생이 무슨 뜬금 없는 소리냐며 되묻는다.
이 선생 또 빙글빙글 거리며 설명을 덧붙인다.
"거 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 있잖아. 문씨 백 명이 멍멍이 하나 못 당한다는."

엉뚱하게 한자말을 이용하는 바람에 졸지에 개만도 못하게 된 문 선생이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다. 몇 번 쿡쿡 대더니 문 선생도 질세라 한 마디 한다.
"그럼 이 선생도 우리와 종씨네."
종씨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이 선생 무슨 말이냐는 듯 눈망울을 굴린다.
"거 왜 이구동성이라는 말 있지요. 이씨와 멍멍이가 종씨라는. 그러니 이 선생과 우리 문 선생은 같은 멍멍씨지요."
문 선생이 역시 한자성어를 이용해 멋지게 한 방 먹였다.
"졌다, 졌어. 문 선생도 많이 늘었군."
이 선생이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하는 시늉이다.

곁에 있던 공주옷의 박 선생도, 자리에 앉아 들리는 소리에 귀만 기울이던 나도 그제서야 교무실이 떠나갈 듯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 바람에 다른 자리에 있는 선생들이 무슨 일인가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 쪽을 모두 쳐다본다.

그런데 일 교시가 끝나고 교무실에 내려오니 박 선생이 킥킥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 선생과 이 선생이 또 무슨 말로 놀렸다 하며 두 선생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런데 문 선생과 이 선생도 궁금한 표정이 역력하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이 선생이 한 마디 하고 만다.
"우리 공주님께서 갑자기 독이 든 사과라도 드셨나? 왜 이렇게 캑캑거리는고?"
박 선생, 이 선생의 질문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글쎄 일 교시 수업에 들어갔는데 말예요..."

청바지나 바지만 즐겨 입지 치마를 잘 입지 않는 성격인지라 괜히 어색해서 교실에 들어가기가 무척 주저되었단다. 발걸음도 바지를 입었을 때와는 달리 조심스럽고, 계단을 올라가는 데도 어디다 발을 디뎌야 할 지 멈칫거렸으며, 자꾸 뒤에서 누가 치렁치렁한 옷을 잡아 다니는 것 같아 신경이 거슬렸다나. 교실에 들어서면 아이들이 분명 놀려댈 게 뻔하다는 생각도 들어 괜히 공주옷을 입고 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 평소의 박 선생답지 않게 마음이 쓰이긴 쓰였나보다.

출석부와 책을 정말 공주처럼 앞가슴에 소중히 감싸 안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평소에는 자리에 제대로 앉아 있지도 않던 녀석들이 그날은 웬일인지 모두 제 자리에 앉아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더란다. 아니, 이 녀석들이 내 옷차림에 모두 기겁을 했나? 아니면 나의 미모에 감동하여 할 말을 잊은 것일까?

그런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며 반장의 차렷, 경례를 받고 수업을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녀석들 아침 조회 시간에 담임선생님께 수업 분위기가 나쁘다고 이미 한 차례 혼찌검이 난 터라 그토록 조용했단다.
하여간 수업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어졌는데, 칠판 가득 문제를 풀어 가는 중에 앞자리에서 두 녀석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단다.
"야, 수학 선생님 오늘 완전히 공주다, 공주."
"임마, 옷만 공주 옷 입었다고 다 공주니?"
"그래도 봐 임마. 레이스 달린 옷에 주름 치마까지 완전히 백설공주잖아."
"피. 백설공주? 임마 저 배 좀 봐라. 옷 터질까봐 숨도 못 쉬고 있잖아. 백설공주가 아니라 뱃살공주다, 뱃살공주."

평소에도 배가 많이 나와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박 선생, 그 말에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단다.
"그래 임마, 내가 백설공주든 뱃살공주든 공주는 공주 아니냐. 너 한 번 공주한테 맞아 볼래?"
그렇게 화를 내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단다. 백설공주에서 뱃살공주로 전환하는 아이들의 순발력도 놀라웠고, 또 어울리지 않게 원피스로 이미지 변신을 꾀해보려던 자신이 얼마나 엉뚱한 짓을 했는지 새삼 깨달았단다. 그래서인지 수업도 제대로 안되고, 어떻게 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며 박 선생은 이렇게 토를 달았다.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나봐요. 나야 청바지에 헐렁한 블라우스가 제격인데 말예요. 왜 맹 선생님이 늘 가장 수업을 잘 할 수 있는 복장이 교사의 이상적인 복장이라고 했는지 짐작하겠어요. 공주옷을 입으니 내가 마치 공주처럼 부끄럼만 많이 타는 사람 같아져서 아이들하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안 되더라니까요. 하여튼 내일부터 당장 다이어트 해서 언젠가는 공주옷 꼭 다시 입고 말 거야."
박 선생, 결국 또다시 다이어트로 말을 맺고 말았는데, 그 날 이후 박선생은 뱃살공주 혹은 다이어트 박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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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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