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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란, 참 묘한 음식이다. 제 입으로만 즐기면 그만인 다른 음식들과는 달리, 술만은 마주앉은 사람의 입으로 넘어가는 꼴을 봐야만 즐겁다. 게다가 마주앉은 사람이 맛있게 먹어야만 맛인 다른 음식과는 달리 술만은 감당을 못해 쩔쩔 매는 모습을 봐도 그 못지 않게 즐겁다. 그래서 다른 것과 달리 술만은 종류나 제조회사보다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먹었느냐가 중요한 음식이다.

그래서 스카치 위스키건 코냑이건, 심지어 안동소주나 진도 홍주가 되었건간에 알콜 도수가 삼사십도만 넘어가면 더 이상 맛 구분을 못하는 내 주제에도, 누가 물으면 술을 좋아한다고 답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내 평생에 가장 술을 많이 마셨던 것은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다. 신입생 환영회를 시작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은 삼사십 일 동안 술자리가 이어졌고, 수업 시간은 제 물 만난 지적 호기심 대신 새벽까지 품었던 알콜 기운만 자욱하게 발산되는 휴지기였다.

소문을 들으면, 다른 학교에 입학한 친구들은 양주에 비싼 안주도 가끔은 맛을 보는 듯도 했다. 그렇지만 지방 유학생이 유난히도 많아 '사투리 박람회장' 같던 우리 학교 선배들은 유학 비용이 빠듯했던지 술은 오로지 소주, 아니면 막걸리였다. 생맥주만 해도 첫 학기동안은 거의 맛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 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다른 학교에서는 '사발식'이니 뭐니 하는 것이 있어서 신입생에게 강제로 엄청난 술을 먹이는데 그 과정에서 술을 못 이겨 죽는 사람도 가끔 생긴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그리 강골은 못되어, 입학 후 한 두 달 동안 술에 눌려 살던 나로서는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던 선배에게 진지하게 한 번 물은 적이 있었다.

"저기…, 형. 우리 과는 사발식 같은 것 안 하나요?"
"사발식?"
"예. 그러니까 신입생들한테 술 강제로 술 한 바가지씩 막 먹이고 그러는거 있잖아요?"

과 학생회에서 무슨 일을 맡아 하던 그 선배는, 그저 농담같이 흘릴 수 없는 입장이었던 모양이다.

"음…. 그런 거 한 번 하려면 돈이 꽤 많이 들거든. 우리 과 사람이 많잖아. 그치? 요즘 학생회 예산도 완전히 바닥이고. 그냥 형이 오늘 술 한 잔 사줄까?"

어쨌건 사발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늘고, 길게 이어진 술자리에서 무수한 무용담이 피고 졌다. 각자 개인용 안주로 할당받은 막대 사탕 한 개로 간신히 쓴 맛만 씻어내며 비운 소주 두 병, 숟가락은 모두 치워버린 채 마음껏 퍼먹으라고 내준 참치찌개 한 그릇. 각자 젓가락 한 개 씩을 담갔다 핥았다 하며 겁먹은 눈빛과 섞어 주고받던 소주잔들. 대략 이런 기억들이 있다.

그렇게 마시고, 게워내고, 그 속에 또 부어댔다. 거리에 주저앉고, 전신주를 껴안으며 순진한 욕지기에 분노도 사랑도 나름대로는 꽤나 씹어댔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시절을 지나면서 술자리를 앞에 하면 나는 항상 갈등한다. 술을 마시는 동안의 그 자유로움과 순수함, 그리고 술에서 깨는 동안 배와 머리를 앓으며 감수해야 하는 불쾌감들 사이에서.

그래서 지금도 '술 실력이나 한 번 보자'는 심사로 덤비는 고릴라를 만나거든, 단연 내가 고르는 주종은 고량주다. 그것은 대학 신입생 시절동안 그렇게 삭아내린 위장으로 다시 의무방어전을 치러야 했던 대학 2학년 때의 경험 때문이다.

대학 2학년. 신입생 후배들을 맞이하자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언젠가부터 내 위장은 생맥주 두 잔만 부어도 신물을 넘겨대고 있었건만, 악귀같은 집념과 체력, 그리고 쓸데없는 조직력으로 무장한 후배놈들은 복도 곳곳에서 매복을 하고 있다가 튀어나와 팔을 잡아 끌었다.

순전히 돈 안되는 일에만 바쁘던 내 지갑은, 깡소주와 라면 국물만 집어 안겨도 밑빠진 독 모양이 되었고, 더 심각한 것은 체력 왕성한 후배놈들한테 실신할 지경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닌 다음 날 기억도 나지 않는 외상값이 거리 이곳 저곳에 나붙는 것이었다. 이런 생활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이 고량주였다.

고량주는 학생들이 흔히 즐기는 술은 아니다. 그래서 그 명성에 비해 실체는 잘 알려져있지 못하다. 그래서 술 배가 고픈 후배 서너 명이 몰려붙으면 가끔씩 나는 중국집으로 이끌었다.

"아저씨. 여기 짬뽕 국물하고 고량주 세 병이요"
이런 주문 앞에 흔히 경험이 많지 않은 후배들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형. 고량주 마시게요? 그거 독할텐데."
"괜찮아. 고량주가 얼마나 좋은 술인데. 이건 마신 다음날 머리도 안아파"

그런 흰소리나 뿌릴 때 쯤 나온 고량주를 한잔씩 그득히 따르고는 단무지를 안주 삼아 연거푸 석잔만 돌리면 충분하다. 이미 짬뽕 국물 안주가 나오기 전까지 처음 접하는 고량주 맛에 후배들은 주눅 들곤 했다. 그 때쯤 눈치를 봐가며 맞든지 틀리든지 고량주에 대한 이런 저런 상식까지 주워섬기면 언제까지나 '술 깨나 하는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고량주는 말야. 소주와 달리 화학주가 아니라 곡주기 때문에 보관 상태에 따라 맛이 많이 다르지. 내가 그래서 너희를 여기 데려온 거야. 이 집 고량주가 아주 맛이 좋거든. 너희 영화 붉은 수수밭 봤지? 그게 바로 고량주잖아. 이게 바로 수수로 만든 곡주지."

그 뒤로는 차근차근 얘기나 하면서 술자리를 즐기면 그만이었다. 본래 '이 자식 술 실력 좀 보자'거나 '술로 골탕 좀 먹여야겠다'는 우스운 속셈만 제거하고 보면, 술이란 많이 마시든, 적게 마시든, 누가 마시든 말든 흔히 자유롭고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몇 년만에, 요 며칠 연속으로 술을 마셨다. 축하받을 일이 있었고, 또 위로받을 일이 있었다. 그래서 또 무모할 정도로 술을 퍼붓고, 퍼먹이고, 또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한 섬은 쏟아놓고 지금은 또 술배를 바닥에 깔고 이런저런 후회와 흐뭇함 속에 히죽거리며 짧은 기억을 끄적거린다.

아마도 나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술먹는 습관이 아주 바뀌기 전에는, 술자리를 앞둔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술 안 취하는 약을 사먹을까, 아니면 우유라도 하나 마시고 들어갈까, 별 호들갑스런 생각을 다하면서 끌려가듯이 따라가는 술자리. 그리고 술 마신 다음날 소주 광고전단에 붙은 맑은 샘물 사진만 봐도 메슥거리는 배를 다스리며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한 나절.

그렇지만 또 술배가 가라앉으면, 술자리에 앉은 순간만은 아무도 두렵지 않다고, 또 온갖 쪼잔한 욕심들은 다 포기할 수 있노라고 배포 좋게 떠들던 자유로운 몽상들. 그것이 그리워 나는 다시 술을 마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주앉은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한 사람이 되고싶다는 무모한 도전으로 술자리는 또다시 미친 듯이 치열해질 것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친구에게 '술 한잔' 약속 외에 더 좋은 생각은 아마 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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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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