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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아이들이 재미를 가미한 인물사나 사건사가 아닌, '국사'나 '세계사'란 명칭으로 모든 부분 - 정치·사회·문화·경제 - 을 아우르는 역사를 배우게 되는 것은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갈 즈음이다. 이때서야 처음으로 역사란 역사가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쓰여진 역사가 실제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즉, 역사의 두 가지 측면 - '사실로서의 역사'와 '쓰여진 역사' - 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 수업시간에 그 어리디 어린 중학교 1학년들에게 이것을 가르치기란 정말 어렵다. 교사가 대학교 때 읽었던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역설할 수도 없고, 역사적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책을 쓰는 사람의 사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할 수도 없다. 참으로 난감한 부분이고, 그냥 넘어가 버리거나 교과서에 간단히 줄긋고 지나가는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아이들에겐 너무 어려운 '역사'

▲ 가락바퀴(위)와 가락바퀴 사용 모습(아래).
내내 고민하다가 선택한 방법이 아이들이 직접 유물의 사진을 보고 그 쓰임새를 상상하여 그려보게 한 후, 역사가들의 연구 결과와 비교해보게 한 것이었다.

이때 선택된 석기 유물 중 하나가 '가락바퀴'이다. 성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이 유물의 쓰임새를 정확히 알고 있을까? 사실 역사를 전공한 나조차도 조선시대에 실 잣는 기구인 물레쯤에서나 본 적이 있지, 선사 시대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이 '졸라맨'을 이용해 그린 결과물은 아주 다양했다. 고기 굽는 불판, 물 거르는 깔때기, 주판알, 당시 유행했던 뱃살빼기 운동기구까지. 전교에서 약 60명의 아이 중 정답을 맞춘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이는 물론 내가 노린 바이기도 하다. 이때 아이들에게 평생 기억할 수 있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 '가락바퀴'를 보고 주판알을 떠올린 아이의 그림.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어, 저거 접때 비디오에서 본 거네?" 몇 시간 전 남아메리카 고산지역의 인디오에 관한 비디오를 보았을 때, 마을 여인이 양털로 실을 뽑을 때의 모습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됐다. 이제 이 수업 다 끝났다. 역사가가 되어 보고 과거로 가보고, 현대에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까지 했으니 더 할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 가장 빨리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은 그림이다. 어느 유명한 교육학자의 연구 결과를 빌리지 않더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역사를 가르치다보면, 가장 난감한 부분이 이 그림이다. 옛 사람들이 그리거나 만들어놓은 것들은 많지만,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으며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어떤 마을에 살았는지를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자료가 별로 없다.

물론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 결과물은 내놓았지만 그것들은 각자의 전공분야에 맞는 저서나 논문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고 그것이 한데 어우러져 '사람 사는 세상'을 재현해 놓은 그림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늘 말로 때우거나 어줍잖은 그림을 그리거나 도식화된 설명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교사들의 고민을 70% 이상 덜어줄 것이 생겼다. 바로 <한국생활사박물관>이 그것이다.

선조들의 '삶'을 보여주는 생활사 박물관

2년 전, 이 시리즈의 첫 권이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큼직한 도판에 담겨 있는 옛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교사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으니까. 그 방대한 연구 결과와 충실한 일러스트레이션 덕에 매우 더디게 한 권씩 한 권씩 나와 기다리는 사람의 애를 태우더니, 어느덧 목표로 한 12권의 중 절반이 채워졌다.

이 책의 첫 시작은 2000년 1월 1일과 기원전 40000년 8월 15일의 서울이 담긴 두 장의 '삶'의 현장 사진에서 출발한다. 이어 2000년 광화문의 공사현장과 기원전 4000년 북한산의 사냥 현장, 2000년의 잠실 롯데월드와 기원전 2000년의 암사동 놀이 현장을 비교한다. 그리고 결론 내린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류는 하나이며 그들의 삶도 하나이다." 역사책의 시작치고는 매우 특이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편견 없는 눈으로 담아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이러한 발상의 자유는 제6권 '발해·가야생활관'에서 그 극을 보인다.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 태씨 가족들의 사진을 첫 장에 사용하여, 역사상 가장 큰 나라였지만 아직도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하고 있는 발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또 하바로프스크의 백인 처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가 지금 발해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며, 상경성에서 발해 유적을 관리하는 예순 넘은 중국동포 리계용 씨의 사진을 보며 남과 북의 하나됨을 주장하기도 한다.

▲ <생활사 박물관>에서 집 자리를 재현한 그림.
모든 삽화 하나 하나가 국보급!

책장을 넘기면서 한 장 한 장의 그림과 사진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단지 유물이나 유적의 현재 모습만을 덩그러니 보여주던 일반적인 삽화나 사진과는 다르게, 그것이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을 철저한 고증과 연구결과에 바탕하여 지금이라도 살아나올 듯 재현하고 있다.

여태까지 '갈돌, 활비비' 등 이름만으로 따로 떨어져 일렬로 죽 전시되어 있던 것들이, 그림에서는 한데 어우러져 제 자리를 찾아 삶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고, 각각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붙어 있다. 또한 당시에 이곳에 살았을 가상의 인물을 정해 그의 일상 이야기를 일기처럼 적어 이해를 쉽게 하였다.

바닥에 삐죽 삐죽 징이 박힌 고구려의 금동신발을 볼 때 누구든 해보았을 생각이 "이 걸 어떻게 신어?"인데, '이 걸 어떻게 신었는지' 보여주는 삽화가 이해를 돕는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절대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을 이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확실한 제 빛깔을 되찾고 커다란 크기로 실린 유물의 사진들도 이 책의 미덕이다. 기껏해야 흑백의 사진들, 그리고 너무 작아 부분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던 유물의 사진들이 이 책에서는 제 모습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이 유물들의 발굴 현장이나 실제로 그 사용법을 재현해보는 사진 등도 함께 있으니, 이해를 위해서는 이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 <생활사 박물관>에 실린 석기로 코끼리 가죽을 벗기는 사진.
교실 한쪽 벽면의 두 배는 족히 넘을 반구대 암각화나 고구려 고분의 천장 구조를 손바닥만한 사진으로 대신해야 했던 답답함도 이 책에서는 어느 정도 풀어주고 있는데, 네 조각으로 접혀진 속지를 펼치면 시원한 크기의 사진이 똑똑한 빛깔의 그림을 보여준다. 과감하게도 책의 판형을 뛰어넘으며 갖가지 형태의 접힘과 속지를 이용한 석굴암도 이제 그 구조와 의미를 설명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다.

이 시리즈 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제3권 '고구려 생활관'에는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고분 벽화의 제작 과정,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 그림 속 인물들의 재현 모습 등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세계의 벽화'란 주제의 비교 강의까지 거치면 벽화 속에 담긴 선인들의 삶이 다가온다.

또 제4권 '백제생활관'과 제5권 '신라생활관'에도 역시 당시 유물과 그림을 바탕으로 하여 재현한 고대 복식들의 그림이 많다. 삼국의 문화 차이를 잘 보여주는 이것들을 이용하면, 이제 삼국시대를 가르치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삼국 패션쇼'를 해보고자 했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각 모둠별로 나누어 음악과 의상, 무대 장치까지 각 국가별, 시대별로 준비하고 벌이는 패션쇼는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 왼쪽부터 고구려 여인, 신라 왕족, 백제 귀족 청년의 모습.

▲ 사계절 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생활사박물관>. 모두 12권으로 기획된 이 책은 현재 6권까지 발간됐다.
각 권에 붙어 있는 부제목도 아주 눈에 띈다. 매우 시적이며 함축적이어서 각 시대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는데, 우주와 천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으며 그것을 일상에서 형상화했던 고구려는 "LIVING IN THE CENTER OF UNIVERSE", 철저히 파괴되어 그 역사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백제는 "LIVING IN THE LAND OF MYSTERY", 그 찬란한 문화가 천년을 이어갔던 신라는 "LIVING IN THE MILLENIUM KINGDOM"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글 제목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직 갈 길이 먼 책이다. 앞으로도 고려·조선·20세기 생활관이 계속될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갈 수많은 글과 그림을 만들어내는 일은, 모르긴 몰라도 머리카락을 하얗게 새게 하거나 뭉텅이로 빠지게 할 정도로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우리나라의 역사를 위해서 기꺼이 고생하시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그 고생의 끝에 우리 아이들의 맑은 정신이 함께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겁 없는 부탁 두 가지.

고생스럽더라도 한 권 한 권 출간하는 기간을 줄여주시라. 기다리다가 목이 길어질 지경이니. 그리고 완간하시걸랑 다음 기획으로 '모형 만들기'를 기안해주시면 어떨지. 고구려 고분, 신라 황룡사 탑, 백제 용봉향로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는 기쁨 또한 누리고 싶으니.

한국생활사박물관 1 - 선사생활관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지음, 사계절(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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