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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지역감정 조장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영남 패권주의의 수장으로서,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경상도를 기반으로 하여 소위 '1등 신문'의 반열에 올라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다 지역감정은 망국적인 병이라고 걱정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조선일보는 그들의 패권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10월14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는 재경 경남향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불청객 YS를 포함하여 김혁규 경남도지사,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측근인 김종하 국회부의장과 한나라당 하순봉 부총재, 한인옥 여사, 그리고 민주당 한광옥 대표 등이 참석했다.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모여 회포를 푼다는 데야 시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동창회라는 모임엔 가본 적이 없고, 지금 살고 있는 작은 신도시에서나 전에 살던 서울에서나 향우회 나오라는 권고를 받아본 적이 없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도 아니고 무작위로 도 단위의 향우회라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경험이 없으니 인식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시비 걸 근거도 없다. 문제는 지역 정서를 교활하게 악용하는 정치인들의 언행과 이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다.

경남향우회 행사는 모든 신문들이 비중은 작지만 놓치지 않고 기사로 다뤘다. 여기서도 조선일보는 단연 돋보였다. 지역감정, 특히 영남지역의 정서를 부추기는 데 홀로 독주하여 1등을 했다. 15일자 9면에 2단으로 실린 관련기사의 주요 대목을 보자.

"'제1회 재경 경남향우 한마당 큰잔치'가 14일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서 1만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우선 행사명을 이렇게 정확하게 소개한 것도 조선이 유일하다. 다들 '경남향우회' 정도로만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참석인원도 가장 많게 1만 명이 넘게 참석했다고 했는데, 참고로 동아는 5000여 명, 중앙과 한국은 4000여 명으로 표기하였다. 조선은 기사의 제목이 아예 <재경 慶南향우회 1만여명 참석>이었다. 성황을 이루며 세를 과시한 행사였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차기 대선에서 경남도민들의 단결을 호소, 큰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조금 더 들어보자. 김종하 부의장은 "4년 전 경남인들이 분열되는 바람에 정권을 뺏겨 지금 고통받고 있는데, 다시는 '제2의 이인제'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차기 대선에서 경남도민들이 4년 전의 분열(?)을 되풀이하지 말고 단결하여 영남당인 한나라당 후보를 무조건 찍어줄 것을 호소했고, 큰 호응을 받았다는 얘기다. 아직 각 정당의 후보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상도 사람들은 무조건 한나라당 후보를 찍어달라! 이것은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신문이 이것을 받아 부추겨서야 되겠는가? 모름지기 바른 언론이라면, 이 대목에서는 정치인들을 꾸짖고 군중심리를 다독여야 정상일 것이다. 적어도 신문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을 호되게 나무란다면 지역감정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4년 전 경남인들이 이인제에게 표를 많이 주는 바람에 정권을 뺏겨(?) 고통을 당하고 있단다. 뺏기다니. 정권이 원래 저들의 전유물이었던가? 게다가 경상도 사람들이 투표를 잘못해서 고통을 받고 있단다. 이것은 국민주권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지역감정을 악의적으로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이것을 천연덕스럽게 경상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신문들은 어땠을까? 조선처럼 영남 지역의 정서를 자극하는 신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동아는 유일하게 YS가 당초 불청객이었음을 밝혔으며, 중앙은 "모임에선 지역정서가 노출됐다"는 표현으로 우회적으로나마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기사의 비중은 크지 않지만 이렇게 작은 기사라도 조선일보는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긴다. 큰 기사는 큰 기사대로, 작은 기사는 작은 기사대로 독자를 세뇌시키는 데 여념이 없는 것이다. 잔 펀치라도 지나치게 많이 맞으면 캔버스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다. 매 앞에 장사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건재하는 한 망국적인 지역감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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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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