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구 소련연방공화국들이 개방과 독립 이후 여러 가지 문제를 겪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언어문제이다. 중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공화국들은 물론이고, 유럽에 위치하고 있던 공화국들 모두 자신들의 고유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현재 고유언어는 러시아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생존을 위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인데, 대표적인 예가 '백러시아'라고 알려진 '벨라루시'와 '우크라이나'이다.

벨라루시어와 우크라이나어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공공장소나 국회나 학교에서도 러시아어의 영역에 밀려 언어로서의 구실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모든 공문서는 현지어로 번역을 해서 제출한다는 규율이 있다고는 하는데, 단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느낌만 들 뿐이다. 현지어는 시골과 일부 특정지역에서만 들을 수 있다.

발트3국의 경우 이러한 경우에는 치닫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리투아니아어나 라트비아어, 에스토니아어 모두 공용어로서 활발히 쓰이고 있고, 현지어 사용이 단지 구색맞추기 정도에 지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구 소련 공화국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말할 수 없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길거리나 주택가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라트비아어로 무엇을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을 얻을 수가 없다. 좀 큰 상점이 아니고 길거리에 있는 작은 신문가판대나 구멍가게에 들어가도 라트비아말을 해서는 껌 한 개 살 수 없을 정도이다.

일단 라트비아어로 무슨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필수적으로 '바이 유스 루나얏 라트비스키? (라트비아어 할줄 알아요?)'하고 물어보아야한다. 라트비아에서 라트비아인의 비율은 단지 57%!. 60%가 채 안되어 라트비아 전체의 반 정도 밖에 안 된다고 보아도 상관 없다. 게다가 수도 리가에 거주하는 라트비아인들은 수도 인구의 '40%(!)'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인의 인구가 60%를 차지하는 만큼 라트비아인들은 수도에서 정작 '소수민족 아닌 소수민족'으로 밀려난 처지이다.

이런 현상은 단지 수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관광도시로서가 아니라, 규모면에서 알려진 대도시에 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라트비아 제2의 도시 '다우가우필스(Daugavpils-v가 음절 끝에 오면 '우'로 발음되므로 '다우가우필스'가 맞다.)'의 러시아인은 전체도시인구의 80%. 그곳에서는 라트비아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라트비아 남부 '레제크네(Rezekne)', 서부의 '벤츠필스(Ventspils)' 리가 근교의 '유르말라(Jurmala)' 등의 대도시에서도 상황은 똑같다. 사정이 이러니 라트비아를 다녀온 사람들은 라트비아어가 러시아어와 참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길거리 표지판이나 공공장소의 문안은 전부 라트비아어로 되어있지만, 극장의 자막은 전부 러시아어가 같이 표기되며, 라트비아 현지 방송에서도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방송 반, 라트비아어로 진행되는 방송이 거의 반 수준이다.

신문도 러시아어판, 라트비아어 판 두 언어판으로 인쇄되어 나오지만, 라트비아어판은 리가에서나 구할 수 있을 정도며, 위에 열거한 대도시에서는 신문가판대에서 아예 라트비아어판은 내놓지도 않는다. 라트비아에서 태어났어도, 러시아 학교를 나오고, 러시아 신문만 보고, 집안에서 러시아어로만 이야기하고 자란 러시아인은 라트비아어를 정말 한마디로 모르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어 외에도 라트비아 남부의 '라트갈레(Latgale)'라는 지역에서 쓰이고 있는 지방어의 부상으로 라트비아어는 설 자리가 더 좁아지고 있다. 라트갈레어는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와는 다른 또 다른 발트어로 공식적으로 분류되어가고 있는 단계에 있고 라트비아의 또 다른 공용어로 지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는 언어이다.

라트갈레 현지인들의 말을 빌면, 라트비아에서 러시아인들이 나가면, 라트비아인보다 라트갈레인들이 다 많을 것이라고 한다. 정리해 말하면 라트비아에서는 현재 3개의 언어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에스토니아의 경우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라트비아는 러시아인이 라트비아 전역에 고루 퍼져 사는 반면 에스토니아는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와 가까운 동부지역에 많이 치우쳐 거주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전체에서 러시아인의 비율은 28%.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의 동부의 공업지대인 '나르바(Narva)'와 '코흐틀라 옐베(Kohtla-Jarve)' 등지에 모여살고 있어, 그 지역은 거의 러시아도시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사투리가 있긴 하지만, 라트비아의 라트갈레어처럼 심각한 상황의 언어는 없다.

리투아니아의 경우는 상황이 상당히 낫다. 일단 리투아니아 어디에도 리투아니아어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곳은 없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소련시절에도 러시아인들의 이주가 다른 공화국보다 비교적 적어, 현지인 비율이 아주 높아 전체 러시아인의 비율은 채 9%가 되지를 않는다. 러시아인이라 할지라도 리투아니아어를 구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굳어져있다.

수도 '빌뉴스(Vilnius)'에서도 러시아어를 듣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그곳에서는 '어, 저 사람 러시아말 하네' 하고 분명히 구분이 될 정도이다. 리투아니아 같은 경우 다른 두 나라와 상황이 좀 다른 것이, 수도 빌뉴스 인구의 약 20% 이상을 차지하는 폴란드인들이다.

빌뉴스가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폴란드의 도시로 존재한바 있어 빌뉴스에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이 많이 있어, 아직까지 빌뉴스를 자국의 도시로 여기고 있는 폴란드 사람들이 아주 많다. 폴란드 신문과 잡지는 빌뉴스에서도 버젓이 팔리고 있고, 폴란드어로 방송되는 라디오 방송국이 활동 중이고, 빌뉴스 서점 한귀퉁이에는 폴란드어 서적이 진열되어 팔린다.

러시아어는 폴란드어에 비하면 차라리 찬밥이다. 리투아니아에는 가보았으나 수도 빌뉴스 외에는 가본 일이 없는 사람은, '리투아니아 가니까 폴란드어가 통하더라'하고 말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수도 빌뉴스를 벗어나면 볼 수 없다. 그리고 빌뉴스에서 사람들이 구사하는 폴란드어는 사실, 벨라루스어 방언에 가깝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것과 동일한 시스템으로 가동되는 원자력발전소로 유명한 호반의 도시 '이그날리나(Ignalina)'에는 발전소 관리를 위해 러시아에서 이주한 노동자들이 많이 있으므로, 러시아인의 인구비율이 비교적 높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리투아니아어로 이야기를 못하는 러시아인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에서 러시아인의 인구비율이 아주 높은 이유는 과거 소련 시절 다른 공화국보다 발전수준이 상당히 높고, 공업분야도 발전되어있어 기술자들과 고위직 간부들이 발트3국으로 많이 이주를 해온 탓도 있고, '소비에트문화'건설을 위해 모든 민족을 한데 섞어놓으려는 소련의 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2차대전 직후 발트3국에서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된 인구도 아주 많다.

이런 관점에서 발트3국은 스위스나 벨기에 같이 여러 언어권의 민족이 어우러져사는 인상을 줄 수가 있지만, 자신들의 선택으로 결정된 상황이 아니며, 또 각 언어권이 지역적으로 정확힌 분산된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나게 된 것이 불과 50여 년에 지나지않아 거기에 따르는 여러 문제들을 대처할 준비도 충분히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

공식적으로 발트 각 국의 공용어는 발트현지어이며, 시민권이나 취업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길은 현지어를 습득하여 정당한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위에 말한 바대로 각 국가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이 대다수 현지어를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합법적인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되므로, 이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1999년 겨울 현재 공식적으로 집계된 라트비아의 시민비율은 전체 인구의 72%에 불과하다. 26% 정도의 거주자는 현지 정부에 세금을 비롯한 여러 의무사항을 전혀 실행하지 않고 있는 불법체류자라는 말이다. 현재의 라트비아의 러시아인과 라트비아인 사이의 관계를 보면 한 나라에 거주해 살고 있는 '두 집단'으로 이질화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라트비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국적이 '라트비아인'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라트비아에서 살고 있는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라트비아인들은 러시아어를 거의 구사할 수 있지만, 러시아인들은 라트비아어를 구사할 '필요가' 없으므로, 어쩌면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라트비아는 라트비아에 거주하는 모든 소수민족은 라트비아언어와 역사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시민권을 얻는 강경한 정책을 고수하고 있어 러시아 정부와, 심지어 유럽연합으로부터 쏟아지는 '소수민족 탄압'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지만, 자신들의 언어를 모르는 소수민족을 위해 신문을 발간하고, 방송을 하고, 책을 출판하는 등 나름대로 국민의 화합을 이루려는 노력을 많이 시도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볼 때, 그 '소수민족 탄압'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되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라트비아는 러시아로부터 한때 무역장애까지 겪는 상황에 이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은 에스토니아 역시 마찬가지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무역과 서비스 분야의 종사하는 근무자들이 전부 중급이상의 에스토니아어를 구사해야한다고 최근 공식 발표하여, 러시아인들의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 에스토니아에 사는 러시아인들은 라트비아인들에 비해서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에스토니아어가 라트비아어에 비해서 배는 더 어렵다.

덧붙이는 글 | 필자의 발트3국에 대한 홈페이지
http://my.netian.com/~perkunas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